고은 시인은 ’ 관광‘이라는 말에 의미에 대해 그곳에 빛을 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는 거기에 내린 빛을 발견하는 일이 관광인 것이다. 사람들은 낯선 곳에 자신을 던져 놓음으로써 본래의 위치를 인지하게 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수용하게 한다. 낯선 풍광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은 관광이라는 여행을 개발하게 된다. 17-19세기 유럽에선 극소수의 부유한 귀족 자제들이 ‘그랑투어(grand tour)’라는 이름의 유랑을 하며 곳곳의 역사와 고전을 몸으로 체화하고 예법을 익혀야만 상류층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과 노동력의 착취로 이루어지는 그랑투어는 철도의 발명과 함께 여행의 보편화로 시들해지고, 귀족들은 자신을 남들보다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효용 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유럽에선 획기적인 기계장치가 발명된다. 카이저파노라마(kaiserpanirama)라 불리는 이 장치는 원형의 통 주변에 여럿이 모여 유리로 된 입체경으로 이미지를 슬라이드 형식으로 관람하는 장치다.
동전을 투입하고 낯선 이국의 풍경을 120초 간격으로 보여주는 이 장치는 기존에 가지던 이미지에 대한 개연성을 파괴했다.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는 누군가를 보다가 일본의 기모노 입은 여성을 비추고는 런던의 일상으로 전환한다. 파노라마 형식으로 파편화된 이미지를 수용자가 받아들이게 한 다음, 연속된 사진의 이미지가 인과율로 흐르던 세계를 무너뜨리고 서로 다른 시공간의 접점을 만든다. 시네마는 그렇게 탄생한다. 관객의 경험에 카메라가 조망한 이미지들, 근대의 식민주의가 어우러져 관광객의 파노라마적 체험이 혼재된다. 근대적 의미에서 관광은 근대의 시각을 기계장치를 이용해 흡수하는 행위다. 다시 말해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시공간을 재구축해 지각하는 관광인 것이다.
“그랜드 투어”에는 두 가지 여행이 나온다. 하나는 버마로 파견된 영국 공무원 에드워드가 약혼자인 몰리를 피해 도망치는 여행이고, 또 다른 여행은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몰리의 추격극이다. 이것은 표면적 서사에 한정된 진술일 뿐이고 한 발짝 넓은 범위에서 보면 20세기를 향유하는 커플의 뒤를 밟는 픽션에 수많은 아시아의 풍속을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결합한다. 도피와 추적의 내러티브 안에 어떤 맥락에서 삽입이 된 건지 알기 힘든 불규칙한 장면들은 인형극과 오페라 무대, 유람선과 기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에드워드가 그리는 그림, 달아나는 동물과 잠드는 인간이 단면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미겔 고메스 감독의 ”시네마 투어리즘“인 것이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이전에 독특한 관계로 결부된 근대의 식민사관과 영화의 이미지를 파노라마처럼 꿰어 관람자의 시각을 재구축한다.
그랜드 투어는 다층적인 관광 지도를 그리기 위해 스튜디오와 로케이션 그리고 원거리에서 찍은 푸티지를 뒤섞는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발생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낯설게 교차해 화면이 가지는 위상의 근거를 파훼한다. 미겔 고메스는 관광객의 동선을 따라 장소를 이동하고 그렇게 흩어진 장면들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영화 속 관광객은 감독이 설정한 좌표에서 움직인다. 에드워드와 몰리는 도주와 추적이라는 충동적 움직임을 보이지만 그들의 동선에는 관광적 여행과 경합하는 형태로 보인다. 영화의 중반부 에드워드는 가면을 쓰고 이동하는 일본 승려들의 행렬에 합류한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안 되는 낯선 동행에서 그는 평안을 느낀다. 그가 탄 열차가 느닷없이 전복되듯 맞춰진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다른 장소로 침입하며 또 다른 규칙을 수행하고 새로운 것들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끊임없이 관찰한다. 직접 관여를 하거나 내면을 깊이 바라보는 대신 이동수단에 올라 수평으로 지나는 풍경을 지켜보거나 소형 택시에서 끝이 안 보이는 거리의 전경을 찍는다.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은 파노라마처럼 연속되고 그 단면에 있는 여행객은 어느 한 군데 정박할 수 없다. 그들은 눈앞에 외양에 집중하면서 그전에 인식하던 세계의 단면은 잊어버린다. 에드워드와 몰리는 각자 외부에서 오는 생경한 자극에 반응한다. 직전 장면에서 주어지는 자극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샌더스와 춤을 추던 몰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들 어디 간 거냐며 묻는다. 영화에서 관광객은 주변에서 잠시 나타나고 곧장 다른 곳으로 향한다. 버마를 시작으로 싱가포르, 방콕, 베트남, 일본과 중국을 가로지르는 여정은 인과율에 기대지 않는다. 오직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탈출구를 찾을 뿐이다.
쫓아오는 몰리를 피해 양자강 상류행 배를 타는 에드워드를 비추면서 영화의 내레이션은 마작을 즐기는 중국인 가족을 묘사한다. 에드워드는 규칙을 아는 듯 해 노인의 자리에서 엉망으로 게임을 한다. 노인이 웃는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내레이션이 입혀지는 동안 카메라는 어느 노인의 무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마작을 하는 모습을 담는다. 화면에는 에드워드도 없고, 노인은 웃지도 않는다. 마작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가족인지, 그들이 중국인인지도 확인이 안 된다. 연출자의 통제 밖에서 포착한 이미지인지, 에드워드의 허구의 상상인지 모호하다. 이 장면은 영화 속의 이미지와 내레이션을 미묘하게 연결하는 동시에 떨어뜨린다. 내레이션 목소리가 설명하는 상황과 화면 속 상황은 언뜻 유사한 요소를 공유하는 듯 보이지만 절대 명확한 게 붙지 않는다. 이것이 그랜드 투어의 불화정적 양상이다. 픽션으로 찍힌 화면과 다큐멘터리처럼 포착된 푸티지, 20세기의 과거라는 시제와 인물의 정념을 설명하는 내레이션, 화면 안 인물의 행위는 결국 에드워드와 몰리의 물리적 심적 거리로 나타난다. 부딪힐 듯 가까우면서도 끝내 만나기 어려울 만큼 두 사람, 두 세계는 이상한 간극을 만든다.
그랜드 투어에서 관광객들이 수행하는 것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연결 안 되는 세계의 단면을 연속으로 슬라이드처럼 지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모든 요소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분리 불가능한 관계에 놓여있다. 가령 에드워드가 일본에서 삿갓 같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몰리 역시 방콕에서 가면무도회에 참석을 한다. 또한 중국의 숲 속에서 잠든 에드워드의 머리맡엔 뜬금없는 불상이 놓이는데, 이는 중국에 도착한 몰리가 목격하는 거대한 불상과 겹친다. 인물과 세계는 서로 어긋난 채 전염된다.
우리는 우리 자체를 플랫폼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고정된 상태로 드나드는 누군가를 맞이하는 만약 플랫폼이 아니라 이동 수단 그 자체라면 어떨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경로와 관객의 경로가 같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고유한 얼굴을 한, 출발지와 행선지가 뚜렷한 영화 탑승객이었다. 그랜드 투어는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관광객의 시야로 낯선 곳을 여행하길 주문한다. 부서지고 흩어진 눈으로 영화에 접속할 시간이다.
첫댓글 오랫만에 소대가리 리뷰 반갑!
인과에 기대지 않는다. 뭔가... 파편의 느슨한 연결이 주는 미학을 즐기는 영화로군요! 잘 이해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서사가 없다고 시 같은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흑백으로 찍혀 있지만 1910년대 일리가 없는 장면들을 1910년 대에 쫒고 쫒기는 사람들의 나레이션에 붙이니 머리 속 지진이 나기 시작했는데 또 그게 재미기도 했어요. 묘하게 어울리는. 감독이 여러 곳을 바라보며 머리 속 가상 인물을 생각하는 건가 했죠. 에드워드가 그토록 피하는 것도 몰리가 그토록 쫒는 것도 사실 이상해요.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말하는 건가 짐작만 했습니다. 같은 석상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결국 끝은 다르고 같은 것이긴 하네요.
마지막 몰리의 무리한 강행에는 기가 차고 말았습니다. 1910년대 코쟁이들이 나빴죠 동양에서.
리뷰에서 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지적깊이가 느껴집니다
꼼꼼히 기록하시고 주의깊게 보셨네요..
기회되시면 타부를 권해드리고 싶어요
명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