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이 그리는 가족은 어딘가 결여되어 있다. 구성원이 부재하거나, 어딘가 뒤틀린 관계를 하고 있다. 그들은 공허한 시선으로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연극톤의 대화를 이어가다가 특정 장소로 떠난다. 자신들에게 없는 무언가를 찾아 한 장소에 모인 그들이 발견하는 건 떠나고서 만나는 자신이다. 잃은 것과 지난 세월이 빚어낸 회한이 만들어낸 환상을 좇고 있었음을 알고는 각자의 길로 간다. 이번 작품 <페니키안 스킴> 역시도 비슷한 주제를 반복하는 듯 보이지만 죽음과 종교, 사명을 지닌 인물들이 각자의 삶에 매진하다 다시 화합한다는 지점에서 차별점을 둔다. 거기에 1.5:1의 화면 비율과 패닝을 이용한 연출은 인물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깨닫게 되는 현실 접점을 이루는 강박적인 구조, 대칭과 바로크풍의 음악과 소품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연출은 적절한 거리감을 조성하며 여전히 웨스 앤더슨의 기질을 증명하고 있다.
첫 시퀀스에서 주인공의 비행기가 추락하고 옥수수밭에 떨어진 그는 옥수수 하나를 따서 한 입 먹고 뱉어낸다. 이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인물인지 보인다. 옥수수는 침략의 산물이다. 밭에 무단으로 불시착 후에 작물을 섭취하는 것은 가차 없이 내려앉아 빼앗고 보는 근대의 유럽인들과 자본가를 상징한다. 거기에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해상 무역을 하던 고대문명으로 알려졌다. 최초로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다른 도시와 교류를 통해 자본주의 초기 모델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 이 영화는 한 인간의 성찰과 세계의 변화는 프랙털적인 구조로 작동함을 증명하려 한다.
영화는 6번의 암살 시도에 겨우 살아남은 자자 코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살해 위협에 은거 대신 후계를 정해 숙원 사업인 ‘페니키아 기반시설‘ 프로젝트의 진척을 서두르려 한다. 그를 위해 슬하에 있던 아홉 아들과 그들의 누나인 리즐 중 맏이를 선택해 상속을 진행하려 한다. 수년간 아버지와 소원한 사이로 지낸 그녀는 수련 수녀로 물려받을 재산에 일절 흥미가 없다가 아버지가 세 부인중 한 사람인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고 의심하기에 그의 곁에서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한편, 암살 기도와 동시에 사업에 방해 공작으로 인해 그의 프로젝트는 좌초 위기에 놓인다. 자자 코다는 손실로 인한 갭을 채우기 위해 투자자들을 만나야 한다. 이 험난한 여정에 딸인 리즐과 정체 모를 가정교사 비욘이 동행한다. 어떤 사고에도 살아남는 불멸의 남자, 스파이물에 주인공 같은 강렬한 등장과는 별개로 영화가 주는 자자 코다의 정보는 제한적이다. 20세기 무렵에 큰 성공을 거둔 거물 사업가로 보이나, 어떻게 부를 축적하고 왜 딸을 사업의 후임자로 내정했는지는 무시하고 이야기는 진행된다. 생뚱맞은 사업가와 수녀, 곤충을 좋아하는 가정교사의 조합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세 사람은 화물선과 수력발전댐, 호텔과 나이트클럽을 경유하며 해운 재벌과 육촌, 동생 등을 만나 갭에 대한 협상을 벌인다. 이때,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처럼 각 장을 분리해 병렬 식으로 소개한다. 자자 코다는 사업가들의 개별 정보를 형태가 제각각인 신발 상자에 보관한다. 이는 웨스 앤더슨의 정교한 미장센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들의 여정은 순탄치가 않다. 배당을 줄이기 위해 투자자를 만나지만 농구 시합을 제안받고, 사막에선 공산주의 무장단체를 만난다. 그리고 7번째 비행기 추락이 있었지만 그는 기어이 살아남는다. 죽음의 순간마다 흑백으로 처리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먼저 간 아내들과 재회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신을 만나기도 한다. 고비를 넘기는 순간마다 자자 코다는 조금씩 달라진다. 본래의 모토가 ”방해가 되면 처리해 버린다. “는 신념으로 살아왔고 그런 식으로 부를 쌓아왔지만 자신을 막으려 미국 정부가 나서고, 노동자들은 사보타주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된다. 리즐의 몰랐던 면모도 발견한다. 수녀가 되기엔 물욕적이고 즉흥적인 모습을 본다. 함께 고생을 하며 서서히 마음에 빗장이 풀리며 진짜 가족으로 변해간다.
그때 사용되는 음악도 인상적이다. 라벨이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프롬나드’를 사용함으로써 자자 코다의 심경을 대변한다. 또한 책상에 해골모양의 장식과 한앵글에 담기는데 유화 캔버스 같은 화면비율 때문에 바로크 시대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죽음의 상징과 같은 배치를 통해 그에게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붙어있음을 암시한다. 마지막 장면에 해골 그림이 있는 테이블에서 리즐과 카드 게임을 하는데 그녀가 내려놓는 카드가 하트다. 영화 속에서 천국을 우습게 묘사하듯 죽음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말한다.
극의 후반부에 가서 자자 코다의 암살 시도와 아내의 죽음을 동생인 누바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형이 무너져야만 자신이 완벽해질 거라 믿는 동생과의 한판승부 끝에 누바는 형이 만든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고 자자 코다가 염원하던 페니키아 스킴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자자 코다는 모든 것을 내려두고 작은 식당을 연다. 당연하게도 리즐은 수녀 원장의 권유로 속세의 삶을 택하고, 비욘은 학교에 교사가 된다. 모든 것을 잃은 듯 보이는 그들은 홀가분해 보인다. 그들은 여전히 속물적이고 주어진 본능에 충실하다. 여전히 사랑하고 살아간다.
엔딩 크래딧이 횡으로 흐르고 바흐의 칸타타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 흐른다. 초반의 부감은 자자 코다를 욕조에 혼자 있는 외로운 모습을 담았다면 마지막엔 한 테이블에 리즐과 같이 앉은 모습이다. 수직적인 그들의 관계가 수평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자본은 끝없는 증식을 요구하지만 자자 코다는 7번의 추락을 겪으며 깨닫는다. “memento mori” 언젠가 우리 모두는 죽음 앞에 설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라.
첫댓글 이 영화 많이 어려워서요 ㅜ
이번에도 역시 빠르고 어마한 대사가 있을듯한 압박이 느껴지지만 그의 특유의 미장센이 궁금해집니다. ㅎ
게다가 베레치오 델 토로라니~!!
카페에 안부 인사라도 남긴다하면서도..ㅜㅜ
이리 정성스런 리뷰보며 진심 반성하고, 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아- 이제 편안합니다. 이 영화의 모든 소품과 장치가 의미를 담은 것이라 예상했지만 해골 빼곤 모르겠다 했는데 좀 알겠네요. 그래서 페니키안 스킴이군요! 그럼 실패했지만 어쩐지 더 편안해보이는 사장님의 모습이 당연한 귀결이네요. :) 아스테로이드 시티에서는 황량한 사막이나 흑백의 기억에 담아두는 쓸쓸함이 있었는데 좀 더 훈훈했어요.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게 배치된 욕실을 천장에서 보여주는 처음과 산만한 주방에서 카드놀이 하는 마지막이 기억에 남습니다.
전 영화를 보지 않고 소대가리님 글로만 먼저 접하는 영화가 꽤 되는데.. 꼭꼭 씹어서 입에 넣어주셔서 인지 늘 그렇구나 이해하고 느꼈거든요. 댓글을 보니 이 영화 많이 어려운 영화였나봅니다. 늘 이해하기 쉽게 해석판 써 주셔서 감사해요
영화보다 멋진 리뷰군요
웨스앤더슨에게 보내고 싶을지경입니다(그럴까요?ㅋㅋ)
저는 이제 웨스 앤더슨의 강박 프레임에 실증이 나기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