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목사의 생활신앙이야기: 새해 영성 피정(避靜) 이야기 ◈
동행자의 상황 때문에 이번 피정은 계획보다 한 주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10시 20분 교회를 출발해 태봉 초등학교 길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제일먼저 드린 내 기도는 장로님 댁과 이 권사님 댁을 바라보며 드린 기도였습니다. 피정 길에 교우들의 집이 있다는 것도 은총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일장신대까지의 길, 난 이 길을 ‘겟세마니 기도의 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교우들과 함께 천천히 묵상을 하며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 얼마나 좋은 길이든지...
친구는 앞서며 기도하고, 난 뒤 따르며 기도를 했습니다. 10.12km의 길은 그렇게 기도의 길이 된 것입니다.
대학 입구 버스정류장에 앉아 첫 휴식 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동행을 한 김영기 목사가 배낭에서 작은 우유팩과 시리얼을 꺼내더니 우유팩에 시리얼을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먹기 시작하는 겁니다. 참 기발한 피정 식사법이었습니다.
간단하면서도 든든하고, 저렴하면서도 친환경적인 식사는 피정 내내 정류장, 또는 양지바른 곳에서 계속됐습니다.
우유팩 시리얼로 기운을 차린 우리는 전주 외곽도로를 따라 아중리 저수지를 왼쪽에 두고 걷다가 봉동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세상의 소음과 달리는 차들의 위협(?)으로 심기가 불편해진 우리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려고 지나가는 차를 세웠습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차 한 대가 섰습니다. 젊은 연인이었는데, 남자친구를 아버지께 첫 인사를 시키러 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초코렛 하나를 건네는 겁니다. 초코렛을 받아들고 김 목사는 그들의 앞길을 위해 기도가 담긴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알고는 얼마나 좋아하던지...
첫 인사가 행복하게 끝났을 것이라고 난 믿습니다.
봉동에서부터 고산까지의 길은 눈 덮인 자전거도로 탓에 한적하면서도 운치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오른쪽에는 대둔산으로부터 내려온 물이 봉동천을 이루고 꽤 많은 오리들이 날랐다 앉기를 반복하며 우리들의 피정을 응원해 주었습니다. 고산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무리 찜질방을 찾아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산 유일의 여관이라는 곳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역시 유일한 목욕탕을 같이 하는 곳이었는데 70년대 영화세트장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피곤한 몸을 맡기기에는 아방궁보다 훌륭했습니다.
욱신거리는 발을 끌고 날이 채 거두어지지 않은 시간에 대둔산을 향해 걸었습니다. 32km의 긴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바다와 하늘이, 망울이와 아모르를 닮은 개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모두들 묶여 있었지만 때로는 테너로, 묵직한 바리톤으로 컹컹 짖으며 우리들을 반겨(?)주었습니다. 차가 적은 도로를 걸으려고 빙빙 돌아갑니다. 그러니 여정길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운주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려는데 마땅한 집이 없습니다. 그래서 운주 중학교 학생(건하를 닮은- 그래서 영화배우 하려면 연락하라고 뻥을 쳤더니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관심이 없답니다)이 일러준 곳으로 갔습니다. ‘천등산 활어 회집’첩첩산중에 왠 횟집? 의심이 갔지만 건하를 생각해서 들어갔습니다. 동태찌개-6천원, 정말 맛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맛있는 밥집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운주에서 얻은 것입니다. 건하 때문에(?)...
힘을 내어 다시 출발, 지쳐갈 때마다 대둔산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으면 고무줄 길이라도 되는 양 들쑥날쑥합니다. 더 힘이 빠지게 말입니다. 그러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집의 처마에 걸려 있는 곶감을 보았습니다. 오는 길에 널려 있는 것이 곶감 파는 집이었는데 그냥 지나치다 왜 그곳에 이르러 눈에 띄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곶감을 사서 아내의 이름으로 부쳤습니다.
김 목사는 박스에 연서(戀書)까지 적으면서...
이렇게 대둔산에 해가 질 무렵 도착했습니다.(스님이 세워둔 1톤 트럭이 눈길에 빠진 것을 도와주다가 더 늦었음. 참 오지랖도 넓음)
어두워진 탓에 진산에서 금산, 금산에서 추부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찾아들어간 곳은 ‘하늘 물빛 정원’이라는 찜질방입니다.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시설은 가히 1등급 한우 같았습니다. 8,000원을 내고 이런 멋진 밤을 보낼 수 있다니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입니다.
다음 날 찜질방에서 나오려는데 여성 4명이 만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다가가서 너스레를 떨고 김밥, 달걀, 과일, 식혜, 케이크 등을 얻어먹고는 딱 한 개 남은 호박즙을 건네니 넷이서 사이좋게(?) 나눠 마십니다.(그 틈에 장사했슴. 너무 좋다고 올 가을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여 약속함. 택배를 위해 그 중 제일 언니인 듯 한 분의 연락처를 물으니 여성 대통령이라고 이라 하여 뒷말을 들으니 참 신기하게도 이름이 박근혜 였슴)
좋은 만남을 뒤로하고 옥천으로 향했습니다. 온 길과는 다르게 충청북도에 들어서니 ‘육영수 여사 생가 보존회’에서 내건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널려 있습니다. 역시 옥천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처럼 활개치는 곳이었습니다.
16km의 길은 참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눈이 녹지 않아 인도 대신 차도를 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옥천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곳, 그런데 머리속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옥천입니다. 5,6만의 사람들이 사는 곳에도 찜질방은 없었습니다. 찜질은 호남 사람들이 좋아 하는 것인가 봅니다.
옥천의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참 일찍도 자는 친구 덕에 푹 쉬었습니다)
처음부터 일정이 옥천까지 였던 터라 느긋하게 아침을 맞았습니다. 청주에서 옥천까지 마중을 나오겠다는 후배 목사의 사랑을 뿌리치고 우리가 청주로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한 참을 걸어 시외버스 터미널을 이용해 청주로 이동했습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후배 목사(지난여름 뜨락 음악예배에 사모님과 참여하셨던 국사교회의 이수철 목사)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대청댐 근처의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은 물론 청남대 구경도 시켜주었습니다.
올해 부활피정에는 자신도 꼭 동반시켜달라는 것이 밥값이라며 몇 번이나 다짐을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들의 고단함은 싹 사라졌습니다.
집에서 한일장신대까지의 10.12km 길, 한일장신대에서 봉동까지의 28.5km 중 약 10km의 길, 봉동에서 고산까지의 약 8km의 길이 첫날 걸은 길입니다.
고산에서 운주까지 18.8km의 길, 운주에서 대둔산까지의 14km의 길이 둘째 날 걸은 길입니다.
진산, 금산, 추부를 거쳐 옥천까지의 약 20km의 길이 셋째 날 걸은 길입니다.
그리고 넷째 날은 약 5km의 길과 좋은 만남을 갖고 전주로 돌아왔습니다.
총 85.92km를 걸은 셈입니다. 시속 80km로 달리는 차로 따지자면 1시간 길을 나흘에 걸쳐 걸은 것이지요. 하지만 빨라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았고, 급해서 놓치고 사는 것들을 찾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도반(道伴)이 있었기에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 또한 공부(工夫)라면 공부일 것입니다.
“다시 산 아래로 가자”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내가 숨 쉬어야 할 곳에 왔습니다. 다시 가열차게 살아야 겠지요. 큰 마음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