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 수고에 관한 성경 말씀을 생각해 보다
전도자는 이렇게 말했지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2-4)
그래서 장례식장에 찾아갈 때는 마음이 훨씬 진지해지고, 내 삶의 남은 시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생학교의 7학년이 되었으니 이전보다 더욱 나의 문제로 여겨지고, 오래오래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장례식장에서 예배할 때에 듣는 말씀이 여러 가지인데 항상 새롭게 들려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체로 유족들에게 고인은 세상의 수고와 고통을 다 마치고 이미 주님의 품에 안겨서 안식을 누릴 것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으라는 내용과,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다 부활하여 기쁨의 만남을 가질 것이라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항상 새롭게 생각할 말씀이 한 가지는 있어서 좋습니다.
저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수고와 눈물, 고통을 겪는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수고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세의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90:10, 17)
저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가지는 10절의 우리의 삶이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17절의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범죄한 이후의 모든 인생은 ‘죄와 비참’이라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고와 슬픔을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행한 일이 있으니 그것을 견고하게 해 달라는 기도에 동감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바울 사도의 말씀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관하여 깊은 가르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 바울 사도의 수고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15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그러한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에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도전이 되는지요. 바울 사도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수고를 많이 한 후에 나이가 많은 시기에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1-12)
그는 자기가 고난을 받으며 수고하는 것이 결코 부끄럽지 않다고 확신하며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의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마치는 부분에서 다음의 고백을 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자기 일생을 이렇게 주를 위하여 수고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며 부러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편안한 삶만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괴로워서 어떤 사람들은 좀 더 편안한 삶을 그리면서 ‘윤회’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카말라의 임종을 접하고 새로운 측면에서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죽음은 감각본능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 즉 윤회의 일면임을 깨닫는다.
고타마는 아들을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이 온 것은 자기에게 행복과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근심 걱정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아버지를 떠난 것처럼, 아들을 떠나보낸다. 싯다르타는 윤회란 것을 새삼 느낀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37)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떡여지지만, 성경을 읽다 보면 전혀 바르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경지에까지 이르기를 작정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어 가십니다. 믿는 자들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하나님의 품으로 가서 안식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이 부활하여 영혼과 결합함으로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이 되어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37문 신자는 죽을 때 그리스도에게서 무슨 유익을 받습니까?
답: 신자는 죽을 때 그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쉽니다.
(Q 37: What benefits do believers receive from Christ at death?
A: The souls of believers are at their death made perfect in holiness, and do immediately pass into glory; and their bodies, being still united to Christ, do rest in their graves, till the resurrection.)
장례를 앞두고 잠시 슬픔에 빠진 유족들이 이러한 말씀을 기억하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살전 4:13) 할 것입니다. 잠깐은 슬플 수 있어도 그 슬픔에 종노릇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 의미 있는 ‘수고’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붙드사 이러한 진리 위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