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버로스는 컷업(cut-up)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법을 통해 소설을 완성한다. 문장을 임의대로 자르고 무질서하게 재배치 후 의미가 생기게 끔 이어주는 작업이다. 거기에 본인을 투영한 인물을 세우고 좌절과 방황의 서사를 기록한다. <퀴어>는 그렇게 쓰였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캐릭터 “윌리엄 리”를 전면에 세워 이야기한다. 헤로인에 빠진 상태로 아내인 볼머와 빌헬름 텔 놀이(머리에 컵을 놓고 총을 쏘는 놀이) 도중 사망 한다. 그는 멕시코를 기반으로 중남미 일대를 다니며 돈을 주고 남자를 사고 “유진 앨러턴”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어정쩡한 관계 속에서 야헤(아야와스카)라는 환각성 식물을 찾아 에콰도르로 여정을 떠난다. 그 여행에서 리는 자신이 퀴어가 아니라 퀴어를 갈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은 결국 야헤를 만나지 못한다. 그 허무한 여정이 남긴 것은 발버둥을 쳐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라는 굴레였다. 멕시코, 헤로인, 야헤, 퀴어, 앨러턴은 결국 망각을 위한 수단이었으나 더 선명한 모습으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를 옥죄는 수많은 상념들은 지네와 뱀의 형태로 나타나고 컷업의 자유로운 작법은 결국 주어진 문장을 못 벗어나고 그것을 재조립하는 자신의 생애와 닮아있다. 퀴어가 미완으로 끝을 맺는 이유도 그 안에서도 도망가지 못하는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루카 구아다니노는 이 소설을 자신만의 컷업 방식을 통해 재구축한다. 불필요하다 싶은 서문은 잘라내고 방탕한 시간을 보내는 리의 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된다. 웨스 앤더슨의 작품을 보는 듯한 정교한 세트는 이질적이고, 인공적으로 보인다. 원작의 습하고 너절한 멕시코 대신 은은한 불빛이 감싸고, 자연광이 내리쬐는 곳으로 만들었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에 데이비드 린치의 세계관을 지닌 인물들이 있는 것 같다. 버로스의 퀴어가 ‘도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구아다니노의 퀴어는 ‘외로움’이다. 욕망 3부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은 그 정점에 있었다. 정지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움직이려는 사물들처럼 프레임 속에 포커스를 불안하게 만들어 약동하는 씬을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만들어진 그 만의 몽타주는 다양한 방식의 촬영과 편집, 비선형적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 지기를 외친다.
구아다니노와 버로스가 구현하는 리는 갈구와 도주라는 명확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구아다니노는 이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 속으로 들어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 한다. 영화에서 그가 퀴어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탐닉하고픈 대상에게 마음을 다할 뿐이다. 리는 바를 전전하며 끌리는 퀴어들을 찾아다니지만 꿈으로 표상되는 무의식 속에서 항상 지네와 마주한다. 지네는 그의 내면을 갉아먹고 심연 똬리를 틀고 앉아 지배하려 든다. 결국 지네는 유진 앨러튼으로 나타난다. 간절히 원하지만 잡히지 않는 욕정,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나는 것은 총과 뱀이다. 총은 리의 외면을, 뱀은 내면의 대변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체 퀴어에 집착하는 인간, 구아다니노는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본인을 발견한 지도 모르겠다.
한없는 투명에 가까워지려는 그들의 야헤를 찾아 떠난다. 텔레파시의 감도를 올린다고 알려진 그 식물을 통해 어떤 약으로도 이루지 못했던 자신을 보려 한다. 마침내 야헤를 찾아 복용한다. 야헤를 연구하던 박사는 말한다. “이걸 마시면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순 없어.” 야헤를 달여 마신 후 그들은 투명해져 하나가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나를 투영하는 네 속에 나를 사랑했음을, 영화의 마지막은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는 리를 보여준다. 자기 방어 기제였던 총으로 앨러턴을 쏘고, 무한대를 그려며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뱀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통해 돌고 돌아 자신으로 귀결되는 진실로부터 도망가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음악의 쓰임 역시 예사롭지 않다. 1950년대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너바나, 라디오 헤드, 시너도어 오코너 등의 현대적 노래를 과감하게 선택함으로 화면에 이질감을 준다. 시대와 판이하게 다른 음악의 배치를 통해 서사에 몰입하는 대신 파편화된 이미지가 주는 의미를 사색한다. 구아다니노는 버로스의 문장 컷업을 이미지와 사운드의 컷업으로 전환시켰다. 그 안에서 퀴어라는 다 달음은 오롯이 하나의 우주로 존재하는 자신이었다. 그러나 감정의 과잉으로 폭주하듯 널뛰는 몽타주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1950년대, 억압과 제약에 짓눌리던 청춘들은 자신들의 해방구를 찾았다. 비트세대는 그 대안의 정점처럼 보였다. 마약과 예술, 종잡을 수 없는 기행에 젊은 세대는 열광했지만 그들 역시 길을 잃고 이유 없는 반항을 하는 영혼들일뿐이었다. 본인들 원하던 원치 않던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들의 몸부림은 저항이 되었고, 수많은 이들의 삶에 이정표가 되었고, 예술가들의 모티프가 되었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를 해체하고 다시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내가 사랑한 것은 나인 너인가? 너를 원하는 나인가?
첫댓글 이 리뷰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 같네요.
버로스의 ‘컷업’ 기법과 구아다니노의 영상 문법이 이렇게 정교하게 맞물릴 수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나인 너인가, 너를 원하는 나인가”라는 마지막 문장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맴돌 것 같아요.
콜바넴을 좋아했던지라 퀴어도 상당히 기대를 하며 기다렸지만 시간이 허락될땐 영화는 저 먼곳으로 갔네요.
덕분에 그 감성 조금이라도 맛볼수 있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버로스의 것보다 구아다니노의 퀴어가 더 좋았고 그 리뷰가 더 좋네요 와우! 제 머리 속에 컷업된 감상을 님의 리뷰가 이어주십니다, 감상문도 창작물이다! 저도 곳곳에서 호퍼의 그림같은 장면을 느꼈습니다. 페니키안 스킴 만큼 오프닝도 감각적이고 come as you are가 나올 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책에선 인물들이 더 한심해보였는데 영화는 더 애정을 갖고 있다고 느낍니다. 시각 청각 다 만족스럽습니다.
킁킁...
마지막에 예술에 본질에 대해 묻는다..........라고 하시는거 보니 먹물영화냄새가..... 영화보다는 리뷰로 만족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나 답도 나. 감상물도 창작물이라는 위 선배님의 댓글에 동의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루카구아다니노영화를 님들만큼 좋아하지않아서...
저는 그냥그랫네요
리의 외로움도
유진의 신비컨셉도 딱히 공감가지않았고
연출도 밋밋했어요
아
3부는 너무 이질적이었어요 무드가 튀엇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