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의정부문학 전국문학공모전 운문부분 당선작]
대상
다시 그리는 자화상 / 유지호(인천광역시 계양구)
젊은 날의 발걸음엔 언제나 빈곤의 물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휴일이 없는 거리에서 주인 잃은 계절을 따라 콘크리트 벽에 무분별한 입맞춤을 하며 사랑을 심었다. 질소 가스의 풍선을 날리며 스물 네 시간을 셈했지만 내 몫은 없었다. 이 빠진 벌거숭이 잇몸으로 이륙의 날개를 접어야 했다.
때 이른 꽃이 만발한 명함은 인식의 지문을 하나씩 지워갔다. 이름 석 자 불릴 때마다 황금의 칼끝에 익숙한 허기진 위장은 밤마다 이름도 모르는 적들과 길고 긴 교전을 벌였다. 부풀어 오른 젊음의 이빨은 아침을 막아서는 검은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 채 시계불량의 더께를 입혔다.
이제 낙조로 가는 길에서 수십 년 동안 떼지 못한 계급장을 철책 너머로 날리고 내게 맞는 문신을 갈망한다. 곧게 펴야 할 굴곡같은 길과 풀어야 할 매듭이 물물처럼 몰려 온다. 어금니는 흔들리고 앓는 충치에 신념으로 땜질을 해 박으며 수없이 구원을 모색하는 길고 긴 밤의 사색이다. 내 몸에 버짐처럼 번진 이방인의 세포를 밤새 도려내는 아픔을 뚫고서야 정갈한 이빨이 새로 돋는다는 사실을.
밤새워 불 밝히면 가슴으로 어둠의 파편 하나, 둘 재로 쌓이고 문득 두 손 불끈 쥐어지는 예감. 좁은 길로 가라, 고뇌하는 자의 눈으로 내일을 열 것이로다. 찢기는 아픔의 덩어리가 튀어 오를 때마다 신명 들린 이름 석자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투명한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가 날갯짓을 한다.
장원
찬란 / 김기현(서울예술대 방송영상과)
나는 한 마리 길 고양이
어른이 되겠다고 한 겨울에 털갈이를 했지
유기된 별들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나는 고독한 눈을 얻었어
쓸쓸히 엉키는 나무들, 누가 기를까
지붕 위에 오래앉아 봄을 기다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차가운 손을 내놓고 있었지
누군가 건네주는 먹이를 의심 없이 먹어 버렸어
어린 시절은 길고 나는 고유하지 안항
가끔은 쥐덫에 걸려. 하늘이 얼룩져 잇어
눈물을 좀 흘려 볼까, 지난 밤 꿈이 탈색 되는 걸 보았어
나는 그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부서진 기왓장 사이로 떠다니는 구름 조각들을 씹어 먹어버렸어
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슬리퍼 안에 들어가 추운 잠을 자고
낯선 창가를 서성이다,
어느 집 창가에 핀 고요한 아침에
가만히 얼굴을 묻고 싶어
나는 나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쉽게 깊어지지 않을 거야
어둠을 둥글게 말고 앉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이 행복하다고
꼬리가 시리도록 중얼거릴래.
고등부 장원
주름 / 정하현(안양예술고 3학년 7반)
비행기가 지나가며 구겨놓은 비행운
뜨겁게 달궈진 저녁 해가 다려 놓는다
무늬처럼 새겨진 교복 치마의 주름살
온 종일 의자에 앉아있느라 생긴 주름을
어머니가 다림질로 펴신다
주름은 나의 하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분무기로 찬물 뿌린 옷에 다리미 얹으면
젖은 옷이 바싹 마르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김이 허옇게 새어 나온다
차게 젖었다가 뜨겁게 말라야 하는
극과 극의 온도 차를 번갈아가며
뜨겁게 달궈지는 얇은 옷자락 위 주름을
힘주어 꾹꾹 누르시는 어머니
어머니 배 위에 그인 붉은 칼자국도
펴질 수 없는 주름으로 남아있다
주름을 통해 태어났으니
나도 어머니의 끈질긴 주름이겠다
캄캄한 새벽마다 딸애의 교복을 다리느라
손바닥 위 붉게 데였던 화상 자국도 주름이 된다
어머니의 다림질 아래 빳빳하게 살아온 가족들
빨리 달아올랐다가 더디게 식느라
거실 한 구석에 놔둔 다리미의 등을 본다
뜨겁게 뎁혀진 열판을 스치기만 해도
벌겋게 붓고 물집 잡히던 손
나도 엄마의 몸에 무늬처럼 남은 주름을 펴드려 본다
다리미가 다려놓은 자리마다
주름이 오래 진통을 견뎠는지
비행운이 갈라놓은 초저녁 하늘에
물집처럼 낮달이 태어난다.
중등부 장원
노란 리본 / 김영웅(서울 장평중학교 3학년)
거짓말!
재밌게 놀고 온다 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선물 사 오겠다 약속했지만
가슴에 안겨준 것은
눈물의 바다
그리움!
수십 번 좌절하고
수천 수만 번 기도하지만
환한 전등불빛 아래
빈 식탁 의자
신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지만
신은 왜 두 팔 뻗지 않고
보고만 있었을까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세월호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노란 리본
<제16회 ‘의정부 문학’ 전국 공모전 심사평>
“현대시의 현대적 접근과 감동을 위하여” 김선용(시인)
만추(晩秋)입니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떨어지는 낙엽, 어제와 다른 일몰(日沒) · 일출(日出) 돌아보고 둘러보면 뭐 하나 시(詩)가 아닌게 있나요. 이번 ‘의정부 문학’ 전국 공모전 시(詩)부문에 응모한 작품편수는 중등부 53편, 고등부 94편, 일반부 197편이었습니다. 총344편을 4명의 심사위원이 돌아가며 보고 또 봤습니다. 양도 양이지만 수작을 대하는 설렘과 감동, 다양한 색깔, 농익음과 설익음 사이에서 선자(選者)들도 눈이, 얼굴이, 마음이 달아올랐습니다.
우선 일반부 응모작 197편 중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14편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유지호 씨의 ‘다시 그리는 자화상’이 각 심사위원 모두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며 이에 대상에 올리기로 합의했습니다. 총 4연으로 된 다소 산문시 양식을 띠고 있는데 깊고 넓고 공력(功力)이 느껴졌습니다. 오랫동안 시(詩)를 앓아온 흔적이 보였습니다. 이 시는 전통적 시의 기교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젊은날의 고뇌와 갈등과 아픔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노래하고 이야기합니다. ‘스물 네 시간을 셈했지만 내 몫은 없었다’, ‘황금의 칼 끝에 익숙한 허기진 위장’, ‘아침을 막아서는 검은 그림자’ 등의 상황과 표현에서 절박함과 안쓰러움도 느껴집니다. ‘신념으로 땜질을 해 박으며’, ‘내 몸에 버짐처럼 번진 이방인의 세포를 밤새 도려내는 아픔을 뚫고서야 정갈한 이빨이 새로 돋는다는 사실을’ 등에서는 삶과 한가닥 희망을 향해 발버둥치며 절규하는 소리와 몸짓에 귀를 모으고 시선을 두게 합니다. 다소 난해한 쪽으로 기우는 벌거숭이 현대시에 피가 돌게 하는 수작(秀作)임이 분명합니다. 장원으로 선정된 서울예술대 방송영상과에 재학중인 김기현의 ‘찬란’, 차상을 수상하게 된 황현아 씨의 ‘담쟁이’ 또한 손 놓을 수 없었고 가뿐 숨을 쉬며 읽어야했음을 고백하며 모두들 더욱 정진하여 한국 현대시사(現代詩史)에 한 획을 긋는 시인으로, 작품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고등부 총 응모작 94편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13편이었습니다.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정하현 학생의 ‘주름’을 장원으로 결정했습니다. 우선 보통의 10대답지 않은 눈과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 대견하하고 범상치 않았습니다. ‘차게 젖었다가 뜨겁게 말라야 하는’, ‘거실 한 구석에 놔둔 다리미의 등’, ‘다리미가 다려놓은 자리마다 / 주름이 오래 진통을 견뎠는지 / 비행운이 갈라놓은 초저녁 하늘에 / 물집처럼 낮달이 태어난다’ 등 응시(凝視)와 관조력(觀照力)이 탁월합니다. 소소한 일상을 객관적이고 담담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곱씹고 의미를 캐게하는 수작(秀作)입니다. 차상으로 뽑힌 이지성 학생의(경남 진주 명신고 1학년) ‘어머니는 빨래 중’과 차하로 선정된 김진아 학생의(전남 목포 목포혜인여자고등학교) ‘나물, 된장국’도 돋보이는 작품으로 시의 싹이 힘있고 빠르고 무한(無限)이 성장할 수 있는 탄탄한 작품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들 작품 모두 ‘빨래’와 ‘부모님(어머니)’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인데 사랑과 정(情)과 효(孝)의식이 메말라가는 이 시대,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시였습니다. 청소년문학의 희망으로 거듭나는 작품, 꾸준히 쓰기를 당부합니다.
중등부 총 응모작품 편수는 53편. 상대적으로 적은 편수입니다. 조금 씁쓸하고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컴퓨터, 스마트폰 등 온갖 감각적 매체에만 몰입하는 어린 중학생들 틈에 이슬 머금은 ‘새순’처럼 설익고 풋풋하지만 제법 시(詩)의 이름을 달고 이쁘게 올라온 친구들은 8명이었습니다. 장원으로 뽑힌 김영웅(서울 장평중 3학년) 학생의 ‘노란 리본’은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자신만의 시각과 현실을 냉철하게 보는 학생의 시각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차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남혜인(충북 충주 충주북여자중학교 2학년) 학생의 ‘틈’도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사는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형상화한 시로 그 감동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어떤 꽃이든 피울 수 있습니다. 다양한 색깔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심사위원 : 안태현 신성수 김생자 나윤희 김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