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는 자극으로 인해 폭주하고 소비자는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시대다. 장벽이 가로막은 건 국경만이 아니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는 하나의 벽을 이루고 진실이 아닌 조작된 사실을 필요에 따라 현실로 만든다. 그 결과 파시즘 같은 극단주의가 다시 득세하고 편협한 이야기들로 물든 세상에 반기를 든 이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다. 그가 손에 든 무기는 영화였다. 속력과 볼거리에 잠식된 영화판에 자연의 방식인 느리지만 점진적인 복원을 향한 혁명을 시작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미국 영화만의 게릴라전을 담고 있다. 그 무게감에 쉽게 일어나지 못했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최근 본 영화들에 시야를 좁히는 속도감과 극단적인 연출에 절여졌는지 느끼게 되었다. 서부개척시대부터 앞만 보고 달려온 미국은 많은 것을 짓밟으며 왔다. 도로를 질주하는 것이 마차에서 머슬카로 변하는 세월 동안 미국 사회도 현재에 이르렀다. 차별과 혐오는 잠시 가려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질주하던 편집과 운동성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을 잠시 틀어 우리에게 맞췄다. 치지직 거리던 주파수가 제자리를 찾는다. 라디오(영화)에서 다시 신호를 보낸다. 이를 감지한 혁명가들(관객)은 반응한다.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심각하게 회의를 하고 있다. 시기는 어림잡아 1990년대 이들은 급진 행동주의 집단 프렌치 75라 스스로를 표방하며 미국의 국사법과 이민법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집단이다. 그들의 행동은 퍼피디아의 질주로 함축된다. 전속력의 달리기와 총알 난사 그걸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에는 무장세력의 충동적인 파괴 욕구와 어떤 끝을 맞이할지 모르는 비장미가 녹아있다. 그와는 반대로 그저 퍼피디아에 반한 사제 폭판 전문가 게토 팻이 있다. 그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폭약을 터트릴 뿐 혁명 따윈 관심 없다. 정치적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사랑했지만 퍼피디아는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도주한 그녀를 잊은 채 16년을 살아간다.
밥 퍼거슨이란 새 이름을 쓰고 잠정적 종식을 선언한 혁명을 뒤로하고 딸을 키우며 무방비로 살지만 혁명 분자의 씨를 말리려는 스티븐 록조가 등장하고 딸의 보호와 혁명은 고사하고 핸드폰 충천을 못해 우왕좌왕할 정도로 무력하다. 그는 과거 조직의 도움을 필요로 해 연락을 취하나 암구호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그의 위기는 말만 하는 운동가들 세대를 자조하는 유머다. 실패한 아버지 세대는 폴 토마스 앤더슨 희극의 원동력이자 웃음의 연료다. 아버지 세대가 우스운 꼴로 망가진 역할만 하진 않는다. 그의 바통을 이어 사부라 불리는 세르지오 생카를로스가 있다. 그는 주도 면밀하게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탈출과 은신을 돕는다. 또한 호흡을 통해 안정을 찾는 방법도 알려준다. 오랫동안 생존한 혁명가는 위기 앞에서 초연하다. 그리고 마침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헌사를 보내는 시퀀스로 이어진다.
사부의 명에 따라 밥 퍼거슨의 도주를 돕는 청년들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달리며 옥상 난간을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밥은 그 아름다움을 쫓다가 추락한다. 스타일리시로 혁명을 추구하던 이들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상징한다. 새로운 세대에게 혁명은 실리다. 윌라가 차를 세웠을 때 대미가 장식된다. 추격은 끝나고, 근경과 원경의 가능성을 상하운동으로 변환시킨 순간 영화의 명제는 확실해진다. 혁명은 오르고 내리는 흐름을 가진다. 또 하나, 우리는 현실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려고 영화를 본다.
영화는 혁명을 시각화한다. 접사한 촬영과 인물, 거리의 배경을 압축한 화면이 눈앞에 있으면 공간 지각이 스크린 안에서 일어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속 인물들은 영화 속 공기에 끝없이 부딪히며 나아간다. (지하 요새에 백인우월주의자를 제외하고) 하물며 그들을(집단을) 숭상하는 스티븐 조차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서 면접을 마치고 나올 때, 반듯한 일직선 복도를 군인다운 걸음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억압된 페티시, 조각난 욕망 사이에서 스티븐은 마침내 클럽의 일원이 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 카메라는 그의 눈물을 역동적으로 잡아낸다. 성취에 대한 것일지 아님 육체가 반응하는 연민일까.
원주민 청부업자의 연민은 윌라를 살리고 쫓고 쫓기는 추격은 서로의 목적을 이루고 끝이 났다. 세계는 또 일부의 죽음과 누군가의 방관으로 조용히 굴러간다. 윌라는 밥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준다. 밥이 어린 윌라에게 트러스트 디바이스의 사용법을 가르치던 것이 역전된 것이다. 계주에서 중요한 건 다리는 주자가 바통을 받을 다음 주자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무의식 안에 깃들었다고 폴 토마스 앤더슨은 말한다. 프렌치 75가 파괴하려던 것은 빌딩처럼 솟은 남성성과 도로처럼 번지는 지배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저항이 무조건 옳다 고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먼 훗날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 “그린 에이커스, 베버리 힐빌리스, 후터빌 정션“이 말하는 응답은 이제 구 시대의 산물이 되었지만 넌 너의 길을 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새로운 주파수를 찾고 여전히 혁명의 몸짓을 포기하지 않는 윌라에게서 희망을 본다. 스펙터클은 끝났지만 이 정박지는 조용한 출항지가 될 것이다. 기지개를 켤 시간이다.
첫댓글 아ㅆ ㅏ 1등
간만에 본 영화에 대한 리뷰를 읽으니 느낌이 다르네요 ㅎㅎ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근경과 원경의 가능성을 상하 운동으로 변환시킨다는 평이 멋집니다. 혁명이 오르고 내리는 모습이었군요. 영상이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좋은 영화죠^^ 혁명을 이끄는 사람들의 한계점과 희망을 재미있게 잘 표현한 것이 좋았던 것 같아요.
제 기준 올해 최고의 영화네요. 산 넘어 산!
리뷰 감사합니다!!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전 이 영화보면서 트럼프 생각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