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분열과 북 이스라엘, 남 유다 역대 왕
사울, 다윗, 솔로몬이 40년씩 통치함으로 120년간 유지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양분된다. 성경은 솔로몬의 통치를 평화, 명성, 번영의 광대한 황금 제국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그가 죽은 지 불과 몇 주 만에 잿더미로 변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다수, 곧 북방 지파들은, 솔로몬의 무능한 아들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들고, 솔로몬의 부하였던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다. 그들은 그들의 왕국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 성경은 종종 그 이름을 부족 중 하나의 이름을 따서 에브라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앗수르와 다른 기록에서는 수도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쪽에서는 유다 왕국이 아들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아 그 대를 이어간다. 남쪽 유다 왕국은 전통적으로 단지 두 부족, 베냐민과 유다로 구성된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크고 작은 이방의 침입을 받았지만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
북 이스라엘 왕국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BC 8세기. 유프라테스강 넘기를 번번이 실패했던 앗수르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 지는 시기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참혹했다.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암살이 이어졌고 10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이 교체되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가 침공하자 조공을 바쳐 왕좌를 지켰다. 요세푸스는 “므나헴은 앗수르군과 싸워서 이득이 될 것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은 천 달란트를 주어 전쟁을 종식시켰다. 므나헴은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각 사람당 인두세를 50드라크마씩 내도록 강요했다”고 기록했다.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부하 베가에 의해 암살당한다.
왕위에 오는 베가는 반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베가의 반역이 친앗수르 정책에 대한 반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 수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블레셋과 에돔도 동맹군에 합세했다. 동맹군은 남유다도 함께 하길 원했지만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동맹군의 칼은 유다를 먼저 겨눴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다.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지만, 생각만큼 빠르게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람과 다메섹은 성 인근의 도시와 수비대 정도만 무력화시킨 후 북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을 꺾을 기회라고 생각해 남아있는 북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지만 대패하고 만다.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왕하 16:7,8). 디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길로 수리아를 공격해 초토화 시킨 다음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또한 다메섹 백성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앗수르 인들을 이주시켰다(왕하 16:9).
이 와중에 북쪽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호세아는 자신의 친구 베가를 살해하고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에 오르게 된다. 호세아는 티글랏빌레셀 3세가 죽고 살만에셀 5세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 결국 호세아의 잘못된 판단은 역사가 그를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하게 만들었다. 살만에셀 5세가 공격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성에서 약 3년을 버텼지만, 결국 함락 당했다. 사마리아를 함락한 살만에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았다.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사는 지역으로 변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거주하게 만들었다(왕하 17:24).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민족과 합쳐진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의 탄생이었다. 남 유다 왕국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의 급부상
앗수르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앗수르는 속국들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앗수르와 일대일로 맞설 나라는 없었지만,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로 힘을 합칠 나라들은 있었다. 앗수르의 몰락은 사르곤 2세, 산헤립, 에살핫돈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 때에 본격화된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이 슘 우킨은 앗수르의 속국인 바벨론의 지도자였다. 샤마이 슘 우킨은 리디아, 시리아, 애굽 등과 연합전선을 펼쳐 앗수르를 압박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샤아미 슘 우킨은 사망했지만 앗수르는 많은 힘을 소진했다. 이 와중에 아슈르바니팔 사망 후 아들 신 사르 이스쿤과 반란자 아슈르 에틸 일라니 사이에 일어난 수 년 간의 왕위 다툼은 앗수르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바벨론은 다시 기회를 잡았다. 신바벨론의 창건자라 불리는 나보폴라살은 B.C. 612년 니느웨를 공격해 3개월 만에 점령했다. 앗수르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앗수르 병력이 하란으로 도망가 항전을 펼쳤지만, 바벨론은 가볍게 그들을 제압했다. 어떤 열방의 신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 소리 치던(사 36:18∼20) 앗수르의 교만은 그렇게 꺾였다.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
BC 609년, 애굽의 왕 느고 2세는 갈그미스에서 최후의 항쟁을 펼치는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바벨론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남유다의 16번째 왕 요시야가 애굽의 원정길을 막아섰다. 요시야는 애굽의 출정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애굽은 서둘러 갈그미스로 향해 앗수르와 합류했으나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느고 2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며 요사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데려갔고,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들의 계보
BC 605년, 느고는 다시 한 번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번에도 승자는 나보폴라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가며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게 된다. 유다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거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거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유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18대왕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BC 601년, 바벨론은 애굽과 다시 한 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애굽과 바벨론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때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 이었던 모압, 암몬, 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37년 만에 풀려나 죽을 때까지 좋은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왕하25:27∼30).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역대 왕 비교표
유다에 남은 자들 바벨론은 유대 땅에 일부 백성들을 남겨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반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벨론은 남은 자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임명했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렘 26:24).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서의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동행하길 권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고 황폐한 유대 땅에 남았다. 바벨론의 군대가 철수하자 바벨론을 피해있던 무리들이 다시 돌아오는데 그중 요세푸스가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표현한 이스마엘이 그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백성은 대부분 애굽으로 피신하게 된다(왕하 25:25∼26). 이제 유다 땅은 텅 비어버렸다. 한편,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부 유다 백성은 약 5년 뒤에 애굽으로 쳐들어온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