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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아, 고난주간을 살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보혈을 흘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항상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야 하고,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살기를 힘써야 마땅하지만 -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 이런 특별한 시기에는 더욱 자신을 살피며 보답과 헌신을 다짐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 생각해 보기를 원하여 너에게 글을 쓰고자 한다.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이어서 많은 교회에서 부활절 칸타타를 준비하고, 특별찬송을 연습하며, 삶은 계란을 준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번 주에는 교회에서 전하는 말씀이나 부르는 찬송이 주로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비슷하다고 한다. 우리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당연하고 당연하다.
조심스럽게 살필 일은 십자가나 예수님의 죽음에 마음이 너무 기울여진 후에 부활에 대해서는 가볍게 생각하거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능력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배우고 깨닫는 일이 없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오늘은 우리가 그런 위험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하니 잘 들어보거라.
1. 십자가의 죽음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을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전혀 다른 분이니 이 세상에 태어나실 것도 수없이 예언되었고, 죽으실 것도 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실 것도 예언되신 분이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직접 죽으심과 부활을 예언하셨다. 몇 군데만 보기로 하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태 16:21)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 17:22-2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것을 굳게 믿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앞부분의 고난받는 예언만 주목하고 마지막에 나오는 부활에 대한 예언은 지나치는 사람이 많다.
2. 살아난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않아야 한다.
은성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여러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무덤을 찾아갔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막은 돌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있었고, 부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믿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천사가 말하기를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고 하였다.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채 누워있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이미 살아나셨는데도 여인들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채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것이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 아닌데 제자들이 환상을 보았거나 집단 미신에 빠져서 부활을 믿고 전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역사적 사실은 제자들이나 여인들도 역시 부활을 쉽게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19-27) 그리고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3-39)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과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한 자들이 “마음에 더디 믿고”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꾸중하셨다. 심지어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을 듣는 시간에도 제자들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6-17)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 20:9) 이것의 구체적인 사례가 도마의 반응이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그때나 지금이나 부활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혹시 오늘날도 십자가만 생각하고, 보혈만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고 탄식을 하되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까?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분명히 오신 메시아를 거부하고 자기 나름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메시아가 왔다는 것은 믿되, 나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까지는 믿되, 그가 부활했다는 것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미 성전의 제사 제도를 다 완성하고 이제는 성전도, 제사도 끝났건만 여전히 ‘성전’을 즐겨 이야기하고, ‘제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히브리서를 다시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바르게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3. 우리의 삶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부활 생명이 놀랍게 역사하고 있음을 믿고 체험해야 한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은혜를 즐겨 말하는 신자들의 믿음은 귀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 중에는 안타깝게도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부활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만 믿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미래의 어느날에 믿는 자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것만 믿고 있다. 그것은 꼭 믿어야 할 중요한 신앙고백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현재 믿는 자들에게 큰 은혜와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믿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라고 말한다. 그는 많은 핍박을 받고 있던 성도들 즉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라고 시작한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언급하지만 바로 이어서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있고 나서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고(행 2:14-36),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 명이나 되었고, 그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삶으로 바뀌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그렇다. 부활은 바로 지금 여기서 그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믿는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도 그 기도를 드려야 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18-23)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이 믿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달라질까를 생각해 보자.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온 우주와 영적 세계까지 다스리시고 교회를 충만하게 하시는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져서 이 놀라운 부활의 주님을 바르게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해야 한다. 먼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부터,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이 부활이 가져온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증거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보여 준 그들의 삶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