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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성찬식은 기쁨의 의식이 되었으니 감사하리라
1. 은성아, 부활절을 맞아서 기쁘게 예배하며 찬송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감격스럽지? 더구나 많은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성찬식을 갖고 구속의 은혜와 연합의 은혜 그리고 친교의 은혜를 만끽하는 것이 너무나 기쁜 일이지?
그런데 가끔 성찬식이 어둡고 우울하고 심지어 누군가의 표현처럼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많아서 그것이 한편으로는 경건한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의 성찬과는 다른 모습이 아닐까 궁금해 왔는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과연 성찬은 기쁨의 식사요, 성찬식은 축제의 연회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찬에 관한 가르침은 많고 많은데 오늘은 “기쁨의 성찬식”이라는 주제에 주목하여 살펴보고 정리해 보려고 한다. 성경과 인터넷에 있는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2. 성찬을 생각하면 마태복음 26장 17-30절, 마가복음 14장 12-26절, 누가복음 22장 7-23절 그리고 요한복음 13장 21-30절 및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에서 그 시작과 계속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서의 기록에서는 유월절에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이제까지 떡과 포도주를 마시던 의식을 완전히 바꿔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새로운 의식을 시작하심을 보게 된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만 그 떡과 포도주에는 놀라운 의미가 담긴 생명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가르쳐주신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3-57)
3. 우리는 이 유월절 식사가 무거움이 아니라 기쁨의 식사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을 시키기 위해서 애굽에 아홉 가지 재앙을 내리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 양의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도록 명령하셨고, 바로 그 밤에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었으니 왕인 바로의 장자가 죽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짐승의 첫 새끼까지도 죽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가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있으면 죽음의 천사가 넘어(유월)갔다. 견디다 못한 애굽 사람들이 다 죽게 생겼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라고 아우성을 치는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금패물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구하는 것을 모두 허락받고 400년 또는 430년간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애굽을 빠져 나왔다. 이때의 분위기는 아마 우리나라가 1945년에 드디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의 기쁨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고 즐거워하던 것과 비슷하게 감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월절이 절대로 슬픔의 의식이었을 수 없는데 우리가 성찬식을 슬프고 우울하고, 무겁고, 초상집 같은 분위기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어느 교회에서는 여자 교인들이 흰옷을 입고 참여하는데 그들의 얼굴이 심각하고 어두워서 어쩐지 장례식에 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박수를 보내기가 어렵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① 감사기도를 드린 후 포도주 잔을 돌렸다.(이때 참석자들이 손을 씻기도 한다)
② 쓴 나물을 하로셋이라는 과일 등으로 만든 소스에 찍어 먹었다.
③ 두 번째 잔을 돌리고 난 이후 지도자가 유월절의 내력을 설명하거나 질문에 답해 주었다.
④ ‘할렐’이라는 시편 113과 114편을 노래했다.
⑤ 양고기와 누룩 없는 떡을 먹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만찬이라고 했다.
⑥ 세 번째 잔과 네 번째 잔을 마셨다.
이렇게 4번 포도주를 마신 것은 출애굽기 6장 6-7절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는 말씀을 기억해서 4잔의 포도주를 마셨던 것이다.
⑦ 그리고 할렐 후반부 시 115편과 118편을 부르면서 마쳤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런 순서를 살펴보면 유월절의 분위기는 결코 어두운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순서를 갖고 있으며,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번의 유월절은 슬프고 어두운 요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 기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릴 것이라고 예고하셨고(마 26:1-2),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다 꾸며 놓고 있었으며(마 26:3-5),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하고 선생님과 동료들을 배신하는 일을 작정했다(마 26:14-15). 그 만찬 자리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우고 있었고, 죽음과 이별의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기쁨의 요소를 모두 무너뜨리는 것은 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고 계시는 이 만찬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는 고린도전서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에 죽음만 아니라 다시 사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예수님까지 포함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오실 때까지’ 성찬을 계속 시행한다는 것은 죽으심만 기억하며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것까지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참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성찬 예식문에서는 “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만찬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상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요로운 기쁨을 미리 맛보며, 또한 우리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소망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함께 기뻐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립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4. 은성아, 이런 나의 생각은 별난 것이 아니니 이미 좋은 선생님들이 가르치고 책을 쓰셨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시는 이성호 교수님은 “교회를 교회되게, 증인을 증인되게 하는 본질인 성찬을 회복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성찬, 배부름과 기쁨의 식사』라는 성찬에 대한 책을 썼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동감이 된다.
‘한국 개신교회의 성찬식은 종종 슬픔과 무거움의 분위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찬은 예수님의 부활과 삶의 풍요로움을 기리는 특별한 순간일 뿐만 아니라, 그 기쁨이 우리의 일상에 뿌리내릴 수 있는 찬란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성찬에 대한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이해를 돌아보고, 새롭게 성찬의 기쁨을 발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의 성찬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리며, 새로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다. 이 책을 통해 성찬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 성찬의 기쁨이 당신의 일상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줄 것이다. 함께 읽어나가며 성찬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시길 소망한다.’
그리고 1976년에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로 임직되어 목회를 하다가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980-89년까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셨고, 1990년부터는 하밀톤에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의 신학대학에서 교의학을 가르치셨던 고재수(Nicolaas H. Goot jes; 1947-2023. 8. 20.) 교수님의 『세례와 성찬』이라는 책에서 다음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성찬을 통해 슬픔을 기쁨화 시키시는 하나님의 축제에 참
여하게 된다.
주님의 만찬이라 부르는 성찬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는 선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축제의 장인 만찬을 주심을 알게 된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음식과 같이 그분은 자기의 죽음이 거기에 참여하는 자에게 유익할 것임을 의미하고(pp. 71:10-13),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죄 사함을 얻는 것을 의미할 때(pp. 72 : 7) 우리는 하나님의 축제에 나만이 먹는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공동의 음식이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축제에 참여하게 되어 서로 기쁨을 나누게 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궁극적 목적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대한 가르침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의 내용도 도움이 된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74문. 성찬을 시행할 때 성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성찬을 시행할 때 성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극히 거룩한 경외심과 주의함으로 규례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레 10:3; 히 12:28; 시 5:7; 고전 11:17, 26-27) 성례의 요소들과 행위들을 애써서 자세히 살펴보고(출 24:8; 마 26:28) 주의 몸을 주의 깊게 분별하고(고전 11:29) 주의 죽으심과 고난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묵상하고(눅 22:19) 그렇게 자신들을 각성시켜서 그들이 받은 은혜들이 힘차게 활동하게끔 하고(고전 11:26; 10:3-5; 11,14) 자기 자신을 살피고(고전 11:31) 죄를 크게 슬퍼하고(슥 12:10)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 주리고 목말라하며(계 22:17)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먹고(요 6:35) 그분의 충만함을 받으며(요 1:16) 그분의 공로를 신뢰하고(빌 3:9) 그분의 사랑을 크게 기뻐하고(시 63:4-5; 대하 30:21)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시 22:26) 하나님과의 언약과(렘 50:5; 시 50:5)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행 2:42).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자세와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기뻐하며 감사하는 자세를 보면 성찬의 분위기가 경건하면서도 즐거운 것이었음을 보게 된다.
5. 은성아, 우리가 성찬식을 어둡고 슬픈 의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겁게 기억하고, 부활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성찬식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의 글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장로개혁교단의 조직신학에서도 부활보다 십자가의 죽음에 주목하니 프린스턴의 찰스 하지(Charles Hodge)는 십자가에 127쪽을 할애하고 부활에는 4쪽을 할애하여 다루었다고 하고, 다른 신학서적들도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샘 올베리(Sam Allberry)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믿고 부활절마다 그 믿음을 고백하지만, “남은 한 해 동안 사실상 그것을 도로 서랍에 처박아 둔다”면서 이는 “부활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예수는 …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같은 구절들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도 우리를 구원한다. 그런데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제시하다가 구원받는 법을 설명할 때면, 온통 십자가 이야기만 하고 부활은 곁다리로 덧붙이거나 아예 생략해 버린다.
팀 켈러, 『부활을 입다』, 윤종석 옮김. 25-26.에서 정리함.
우리는 평소에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고난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을 주신 것과 새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것, 그리고 장차 부활하여 신령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십자가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만큼 주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을 생각하면서 기쁨과 감사와 찬송의 성찬식을 갖기를 소원한다. 아울러 이런 소중한 성찬식을 칼빈 선생님이 소원했던 것처럼 되도록 자주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