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는 귀환의 신화를 기억의 서사로 바꾼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건너 이타카로 돌아가는 인간이라면,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흩어진 시간 속에서 자신을 복원하는 인간이다. 놀란의 영화는 늘 기억과 시간의 관계를 바라본다. 『메멘토』에서 기억은 정체성을 만드는 마지막 단서였고, 『인셉션』에서는 기억과 꿈의 경계가 현실을 흔들었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시간이 사랑과 상실을 연결하는 힘이 된다. 『오디세이』는 그 관심을 신화의 세계로 확장한다. 귀환은 장소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사라진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이다.
서사는 사건의 순서보다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따른다. 트로이 전쟁의 상처, 바다 위에서 겪은 모험, 죽은 자의 목소리,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이 교차한다. 과거는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을 구성하는 조각이다. 『오뒷세이아』의 모험은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퀴클롭스는 이름과 정체성의 문제다. 키르케는 인간과 욕망의 경계다. 저승은 죽은 자의 기억과 마주하는 공간이다. 태양신의 소는 인간의 오만과 책임을 드러낸다. 오디세우스는 시련을 통과하며 변한다. 중요한 것은 모험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변화하는 시간이다.
놀란은 그 시간을 이미지로 압축하고 장면은 빠르게 연결된다. 인간의 변화는 편집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억은 재구성할 수 있지만, 시간을 통과하며 변화하는 인간까지 재구성할 수는 없다. 호메로스의 신은 인간의 심리가 아니다. 저 너머에 존재하는 거대한 질서다. 아테나는 지혜와 전략의 힘이다. 포세이돈은 자연과 복수의 힘이다. 오디세우스는 신을 넘어서는 영웅이 아니다. 거대한 질서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감당하는 인간이다. 귀환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아니다. 제우스의 법도를 넘어선 인간이 다시 그 질서와 마주하는 과정이다. 태양신의 소를 탐한 동료들의 죽음은 신의 법도를 거스른 대가다. 구혼자들의 최후는 환대와 정의를 무너뜨린 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이다. 『오뒷세이아』의 귀환은 한 인간의 성공담이 아니다. 무너진 세계의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놀란은 이 질서를 인간의 내면으로 옮긴다. 아테나는 오디세우스 안에 남은 지혜가 된다. 포세이돈은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의 형상이 된다. 키르케와 칼립소는 욕망과 상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신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존재에서 인간 내면의 힘으로 변한다. 페넬로페는 기다림의 상징이 아니다. 부재의 시간을 견디는 사람이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인물들은 신화적 운명보다 상처를 가진 인간으로 다가온다.
안티노오스와 시논은 부재한 왕의 시간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안티노오스는 사라진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시논은 이름 없는 자가 이야기를 통해 존재를 얻는 순간을 보여준다. 오디세우스는 이름을 숨겨 살아남았다. 시논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살아남는다. 둘은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지킨다. 시논의 이야기를 통해 오디세우스는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한다. 아가멤논은 전쟁의 영광을 가진 채 돌아왔지만 자신의 이름과 권력에 사로잡혀 몰락했다. 오디세우스는 이름을 내려놓고 돌아온다. 그는 영웅의 명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인간으로부터 다시 시작한다. 귀환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묻는 과정이다.
상징은 종종 이미지로 대체된다. 퀴클롭스의 외눈은 괴물의 특징이 아니다. 하나의 시선만 가진 세계다. 타자를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다. 폴리페모스는 환대가 사라진 질서를 드러낸다. 놀란은 거대한 형상과 규모를 앞세운다. 스펙터클은 압도적이다. 프레임이 넓어질수록 신화가 던진 질문은 작아진다.
라이스트뤼고네스인 역시 같은 변화를 겪는다. 원전에서 그들은 식인종이 아니다. 타자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계다. 영화는 그들을 철갑을 두른 전사로 바꾼다. 자연의 공포는 전쟁이 만든 괴물이 된다.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신화의 의미는 희미해진다.
『오뒷세이아』의 모험은 이동의 기록이 아니다. 길 위에서 인간은 시험받는다. 괴물은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통과의례다. 떠남은 귀환을 위한 과정이다. 귀환은 도착이 아니라 변화한 인간이 돌아오는 순간이다.
놀란은 이 구조를 서부극의 문법으로 옮긴다. 오디세우스는 왕보다 방랑자에 가깝다. 집으로 돌아가는 인간보다 상처를 품고 떠도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길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호메로스에게 바다는 넘어야 할 시련이다. 이타카는 질서가 회복되는 자리다. 놀란에게 바다는 끝나지 않는 질문이다. 마지막 항해는 귀환의 완성이 아니다. 다시 떠나는 인간의 선택이다. 두 오디세우스는 서로 다른 곳으로 돌아온다. 한쪽은 세계 속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고 그 반대로는 기억 속 자신의 존재를 복원한다. 왕으로 귀환하고 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친다.
놀란의 『오디세이』는 기억과 정체성, 상실을 탐구한다. 인간은 기억으로 자신을 이해한다. 변화시키는 것은 시간이다. 한 오디세우스는 세계 속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고 다른 오디세우스는 기억 속 자신의 존재를 복원한다. 놀란은 신화를 기억으로 변모시켰다. 귀환을 완성하는 시간까지 편집하지는 못했다.
신화는 남았다. 귀환의 시간은 사라졌다.
첫댓글 너무해 글을 너무 잘쓰잖아
무너진 세계의 균형을 회복한다가 특히 와닿습니다. 그게 주제가 아닐까 해요. 해체의 극단에서 재구성을 거치면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길을 찾는 데, 오디세이도 놀란도 시간의 측면에서 그런 것 같아요. (테넷에서 극단적으로 시간을 해체했다가 여기서 확실한 회귀를 보이는... ) 훈종피디가 그토록 사랑하는 메타 영화적 요소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아내 사랑의 테마는 있다는 게 재밌었습니다.
다시 떠나는 이유에 대해선 영국의 테니슨이 쓴 율리시즈라는 시가 있어요. 이 영화랑 잘 맞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구절을 공유해봅니다. I'll drink life to the lees. 안주하지 않겠다 삶을 바닥에 남은 찌꺼기까지 다 마셔버리겠다. 계관시인은 진취적 인물로 그린 인물인데 영국인 놀란은 그가 자신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 한 작전을 일종의 업보로 받아들이는 인물로 그린 것이 좋습니다. 전쟁은 대체로 모두 업보를 쌓는 시간이죠. 잊을 수 있다면 잊고(특히나 샤를리즈 테론이 있다면 쌉가능) 싶을 만큼 괴로운.
근데 오디세이 여복 장난 아님.
그리고 음 영화가 너무 길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