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세션》의 공포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베어는 니키를 오래 좋아했지만 고백하지 못한다. 거절이 두렵고 관계가 달라질까 두렵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 두려움을 고백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준다. 베어는 웨이트리스에게 고백을 연습하고, 이안은 코치가 된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 통과하기보다 타인에게 맡긴다. 감정의 위탁이다.
베어는 현실을 견디지 못한다. 니키의 마음을 확인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 한다. 사랑에는 상대의 의지와 거절, 기다림이 필요하다. 소원에는 그것이 없다. 원 위시 윌로우는 베어가 현실을 건너뛰기 위해 선택한 장치다. 그가 원한 것은 니키의 마음이라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니키에 가깝다. 사랑을 얻는 대신 사랑받는 상태를 얻으려 한다.
원 위시 윌로우의 오래된 외형은 흥미롭다. 나무에 소원을 비는 방식은 오래됐다. 소원을 맡기고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소원과 현실 사이에는 시간과 불확실성이 놓인다. SNS는 반대다. 욕망을 이미지와 문장으로 만들고 즉시 세계에 내놓는다. 원하는 사람, 원하는 관계, 원하는 나를 먼저 선언한다. 원 위시 윌로우는 두 시대를 겹친다. 오래된 나무에 걸린 소원이 타인의 마음을 바꾸는 명령이 된다. 기다림과 불확실성이 사라진다.
그 점에서 원 위시 윌로우는 AI의 생성 논리를 연상시킨다. SNS가 욕망을 이미지와 문장으로 만들고, AI가 그 이미지를 생성한다면 원 위시 윌로우는 욕망에 맞춰 사람과 현실까지 바꾼다. 베어는 실제의 니키를 알아가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니키를 만들어낸다. 타인은 이해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생성할 결과가 된다.
원 위시 윌로우가 사랑을 이루는 방식은 더 기괴하다. 영화는 장난감의 정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소원이 이루어진 뒤 니키의 본래 자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갇힌 듯한 상태가 된다. 샌디와 니키를 연결해 읽으면 원 위시 윌로우는 사랑을 새로 만드는 장치라기보다 죽은 사랑을 다른 몸에 옮겨놓는 장치처럼 보인다. 영화가 명시하지 않는 해석이다. 니키의 변화와 샌디의 죽음이 하나의 이미지로 겹친다.
거울은 그 반대편에 있다. 거울은 현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을 비춘다. 베어에게 필요한 것은 원 위시 윌로우가 아니라 거울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니키가 아니라 실제의 니키를 바라보는 일. 베어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백은 시뮬레이션으로, 사랑은 소원으로 대체된다. 이미지가 현실을 대신한다.
거울 뒤의 약통은 현실의 뒷면처럼 놓인다. 거울 앞에는 보이는 얼굴이 있고, 뒤에는 감춰진 몸과 죽음이 있다. 샌디의 죽음과 베어의 마지막 선택이 같은 약으로 연결되면서 약통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잇는다. 현실을 바꾸려 했던 베어는 마지막에 현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는다. 시작과 끝에서 그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피한다.
샌디는 고양이다. 니키가 카펫에 소변을 지리는 장면은 영역 표시를 연상시킨다. 샌디의 시신을 요리해 건네는 행위는 고양이의 동물적 행동을 인간의 관계 안으로 뒤틀어 가져온다. 사랑은 관계에서 점유로 변한다. 세라의 살해와 시신을 집 안에 전시하는 행위는 그 점유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니키를 작가 지망생으로 설정한 것도 소유의 문제와 맞물린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는 사람이다. 베어는 그 이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로 고쳐 쓴다. 한 사람은 자기 서사를 만들려 하고, 다른 사람은 타인의 서사를 자기 욕망에 맞게 바꾼다. 샌디를 니키의 또 다른 자아로 본다면 베어가 붙잡으려는 니키는 하나의 니키일 뿐이다.
니키에게는 글쓰기가 있고 세라에게는 미술학교가 있다. 네 사람이 일하는 레코드 가게는 자신의 삶에 도착하기 전 잠시 머무는 장소다. 그들에게는 기다려야 할 시간이 있다. 베어만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과정 대신 결과를 원한다.
영화의 형식은 이 욕망을 체감하게 한다. 안정적인 헤드룸은 인물과 프레임 사이에 공간을 남겨 관객을 안심시킨다. 화면은 넓고 안정되어 있다. 그 안에 음영이 들어온다. 얼굴과 공간의 일부를 어둠에 남겨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든다. 헤드룸이 안전한 공간이라는 감각을 준다면 음영은 그 공간에 균열을 낸다. 안정감과 긴장감이 같은 프레임 안에서 작동한다. 긴 테이크는 그 상태를 지속한다. 프레임은 흔들리지 않는데 관계는 무너진다.
커리 바커의 유튜브와 스케치 코미디 경험에서 비롯된 어긋난 리듬과 블랙코미디는 전통적인 호러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로맨틱 코미디처럼 시작한 영화는 관계의 불안을 호러로 전환한다. 장르적 감각과 동시대적 소재를 결합하는 솜씨는 분명하다.
영화는 발견한 문제를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한다. 가장 큰 약점은 니키다. 베어의 욕망이 니키의 자율성을 파괴한다는 사실은 선명하다. 정작 니키 자신의 내면은 충분히 열리지 않는다. 니키는 베어의 욕망을 비추는 대상으로 머무는 순간이 많다. 영화가 비판하는 대상화의 방식을 영화 자신도 부분적으로 반복한다.
《옵세션》은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순간을 따라간다. 감정을 타인에게 위탁하고, 욕망을 이미지로 만들고, 이미지를 현실로 바꾸려 한다. 오래된 버드나무에 걸린 소원은 SNS의 욕망과 만나 현실을 대체한다. 거울은 그 반대편에서 현실을 비춘다. 샌디와 니키의 몸, 약통과 시신은 타인을 원하는 이미지로 바꾸려 할 때 무엇이 지워지는지를 보여준다.
집착은 사랑의 강도가 아니다. 상대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다. 베어는 니키를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 니키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그 순간 사랑은 관계를 떠나 소유가 된다.
영화는 젠지의 욕망을 잘 보여주지만,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다. 동시대를 포착하는 감각은 선명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깊이는 그만큼 따라오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