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산책을 한다. 박수를 치고, 인사를 나눈다.
“좋은데 가시나 봐요.”
평범한 인사말 뒤에 장례식장이 나온다. 일터에서 해고된 노동자의 죽음이다. 영화는 이 짧은 전환으로 일상의 풍경과 한 사람의 죽음을 한 화면 안에 놓는다. 박수와 애도, 산책과 문상. 서로 다른 두 장면이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진다.
그 리듬은 공장으로 옮겨간다. 기계가 반복되고 사람의 몸이 그 반복을 따라간다. 공권력의 호루라기가 울리고 사람들이 움직인다. 철이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어른들의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몸에서는 틱이 반복된다. 집단에는 리듬이 있고 철이의 몸에는 틱이 있다. 박수와 기계음, 호루라기와 틱. 영화는 노동과 통제를 설명하기보다 반복되는 소리를 통해 그것이 몸에 남는 방식을 보여준다.
상우의 아버지가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사용하던 호루라기를 철이가 가져가는 장면도 그렇다. 호루라기는 타인의 몸을 움직이는 소리다. 밖에서 몸을 움직이는 명령과 안에서 의지와 무관하게 반복되는 틱이 한 아이의 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다. 물은 또 다른 도구다. 미옥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손으로 자동차를 닦는다. 미옥은 물을 가지고 놀고 싶지만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철이는 빌라 관리인의 호스로 물을 뿌린다. 닦는 데 쓰이던 물이 잠시 놀이가 된다.
같은 아이의 몸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호석은 철이의 신발끈을 묶어주지 못한다. 상우는 몸을 낮춰 그것을 묶어준다. 호석은 태권도로 철이의 몸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상우는 그 몸과 논다. 한 사람에게 돌봄은 생계를 이어가는 시간에 묶여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된다. 영화 후반 미옥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몸의 위치도 달라진다. 반복해서 일하던 몸이 스스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몸이 된다. 생존을 위해 되풀이하던 움직임이 자신의 의지로 방향을 갖는다. 그 조건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카타르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예지와 상우의 대화는 이 관계를 넓힌다. 노동자의 노동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자본이 삶을 옥죄는 방식 역시 잘 보이지 않는다. 상우는 노골적인 악인이 아니다. 부드럽고 친절하다. 그 친절함 속에서도 자신의 사업은 계속 확장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자본의 얼굴은 폭력적인 명령보다 사람 좋은 표정에 가깝다.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그 차이는 더 선명해진다. 미옥에게 바다는 자유의 공간이고 상우에게는 놀이의 공간이다. 둘은 같은 바다에 들어가지만 같은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두 사람이 함께 설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지우지 않는다. 바다는 계급의 경계를 없애지 않은 채 두 사람을 잠시 같은 물속에 놓는다.
호석에게 사랑은 쟁취하기 위한 인내에 가깝다. 기다리고 견디고 버티는 시간이다. 상우에게 사랑은 베푸는 여유를 닮았다. 그 여유 역시 그가 가진 시간과 자원에서 나온다. 한 사람에게 사랑이 노동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은 여유의 형식을 취한다. 같은 사랑이라는 말 아래 놓인 시간이 다르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는 예지는 극영화를 찍고 싶어 한다. 다큐멘터리는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으로 가기 위한 초석이다. 유학 시절의 경험과 카타르에서 마주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태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연민하는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 있다. 미옥의 일을 촬영하던 예지가 “그림이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 욕망이 드러난다. 미옥에게 하루의 일은 삶이지만 예지에게는 아직 영화가 되지 않은 현실이다. 반복되는 평범함을 견디지 못하는 카메라는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동시에 그것을 영화적 재료로 판단한다. 예지의 문제는 타인을 연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연민하는 자신을 믿는 데 있다.
그 욕망의 반대편에 영화는 창과 CCTV를 놓는다. 창 너머의 얼굴은 보이지만 닿을 수 없고, 목소리는 건너오지만 말은 온전히 도착하지 않는다. 핸드헬드의 미세한 떨림과 투샷의 간격은 이 단절을 화면에 남긴다. CCTV의 고정된 시선까지 겹치면서 영화는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를 드러낸다. 철이 역시 그 시선들 사이에 있다.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지만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서 사물은 사람보다 먼저 시간을 기억한다.
철이가 차창 밖으로 던진 콘칩 봉지는 버려진 채 사라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것을 곧바로 지나치지 않고 한동안 붙잡아둔다. 길가에 남은 빈 봉지는 다시 호석의 눈앞으로 들어온다. 먹을거리의 포장지는 이제 호석의 간식이 될 뻔한 물건이다. 그러나 철이는 “내 거”라고 말하며 그것을 가져간다. 한 번 버려졌던 것이 다시 주인을 얻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그 봉지는 미옥의 손에 들려 식탁 위에 놓인다.
차창 밖으로 버려졌던 봉지가 길가에 남고,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소비가 끝난 뒤 남은 쓰레기였던 것이 마지막에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물건이 된다. 대단한 물건이어서가 아니라, 영화가 그것을 버려진 채 끝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변화다. 감독이 말한 것처럼 날아가지 못하는 봉지도 날아가는 꿈을 꿀 수 있다면, 이 봉지는 끝내 날아오르지 못한 채 다른 자리로 옮겨간다. 그 움직임 자체가 이 영화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의미를 하나로 못 박기보다, 버려진 것에도 다음 장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미옥과 호석의 시간도 겹쳐진다. 미옥이 젊은 시절 호석을 만났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오버랩된다. 과거의 사랑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랑 위에 겹쳐 있다. 호석은 해고와 파업을 거치며 달라졌지만 미옥에게는 그 변화 이전의 시간이 함께 존재한다. 새로운 사랑은 이미 살아버린 사랑을 지우고 시작할 수 있는가.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안미옥이라는 이름에서 시인 안미옥의 시를 떠올리는 것도 직접적인 연관을 증명하려는 일이 아니다. 일상의 사물과 몸, 지나간 시간과 관계의 틈을 크게 설명하지 않고 바라본다는 점에서 느슨한 공명이 생긴다. 『온』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온전함에 쉽게 닿지 못하는 관계의 감각 때문이다. 영화 후반 호석이 만든 대리석 식탁은 오랫동안 마당에 놓여 있다.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만드는 시간과 함께 사용하는 삶의 시간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미옥과 호석이 그 식탁에 앉는다. 술잔을 나누고 달을 바라본다. 달은 과장되지 않는다. 특별히 크게 당겨 찍은 달도 아니다. 두 사람은 그저 같은 달을 오래 바라본다. 완전한 모습으로 떠 있지만 손에 닿지는 않는다. 삶의 조건도 사랑의 조건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시간을 바라본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영화가 노동을 제대로 보려는 영화이면서도 어느 순간 노동을 사랑의 언어로 번역해버린다는 데 있다. 노동과 자본, 노동과 놀이, 인내와 여유가 서로의 자리에 정확하게 대응한다. 호석과 상우의 사랑 역시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보여주기 위한 두 개의 축처럼 놓인다. 장면이 만들어내는 긴장보다 그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먼저 보이는 순간이 있다. 복잡한 삶을 포착한 영화가 그것을 다시 자신이 만든 도식 안에 넣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능한 사랑〉에는 그 도식에서 빠져나오는 사물과 시간이 있다. 버려진 콘칩 봉지가 다시 식탁 위에 놓이고, 물은 노동에서 놀이로 옮겨가며, 과거의 사랑은 현재의 사랑 위에 겹쳐진다. 사람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는 것처럼 사물과 시간도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가능한 사랑〉은 노동에서 시작하지만 노동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몸에서 소리가 나오고, 사물이 움직이고, 시선이 생긴다. 누군가는 바라보고, 누군가는 찍히고, 누군가는 행동한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사라지지 않는 간격을 알면서도 한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는 일에 가깝다.
영화가 끝내 묻는 것은 사랑이 가능한가가 아니다.
달을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간격이 있다. 영화는 그것을 지우지 않은 채 끝난다.
첫댓글 노동과 통제를 설명하기보다 반복되는 소리를 통해 그것이 몸에 남는 방식 이 와닿습니다.
상우는 혼자만 멋있기 싫다며 선글라스를 벗지만 그래서 혼자만 멋있어보여요. 끝내 하나는 갖지 못하게 하지만 그것도 뭐 대체물이 있는 것이고... 씁쓸하네요.
가능한 사랑은 이상한 제목이다 영어로 쓰면 더 그렇다. 왜 그렇게 지었을까 궁금하다 생각했어요
천의무봉까지는 아니구 로맨틱 스릴러와 사회문제가 이음새 보이게 이어져 있긴 한데 저는 재밌었습니다. 미옥이 옷과 밥이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항상 이어져 있는 거죠 그런 건.
그래도 저는 버닝이 더 취향이에요. 버닝 vs 가능한 사랑?
개인적으로 밀양이 영화적인 향이 가장 강했던 것 같아요. 버닝은 포크너의 자장 안에서 진행되고 이번 영화도 어딘가 스타인벡을 연상하게 하거든요. 문학적 형식에서 못 벗어나는 게 단점아닌 단점 같아요.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아, 미옥은 진짜 극중 이름이 안미옥이기도 하고 생활에 밀착된 지점이 실제 안미옥 시인과 겹쳐 보였습니다.
@소대가리 밀양이 좋은 영화라고 하죠. 근데 이 영화는 이야기 흐름이 버닝이랑 같은 결이다라고 느껴서 둘을 비교했어요^^ 그 문학적 향이 버닝에서 더 강했고 (촬영도) 그게 좋았습니다.
전도연이 좋은 배우라고 하는데 저는 그녀의 개성이 늘 인물을 뚫고 나온다는 생각이 있어요. 밀양이나 여기서나 그래서 덜 좋게 느끼는 것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가능한’이라는 형용사겠죠. 인물의 계급에 따라 형용하는 방식이 달라지니까요. 상우와 예지에게 사랑은 베품을 가장한 착취이고 호석과 미옥에겐 인내와 간절함이 낳은 결과니까요.
@소대가리 있을법한 plausible 정도가 자연스럽게 들리는데 일부러 쓴 것이겠죠. 예지와 미옥의 우정은 일부 사랑인 측면이 있습니다. 뜬금없이 조합설립을 한다고 하는 게 웃길 수도 있지만 뜻밖의 변수로 그게 성사되기도 하고 호루라기가 전해지기도 하고 실제 변화가 생겼으니까요. 그런 사랑 요원하지만, 정말 불가능하다면 제 정신세계든 현실세계든 파국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소대가리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