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랍 30일에 사무국장 철영과 함께 노고단에 갔습니다. 속으로는 노고단을 거쳐 반야봉을 찍고 불무장등 아니면 피아골로 내려오려 마음먹었습니다만 노고단 대피소로 오르면서는 해발 1미터 오를 때마다 기온이 1도씩 떨어지는 것처럼 기온이 급전직하해서 더이상 전진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살벌한 추위는 철원에서 군 생활할 때 혹한기훈련에 나가서 경험한 것과 흡사했습니다. 손끝은 얼어오고 두뺨이 칼바람에 찢겨나가는 것 같았어요. 철영이도 눈치를 보아하니 거센 눈보라에 기세가 꺾인 듯했습니다. 하긴 둘 다 마음만 청춘이지 육체는 半百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래, 반야봉도 불무장등도 다 포기하고 온 길을 되밟아 화엄사로 내려왔습니다. 택시를 잡아탔는데 철영이가 택시기사에게 구례에서 잘하는 대폿집 하나 소개하라고 하니 전일식당 앞으로 차를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일식당은 내가 몇 번인가 가 보았는데 음식맛이 별로였던 기억이 나서 두규 형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봤습니다. "어. 태웅이냐? 나 여수에 선생들 연수왔다. 거 하나로 마트 옆 동아식당이여." "예, 형. 술 엔간히 마시시요." 동아식당은 재작년 가을에 두규 형이랑 국시모 이현상 비트 모니터링에 함께 갔다가 뒤풀이를 했던 곳이었고 할머니 음식 솜씨가 우리 어릴적 먹던 어머니의 그것이었던 기억이 났는데 그땐 두규 형의 차를 타고 따라와서 위치를 정확히 몰랐던 것이었어요. 철영이랑 앉은 좌석 옆에 중늙은이 한 사람하고 젊은 친구 대여섯이 벌건 석유난로를 꿰차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철영이는 그 벌겋게 단 석유난로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습니다. 저와 철영이는 우선 배가 고파 음식에 거의 코를 박고 먹어댔습니다. 옆에서 떠들던 중늙은이가 꽃상여 얘기를 했습니다. 시골 마을에 상이 나면 그 마을의 잔치였다. 돼지 한 마리 자빠뜨려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그리고 상여나갈 연습을 했다. 지금은 다 장례식장으로 가 버리고 시골엔 이제 상여를 맬 사람도 상여를 인도할 소리꾼도 없어졌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자기들끼리만 크게 얘기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걸어왔습니다. 이때 철영이가 그 특유의 북한말투가 섞인 말로다가 뭐 괜찮습니다 우린 순천에서 왔습니다 이러는데 저는 그때 철영이가 원래 탈북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분명 남원 출신이라고 그랬는데 아마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 따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탈북해서 베트남을 거쳐 남원에 정착했을 것이라고 속으로 기정사실화했습니다. 그의 특유의 생명력, 각진 얼굴, 칼날 같은 눈맵시가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순천에서 왔다고 하니까 철영이의 옆에 앉았던 젊은이가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습니다. "아, 순천요? 순천은 우리가 구례에서 오줌싸면 오줌방울이 순천으로, 한창때는 여수까지 튀겨부렀다니까요." 그 말을 듣던 그 중늙은이는 "자네는 순천까진가? 나는 남원 넘어서 익산까지 튀겨부렀어." 오랜만에 듣는 민중적인 유머였습니다. 그 신소리들에다가 막걸리에다가 가오리찜에다가 정말 마음이 푸근해져왔습니다. 가만히 듣자하니 그 사람들은 섬진강을 끼고 구례에서 악양까지 사는 사람들인데 자기들끼리 지리산을 주로 오르는 산악회의 선후배 송년모임을 가지는 중이었습니다. 지리산을 자기 손금보듯 들여다 보고 눈 감고도 다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가끔 산에서 조난사고가 났을 때 119구조대원들을 이끌고 몇 번인가 조난당해서 얼어죽거나 추락해서 죽은 시체들을 찾아냈다고도 했습니다. 그들을 보내고 나서 저는 곰곰 생각했습니다. 저들의 미덕은 무엇인가? 저들의 그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포근하고 유쾌한 감정으로 이끄는 것일까? 그것은 그 어떤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본연적 순수함 그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피 속에는 쉼없는 강물이 흐르고, 큰형님과도 같이 키 크고 등 넓은 지리산맥이 드리워 있는 것이겠지요. 촌스러우면서도 격조있는 사람들. 민중예술이 형상화해야 할 한 전형이었습니다. 언젠가 철영이랑 술 마시다 철영이로 하여금 노래방비로 무려 20만원을 긁게 한 앙갚음을 하고자 이 술은 모두 내가 살게, 큰소리 쳤습니다. 배불리 술먹고 가오리찜 한 마리 다 먹고 달걀후라이 10개쯤 먹고도 술값 16000원 나오던군요. 앞으로 그 20만원을 다 갚으려면 철영이를 데리고 이 동아식당에 12번 정도는 더 와야겠다는 계산을 했습니다. 서울 갈 차표를 사 놓고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아서 구구절절이 썼습니다. 그래도 30분 정도 더 남았습니다.
오래 전에 카페에 올리지 않았냐? 시차적응이 안 돼서 글을 읽다말고 몇 번 날짜를 보았다. 토요일에 부산 사는 누구랑 화엄사-노고단(1박)-피아골로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봄 산불 때문에 15일부터 노고단-피아골은 산행이 금지되었구나. 나도 너처럼 노고단까지만 갔다가 내려와야할랑갑다.
첫댓글 2010년 1월에 당시 사무국장이던 박철영 시인과 노고단에 다녀와서 쓴 글인데 어디에 썼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인터넷에서 떠도는 걸 발견하여 여기에 다시 올립니다.
선생님의 글에서도 그 맛이!^^
뭔가 시금털털한 그 무엇?
얼마전 밤이었는데도 형님 술취하고 잠들어서도 동아식당을 잘가르쳐 주던데요^^
이제 눈감고도 찾아갈 정도로 익숙한 곳인가 봐요 ㅎ
정말 싸고 맛있고 아줌마들도 친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려, 거기 가면 일단 마음이 푸근해져서 좋지. 너도 자주 놀러오니라.
오래 전에 카페에 올리지 않았냐? 시차적응이 안 돼서 글을 읽다말고 몇 번 날짜를 보았다. 토요일에 부산 사는 누구랑 화엄사-노고단(1박)-피아골로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봄 산불 때문에 15일부터 노고단-피아골은 산행이 금지되었구나. 나도 너처럼 노고단까지만 갔다가 내려와야할랑갑다.
카페에 올려놓고 제가 지워버린 글이었더군요. 철영이가 자신의 카페에 올린 것을 찾았어요.
주인한테 제대로 찾아간글이그만..^
몇 년전 일이되었지만 그 날이 생생하네. 눈천지인 노고단 산장까지 오르며 즐거워했던 시간속의 눈쌓인 지리산처럼 하얗게 얼어버린 말들이 노고단에 지경에 이르면 바람결에 간간히 들려준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