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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오선 시조집,『봄, 아다지오』
-사랑, 민들레로 피어나다
김우연(시조시인‧문학평론가)
서정시는 가장 인간적인 향기를 닮고 있는 문학 형태이다. 그래서 시에는 그 사람의 삶의 흔적이 담겨 있게 마련인 것이다. 홍오선의 그간의 시조 작품들은 인간의 본원적인 감정들을 절제하여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시적 성취를 높혔다. 이번에 상재한『봄, 아다지오』(책만드는 집, 2023)도 이 연장 선상에 있다. 시집 해설에서 유종인은 “시조시인에게 외따롭게 주어진 숙명이란 게 있다면, 적어도 홍오선에게는 사랑을 재장구치듯 거습 그 참서정의 본령本領을 재우치듯 일깨우는 일만 같다.”라고 했는데, ‘사랑’이야 말로 이번 시집을 푸는 열쇠일 것이다.
보챔도 서둚도 없이 달그림자 걸음으로//
벙글 듯 눈썹이 젖는 꽃잎의 여린 어깨//
첫사랑 내게 오듯이 그렇게 물이 드네//
몰래 앓던 몸살처럼 저 붉은 꽃의 나이//
밤새워 손잡아 줄 그리운 그 얼굴만//
천천히 아주 느리게 기척으로 다녀가네
-「봄, 아다지오」전문
‘아다지오’란 악보에서, 안단테와 라르고 사이의 느린 속도로 연주하라는 말 또는 그러한 곡을 말한다. 흔히들 봄은 빨리 지나간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봄이 천천히 다녀간다고 한다. 봄이 “달그림자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고 한다. “첫사랑 내게 오듯이 그렇게 물이 드네”라는 감각적인 묘사를 통하여 봄이 오는 것이 눈앞에 보이듯 묘사한 것은 탁월한 표현이다. 둘째 수에도 “천천히 아주 느리게 기척으로 다녀가네”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밤새워 손잡아 줄 그리운 그 얼굴만”이라고 하였다. 즉 “그리운 그 얼굴만” 떠오르는 봄이기에 천천히 가고, 또 ‘그리운 그 얼굴만’ 떠올리고 싶기에 천천히 봄이 가기를 바라는 것으로 느껴진다. ‘첫사랑의 몸살’처럼 그리운 얼굴은 애련한 사랑으로 다가온다.
천지가 아뜩하구나
너 없이도 봄은 오고
다시 또
이월 스무날
그림자는 어룽지고
울다가 빠개진 가슴
제풀에 돋아난 별
-「초저녁 별」전문
초장부터 감정이 노출되어 있다. ‘아뜩하다’는 것은 ‘갑자기 어지러워 정신을 잃고 까무러칠 듯하다’는 뜻이다. 그것도 ‘천지가 아뜩하구나’라고 하였다. 주로 묘사를 통하여 감정 절제가 뛰어난 시인이 이토록 감정을 노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너 없이도 봄은 오”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봄날을 혼자서 맞이하는 것이 고통인 것이다. 그것은 “다시 또”라며 또 한 해를 맞이하고 있다. “이월 스무날”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현실에서 특별한 날일 수도 있고, 구체성을 띤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여튼 그날은 “그림자는 어룽지고”라고 하였다.「봄, 아다지오」에서 ‘그리운 그 얼굴’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종장에선 “울다가 빠개진 가슴” 이르면 독자에게도 아픔이 전해진다. 아프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울음 속에 눈물이 빛에 반사되어 별이 된다. “그래서 제풀에 돋아난 별”일 것이며, 하늘을 바라보아도 우주에 빛나고 있는 별이 온통 눈물로 반짝이는 것이다. 슬픔이 없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토록 아름답게 시조로 승화하여 독자의 가슴도 위로하게 하는 힘이 있다.
나비처럼 사뿐하게//
내려앉는 너의 눈빛//
어둠에 무등 타고//
봄 문턱을 넘어서서//
평생을//
잊지 말라고//
찍어놓은 저, 발자국
-「초사흘 달」전문
「초저녁 별」이 감정 노출이 심했다면,「초사흘 달」을 보면서 감정을 정화하고 “나비처럼 사뿐하게// 내려앉는 너의 눈빛”이라며 ‘초사흘 달’이 뜨는 것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한 예는 지금까지 없었을 것이다. 밝고도 맑은 이미지는 중장에는 더욱 흥겹게 “무등을 타고” 왔다. 그것도 “봄 문턱”을 넘어서서 온 것이다. 결국은 “평생을// 잊지 말라고// 찍어놓은 저, 발자국”이라며, ‘달’을 보면서 잊을 수 없는 ‘너의 발자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좋았던 날들과 웃음들을 기억한다면 달은 더욱 환하게 빛날 것이다. 그게 ‘달’이 빛나는 이유일 것이다.
품에 꼭 안길 듯이
하얗게 밀려들다
팔 벌려 다가서면
저만치 쓸려 가는
파도야,
네 등을 타고
왔다 가는 얼굴 있어
-「너」전문
시인은 별과 달에 이어 파도를 보면서도 ‘너’의 ‘얼굴’을 본다. 초장에선 “품에 꼭 안길 듯이/ 하얗게 밀려든다”고 했다. 그래서 중장에선 “팔 벌려 다가서면/ 저만치 쓸려가” 버리고 만다. 종장에선 “파도야,/ 네 등을 타고/ 왔다 가는 얼굴 있어”라고 하였다. ‘품에 꼭 안아주고 싶지만’ 안아주지 못하는 상실감으로 슬픔이 어려진다. 그것도 끊임없이 다가왔다가 쓸려 가는 파도를 보면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의 모습과 숨결이 온 우주에 가득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인생을 “이정표/ 더 이상 없네/ 인생이란/ 아뿔싸!”(「편도행」부분)이라고 노래할 경지에 이르면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된다.
떨어진 꽃씨 한 톨 지금껏 살아있네
한겨울 나락 속을 오지게도 헤쳐 나와
마지막 기도의 첫머리 아픈 눈을 뜨고 있네
이제는 간절한 것들 마음껏 피워보련
세찬 바람 타고 올라 연鳶이 되어 나는 너를
촉촉이 살 트는 햇살에 오래도록 비춰보네
놓쳐버린 눈길에도 꽃잎은 흔들리고
알아도 모르는 척 발걸음을 감춰두고
전생을 떨며 돌아온 네 그림자 끌어안네
-「민들레로 너는 피어」전문
민들레를 의인화하였다. 이 작품 전체를 의인화하여 시적 효과를 높혔다. ‘민들레’의 생명력은 강하다. 한겨울을 헤쳐나와서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꽃씨를 날리면서 초겨울이 올 때까지 계속 꽃을 피운다. 그래서 둘째 수에서는 “이제는 간절한 것들 마음껏 피워보련”이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 셋째 수 종장에서 “전생을 떨며 돌아온 네 그림자 끌어안네”라며, ‘민들레’가 ‘너’이며 ‘너’가 바로 ‘민들레’가 된다. 이 둘은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된다. 그래서 불이(不二)요 화엄(華嚴)이다. 시인의 마음은 별과 달의 우주적인 것과 파도는 지구, 민들레는 작고 강하면서 아름다운 존재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아름답게 피운 꽃들이다.
홍오선 시인의『봄, 아다지오』는 정형시인 짧은 형식의 시조 속에서 우주도 녹아 있고, 우리의 생명도 영원함을 깨닫게 해주는 힘이 있다. 애련한 사랑을 넘어서서 독자들에게 슬픔 상처마저도 위로하고, 환하게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힘이 있는 작품으로 가득하였다. 겨울을 겪고 나온 매화향기처럼 홍오선 시인의 작품은 읽을수록 독자의 마음에 향기를 품게 하고 있다.
첫댓글 홍오선 문우님! 시조집 <봄, 아다지오> 잘 받았습니다. 숙독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반산 서생님 요즘도 여전히 등산을 많이 하고 계시는지요? 늘 건강하시고 건필을 빕니다.
반갑습니다. 김 선생님! 요즘은 몸이 따르지 않아, 둘레길도 겨우 걷습니다.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