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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오늘은 목마와숙녀의 시인 박인환님의 52주기이다.
1956년 3월 20일에 사망하였는데, 목마와숙녀는 그 전해인 55년에 발표한 것이다.
한동안 외우고 되뇌이던 이 시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았는데, 존경하는 시인님께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목마와 숙녀
박인환 (1926 ~ 1956.3.20)
1955 발표작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남기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 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있어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 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해설>
- 해설에 앞서서
목마와 숙녀는 너무 유명한 시인데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해석은 “감상적” 또는 “도시적” “통속적”이라고 말하는 정도로 감상을 위한 구체적인 해석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 백번을 외우고 나서, 자연히 떠오르는 이야기로 아래와 같이 해석을 해 본다;
버지나아 울프는 20대에 결혼하여 60대였던 1941년에 자신과 30년을 넘게 산 남편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기 위해서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영국의 작가. 여성주의자. 사춘기까지 의붓 오빠에게 반복적으로 성추행을 당해서 그 정신적인 충격에 평생 괴로워했으며, 부부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결혼했다. 고고하고 귀족적인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주었지만, 그의 작품은 항상 우울했었다고 한다. 그런 고고하게 살다가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한 문학 작가와 화자의 마음속에 있는 여인,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를 동일화해서 노래하고 있다.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냈다. 돌아갈 나이가 되어 죽으면 호상이라 해서 꽃이라도 붙은 상여를 내지만,아이들이나 혼인하지 않은 처녀총각이 죽으면 대개는 그냥 민상여로 내보냈을 것이다. 상여는 나무로 만들었으니 작가는 이를 목마로 은유한 것일테고, 게다가 상여를 앞에서 인도하는 종소리는 말방울 소리 같이 들리기까지 하므로…
이제, 작가가 이야기하는 가슴 속의 풍경으로 가보자.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스스로든 병으로 인했든 처녀가 죽었고, 화자는 그 장례식 발인하는 마당에 있다. 시간을 지체 않고 엄숙하게 출발하는 상여는 호상이라 할 수 없으므로 별 장식 없는 목상여로 나간다. 상주들은 그저 그냥 보내기 섭섭하므로, 앞에 종잡이 하나를 붙인다. 철렁철렁 울리는 종소리를 앞세우고 상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다. 뒤에서 너풀거리는 상여꼬리가 마치 여인의 옷자락 같아 보인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남기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 날은 가을 날.
화자의 가슴에 간직한 그 것이 상대의 응답을 받았을지 아니면 혼자 한 사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 마당에 있는 산 사람들은 기혼자였을 그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상여를 쫓아 가지도 못하는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상가집 마당에 깔아 논 멍석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술병을 들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놓으니, 온몸에 술기운이 퍼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정원이란 무엇일까? 정원은 집 안에 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공간이다.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항상 위안과 쉼을 얻을 수 있고 그 안의 모든 것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자신 만의 공간을 그의 사랑에게 내어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화자와 문학을 통해 알게 되었으리라. 한동안 그들을 묶어 두었던 문학을 그녀가 단념하자, 그나마 사회와 연결되는 활동도 없어지고, 가장 소중해야 할 사랑한다는 사실도,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는 증오의 감정도 다 내치고 무관심의 관계로 되어버리고, 그녀는 더 이상 이승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고립됨을 피하여 서로 어울려 사회적 인생을 사느라 각자의 삶의 에너지가 억눌려지는 괴로움을 감수하여야 하는데, 그 것을 감내하지 못하고 떠나간 사람에 대한 원망을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구로 표현하고 있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 보아야 한다
술병, 아니 술을 마신 작가의 몸이 마당에 쓰러지고 한동안 토론하고 동경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밤에 불을 비추어야 할 등대에 불이 없는 것처럼 이제는 늙은 여류작가의 눈도 총기를 잃어버리고,
시대가 바뀌어 페시미즘(염세주의)이 시대정신으로서 더 이상의 역할을 못하는데도, 그 것에 미련을 가지고 연연하는 것에 대한 탄식을 “~하여야 한다”로 숙명적임을 암시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헤어지는 것은 사실인데, 페시미즘에 심취하여 살다가 그 것에 충실해서 목숨을 끊은 버지나아 울프의 이야기가 자랑스런 행위로서가 아니라, 60여년 동안 힘들게 이어온 삶을 그제야 마감했던 서러운 행위로 생각되어야 함에 대한 탄식.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그런 생각은 결국 페시미즘(염세주의)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메시지를 필요로 하게된다. 즉, 두개의 바위, 모성의 젖무덤이나 무릎 사이의 원초적 생명의 샘을 생각해보라. 넘치는 생명력은 물론 뱀의 눈과 같이 날카로운 지혜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생존과 생식을 위하여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 세상에서 잘 살라는 메시지이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있어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페시미스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혼자이거나, 고고하게 사는 것만이 인생이 아니라, 통속적인 것들을 보고 웃고 함께 어울려 살아도 되는데, 왜 그런 것을 기피하여 종국엔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가?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 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상여는 멀리 갔는데도 귓전에서는 방울소리가 울리고, 화자는 멍석 위에 쓰러져 싯귀를 중얼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