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디거》는 재난영화처럼 시작한다. 석유 재벌 디거 록웰은 그린란드에서 석유를 시추한다. 빙붕에 생긴 균열은 거대한 파국으로 번진다. 디거의 손에는 삽이 들려 있다. 땅을 파고 자원을 캐내는 도구다. ‘디거’라는 이름 자체가 파고 들어가는 행위를 가리킨다. 석유 시추와 삽, 빙붕의 균열이 자본의 욕망과 자연의 파괴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디거에게는 매기가 있다. 30년을 함께한 고양이다. 노환과 수은 중독으로 고통받는다. 디거가 손을 내밀자 매기는 그의 손가락을 문다. 다섯 바늘을 꿰맬 정도의 상처다. 평생 곁에 둔 생명이 마지막 순간 자신의 손을 거부한다. 돌봄과 소유가 뒤엉킨 관계에서 발생하는 작은 저항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말하는 통제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디거는 땅을 파고 자연을 통제한다. 자본으로 재난을 통제하려 한다. 매기 역시 자신의 세계 안에 붙잡아둔다. 매기의 물기는 그 통제가 완전하지 않다는 흔적이다. 자연을 지배한다고 믿는 인간의 손에 자연의 형상을 한 존재가 상처를 남긴다.
곧 첫 번째 액자가 드러난다. 지금까지의 재난은 현실이 아니라 〈Fossil Fools〉라는 연극이다. 디거를 연기한 사람은 커티스 마크슨이다. 관객은 자본가의 탐욕을 비웃는다. 악인은 무대 위에서 처벌된다. 재난은 두 시간짜리 공연으로 정리된다. 현실의 복잡성은 하나의 악인과 하나의 결말로 압축된다. 여기서 《디거》의 문제가 시작된다. 영화는 자본을 비판하면서 자본이 사용하는 방식을 그대로 취한다. 복잡한 구조를 하나의 인물에게 집중하고 디거를 악인으로 만든다. 관객은 자신이 자본을 심판했다고 느낀다. 연극은 그 감정을 상품으로 판매한다. 비판 자체가 소비 가능한 상품이 된다.
커티스의 현실은 이 구조를 흔들 수 있는 기회다. 딸 Hope와 연락이 끊긴다. 폭풍 속에서 커티스는 딸의 생사를 알 수 없다. 기다린다. 전화를 확인한다. 뉴스에 매달린다. 여기서 영화가 커티스의 시간을 붙잡았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힘을 얻었을 것이다. 무대에서 자본을 조롱하던 배우가 현실에서는 자신이 비판하던 세계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정치적 풍자가 개인의 공포와 충돌하는 순간이다.
케니 록웰이 개입한다. 실제 디거의 조카이자 극의 제작자인 케니는 보안과 기술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Hope를 찾는다. 커티스가 아무것도 모르는 동안 케니는 정보를 확보한다. 커티스가 기다리는 동안 케니는 움직인다. 커티스의 무력감이 서사의 긴장이 되기도 전에 정보가 그것을 해결한다. 이것은 단순한 조력자의 문제가 아니다. 커티스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쫓겨나는 문제다. 가장 절박한 사건의 해결 주체가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이 견뎌야 할 불확실성은 기술과 정보에 의해 제거된다. 영화는 인간의 무지를 서사의 시간으로 만들지 못하고 시스템의 능력으로 덮어버린다.
가네쉬는 이와 다르다. 그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과학자가 아니다. 재난의 실체를 직시하고 그것을 분석해 말하는 사람이다. 커티스에게 재난이 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공포라면, 가네쉬에게 그것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그는 파국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는다. 과학은 여기서 자본의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한 언어가 된다.
문제는 영화가 가네쉬의 과학마저 커티스의 체험을 대신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가네쉬가 재난을 설명할수록 커티스가 재난을 겪는 시간은 줄어든다. 대통령과 부통령, 군대의 대응까지 이어지면서 개인의 공포는 국가적 관리의 장면으로 옮겨간다. 재난의 실체는 선명해지지만 커티스의 무력함은 흐려진다.
카메라 역시 커티스에게 머물지 않는다. 무대와 현실, 개인과 집단, 정치와 과학, 자본과 재난 사이를 끊임없이 이동한다. 드뷔시의 〈두 개의 아라베스크〉 1번이 그 이동을 가볍게 가로지른다. 영화에서 사용되는 것은 아델라이드 페리에의 마림바 편곡이다. 무너지는 빙붕과 가벼운 타악기의 음색이 충돌한다. 파국은 비극인 동시에 구경거리가 된다.
영화는 재난을 끝까지 체험하게 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음악으로 바라보게 한다. 인간의 공포는 하나의 장면이 되고, 장면은 다시 하나의 공연이 된다. 영화가 비판하는 자본의 스펙터클과 영화 자체의 시각적 쾌감 사이에 불편한 겹침이 생긴다. 매기의 존재는 이 문제를 더 밀어붙인다. 매기는 디거의 세계를 30년 동안 견딘 생명이다. 수은 중독으로 병들고 마지막에는 디거의 손을 문다. 마지막에 그 존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고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생명의 고통마저 인간이 만든 재현일 수 있다는 뒤집힘이다.
이 반전은 영화의 시선과도 연결된다. 영화는 인간을 바라보고, 재난을 바라보고, 자본을 바라보고, 매기를 바라본다. 모든 것이 관찰되고 연결되고 설명된다. 관찰하는 자는 누구인가. 매기의 인공성이 드러나는 순간 그 질문은 영화 자체를 향한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인간이 만든 장치일 수 있다. 극중극의 구조는 여기서 완성된다. 처음에는 영화가 디거를 바라본다. 다음에는 관객이 디거를 바라본다. 마지막에는 영화가 관객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위치가 계속 이동한다. 어느 위치도 안전하지 않다.
문제는 이 복잡한 구조가 커티스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연극 제작진과의 갈등은 충분히 축적되지 않는다. 커티스와 디거의 관계도 깊어지지 않는다. Hope를 기다리는 시간도 짧다. 커티스가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과 현실에서 의존해야 하는 자본 사이에서 느끼는 모순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 영화는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더 큰 층위로 이동한다.
개인의 갈등을 해결하는 대신 세계의 규모를 키운다.
그 결과 《디거》는 자본을 비판하는 영화이면서 자본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객을 대한다. 정보를 계속 공급한다. 거대한 장면을 보여준다. 정치, 과학, 기술, 환경, 예술을 하나의 스펙터클로 묶는다.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보다 다음 층위로 이동한다. 영화가 비판하는 ‘통제’의 논리를 영화의 형식 자체가 반복한다.
처음의 〈Fossil Fools〉로 돌아오면 이 모순은 선명해진다. 관객은 디거를 조롱한다. 자본주의의 악인을 심판했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 관객 역시 공연의 소비자가 된다. 자본의 비판이 자본의 상품이 된다. 영화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거대한 재난과 유명 배우, 반전, 정치적 풍자를 상품으로 만들어 관객에게 제공한다. 액자가 닫힌다. 디거는 땅을 파고 들어간다. 연극은 디거를 파헤친다. 영화는 연극을 파헤친다. 관객은 영화를 바라본다. 마지막에는 그 시선마저 다시 영화 안으로 회수된다.
《디거》의 실패는 주제가 과잉이라는 데 있지 않다. 주제를 체험으로 만들지 못한 채 계속 확대한다는 데 있다. 세계의 규모는 계속 커진다. 재난은 과학으로 설명되고, 정보는 기술로 확보되며, 국가는 대응한다. 영화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여준다.
정작 커티스가 딸의 생사를 모르는 시간은 짧다. 이것이 영화의 결정적인 모순이다. 통제를 비판하기 위해 세계를 확장한 영화가 정작 주인공의 무력함은 통제한다. 커티스가 모르는 순간마다 다른 인물이 알고, 커티스가 기다리는 순간마다 다른 시스템이 움직인다. 영화는 그 빈자리를 견디지 못한다. 카메라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디거》의 액자는 마지막에 관객을 향한다. 〈Fossil Fools〉의 관객은 디거를 조롱하며 자신이 비판적 위치에 있다고 믿는다. 《디거》의 관객 역시 영화가 제공하는 정보와 반전을 따라가며 자신이 비판을 이해했다고 믿는다. 영화는 그 믿음까지 소비한다. 자본을 조롱하는 연극을 보여주고, 그 연극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고, 그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위치까지 작품 안으로 회수한다.
자신이 자본을 비판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조차 관객은 영화가 마련한 소비의 자리에 앉아 있다. 비판하는 관객까지 스펙터클의 일부로 만드는 것. 《디거》는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비판적 시선을 요구하면서 그 시선의 자리까지 통제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이냐리투의 부르주아적 시선이다. 자본과 국가와 과학과 재난을 모두 바라보면서도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위치. 세계의 모순을 한눈에 조망하고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구조로 연결할 수 있다고 믿는 위치. 커티스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시간에도 영화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커티스가 기다리는 동안 카메라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개인의 불확실성을 견디기보다 세계의 전체상을 제시한다.
디거가 땅을 파헤치는 자라면 영화는 세계를 파헤치는 자다. 디거가 땅 위에 남긴 균열을 비판하면서 영화 역시 관객과 대상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그 거리를 확보한 채 내려다보는 시선. 그것이 이 영화의 부르주아적 감각이다.
영화는 관객의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본다.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통제의 방식으로.
관객 모독이다.
첫댓글 이런 모욕감이 짜릿한 영화 처음입니다
먹물냄시가.. ㅎ
그렇다면 감독은 디거 조카 같은 사람이겠네요. 파헤친 후 다 회수해버린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감독(또는 선각자)가 보기에 이 모든 상황이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기력에 빠지기 때문에 이런 폐곡선 같은 영화가 나오는 것 아닐까요. 그 비관에 일견 동의하기 때문에 이해 됩니다. 디거 조카가 아니면 제작도 안될 거 잖아요.
'~합시다'의 영화도 '~하지 않아?'의 영화도 '~합니다. 그렇습니다.'의 영화도 있죠. 어느 노선을 취하든 관객이 생각할 틈을 줘야 하는데 그게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네. 관객모독 맞네요. 근데 감독도 Hope을 끝내 보지는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영화에서도 목소리만 나왔듯이.
우와 신선하다 재밌다. ! 하고 봤는데 이런 해석도 가능하군요. 리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