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일 상영하면서 1백만 관객을 동원하는 저력을 보인 영화 '서편제'. 나의 부모님도 서편제를 굉장히 좋아하시며 가끔 TV에서 방영할 때면 자리에 움직이지도 않고 끝까지 보신다. 그만큼 서편제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까지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진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판소리'로 가득했다.
영화는 동호가 주막 주인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며 회상에 잠기면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이렇게 회상에 잠겨서 과거의 얘기를 풀어 가는 횟수가 많다. 내 생각에 시제 전환이 자유스러운 점은 지금 내가 봐도 신선한 느낌이었으니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나와 같아 영화가 흥행한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유봉은 스승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자 동호의 어머니는 죄책감에 자살하고 유봉은 추방당한다. 그 후 유봉은 송화에게는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치며 유랑생활을 한다. 영화는 유봉이 어린 송화와 동호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차분하게 보여 주었다. 어린 송화에게서 나오는 시원한 판소리는 문외한인 나조차도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여러모로 죽이 잘 맞는 소리꾼과 고수로 한 쌍을 이룬 의남매는 유봉과 함께 소리를 팔아먹고 살지만 궁핍한 세월 속에서 그들의 삶은 점차 어려워진다. 그림쟁이인 유봉의 친구는 만날 때마다 송화와 동호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장난삼아 말하지만 그는 매번 단호히 거절한다. 여기에서 유봉의 확고하고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냉대와 멸시 속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던 중 동호는 유봉과 싸우고 떠나버린다. 동호가 떠난 뒤 송화는 소리하기를 거부하고 유봉은 소리의 완성에 집착한 나머지 송화의 눈을 멀게 만든다. 유봉과 그의 그림쟁이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암시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판소리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엿보았다. 송화는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자신에게 그나마 위안은 소리뿐임을 깨닫고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피를 토하는 연습에 몰두한다. 눈을 멀어도 원망 한번 안 했던 송화를 발구르게 만든 것은 가난도 아버지도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한계였다는 점은 송화가 가진 전형적인 예술가다운 기질을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다. 잠시 유봉은 손에 줄을 묶어 송화를 이끌며 눈밭을 걷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유봉의 창은 산에 울려 펴지는데 내가 서편제에서 가장 감명 깊게 본 장면이다. 그의 송화에 대한 집념과 득음의 경지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세월이 흘러 유봉도 죽고, 눈 먼 송화는 밑바닥 삶을 살아간다. 어른이 된 동호는 그리움과 자책감으로 송화와 유봉을 찾아다닌다. 이제는 동호에게 어떤 원망도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남도의 허름한 주막에서 해후한 두 남매는 서로의 신분을 말하지 않고 밤을 지새우며 서로의 그리움과 한을 판소리로 교감한다. 기나긴 판소리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의 판소리는 슬펐다.
동호는 다시 어디론가 길을 떠난다. 어렵게 만난 누이와의 이별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헤어짐을 뼈대로 하고 아름다운 영상과 판소리를 작품에 입혔다고 한다. 장인 정신은 물론 이들의 판소리로 풀어지는 한 또한 작품의 큰 주제가 아닐까 싶다. 판소리하는 사람들의 상업성과 오만함을 비판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교면 에서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룬 사람들이라고 평을 내리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내가 서편제를 보고 조사하며 얻은 상식들이다.
가장 큰 적은 역시나 자기 자신, 넘어야할 가장 큰 벽은 나의 욕심과 만족감이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 소유 가능한 것으로 느끼는 행복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내가 서편제를 보며 다시 절감하게된 교훈이다
양반전을 읽고 ..
박지원의 양반전은 18세기의 몰락한 양반들을 풍자하기 위해서 씌여진 소설이다. 간략하게 양반전의 줄거리를 말한다면 평민부자가 가난한 양반의 빚을 갚아주고 양반자리를 사려다가 까다롭고 비도덕적인 양반의 도리에 혀를 내두르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극이나 현대판 고대소설을 통해서 조선시대를 접해왔다. 물론 양반은 항상 위엄하고 꿋꿋한 모습으로 멋지게 등장하곤 한다. 그에 비해 평민 혹은 노비들은 나쁜점만 고루고루 안은채 영화 한편에 잠깐 나오는 엑스트라와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양반을 돋보이게 하고 추켜세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양반전을 읽기전 내가 생각하는 양반은 우아하고 고상하며 풍자한 집안내력을 내세우는 최고의 캐릭터였다. 그러나 박지원의 양반전에서는 양반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정도로 비참하고 위선적이다. 쌀 천가마의 빚을 떠안고 감옥에 갈 상황에 놓인 것도 모자라 양반자리를 사겠다는 말에 선뜻 자기 신분을 내어준 그는 그 시대의 모든 양반이 다 점잖고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는 걸 확실하게 말해준다. 만일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그 평민부자와 절친한 친구사이가 되거나 서로 돕고사는 우애깊은 이웃이 되었을것이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양반이 제시한 양반의 도리이다. 첫번째 문서에서는 보통사람도 하기힘든 까다로운 생활규칙을 제시했고, 두번째 문서에서는 권력을 남용하여 재물을 모으고, 과거제도를 보지 않고 특차로 벼슬을 얻는 등등이 양반의 장점이라고 한다. 이에 받아쳐, 평민부자는 양반을 '도둑놈' 이라고 한다. 양반이라는 이름으로 평민들을 부려먹고 부정하게 재물을 긁어모으는 당시의 양반들의 모습은 놀라기 그지없다. 어느새 내 상상속의 위풍당당한 양반들은 조금씩 타락해가고있었다.
양반들은 지금 우리사회속의 국회의원과 비슷한 점도 많은 것 같다.
지위도 높고, 모든 사람들의 윗자리에 서서 일하는 반면 남몰래 뇌물을 챙기고 자기이익을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국회의원들도 양반전에 나오는 양반과 다를게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과거든 현재든 우리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면 지위답게 고귀하게 행동하지 않을망정 위선적이고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