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학교 운동장 / 문인수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이다.
달빛이 가장 널리 전개되고 있다.
사람의 참 작은 몸에서 이렇듯 무진장,
무진장한 마음이 흘러나와 번지다니
막막하게 번진 이 달빛 사막에
우듬지를 잘라낸 히말라야시다의 캄캄한 그림자가
캄캄하지만 순하게 엎드리고 있다. 있는 힘껏
이별을 하고
내가 올라타는 것은 전부 낙타인 것 같다.
저 갈길 이미 눈물로 다 잡아먹은 뒤
배밀이, 배밀이 하는 배 같다.
그러니까 운동장엔 둥근 트랙,
휜 궤도가 있다.
한쪽 얼굴이 자꾸 삐딱하게 닳는 달,
저 수척한 달이
너에게로 하염없이 건너갈 수 있는 데가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이다.
*
문인수 시인의 시집에서 시 한편 더 읽어봅니다. 좋은 시가 많지만 이별의 정서를 담은 시를 골라 보았습니다. 고려 민요 ‘가시리’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이어져온 이별의 정한이 장석남 시인의 ‘배를 밀며’에서 현대적 감성으로 꽃피운 것을 보았는데, 이 시는 그런 전통의 맥에서는 조금쯤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다.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이다.
달빛이 가장 널리 전개되고 있다.
사람의 참 작은 몸에서 이렇듯 무진장,
무진장한 마음이 흘러나와 번지다니
- 힘든 이별을 하고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집 근처 학교 운동장’에 나와 있습니다. 넓은 운동장엔 달빛이 가득합니다. 그 무진장한 달빛이 내 작은 몸에서 흘러나온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별의 아픔과 슬픔이 그렇게 무진장일 줄은 몰랐습니다.
막막하게 번진 이 달빛 사막에
우듬지를 잘라낸 히말라야시다의 캄캄한 그림자가
캄캄하지만 순하게 엎드리고 있다. 있는 힘껏
이별을 하고
내가 올라타는 것은 전부 낙타인 것 같다.
- 그 사람을 보낸 막막함이 달빛 자욱한 운동장을 사막이게 합니다. 운동장이 사막이라면 캄캄하게 엎드린 히말라야시다의 그림자는 낙타인 것이지요. 일체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생략한 ‘있는 힘껏’이란 말 한 마디로 이별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나를 알게 합니다. 그런 이별 후에 올라타는 것은 모두가 사막을 걷는 낙타일 수밖에 없지요.
저 갈길 이미 눈물로 다 잡아먹은 뒤
배밀이, 배밀이 하는 배 같다.
그러니까 운동장엔 둥근 트랙,
휜 궤도가 있다.
- 낙타가 아니라면 배일까요. 슬픔(눈물)에 모든 희망(갈길)마저 잃어버리고(잡아먹은 뒤) ‘배밀이’로 뭉그적거리는 배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운동장에 그어놓은 ‘둥근 트랙’‘휜 궤도’는 쳇바퀴 같은 무의미한 일상일 뿐이지요. 비록 일시적인 공황상태라 할지라도, 사랑을 잃으면 꿈도 희망도 다 잃게 되는 것이니까요.
한쪽 얼굴이 자꾸 삐딱하게 닳는 달,
저 수척한 달이
너에게로 하염없이 건너갈 수 있는 데가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이다.
- ‘한쪽 얼굴이 자꾸 삐딱하게 닳’아 ‘수척’해진 ‘달’은 바로 ‘너에게로 하염없이 건너가’는 나의 모습이지요. 도시의 집 근처에서 학교 운동장처럼 넓게 빈 곳이 없지요. 운동장이 넓은 만큼 하늘도 넓고요. 하늘이 넓어서 달이 하염없이 건너갈 수 있는 것처럼 운동장이 넓어서 내 마음이 하염없이 너에게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지요. 비좁고 복잡한 곳에서는 그나마 가능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깊은 밤 운동장에 나와 있는 것이지요.
* 학교 운동장, 달빛, 히말라야시다 그림자, 낙타, 배밀이 하는 배, 둥근 트랙 등 주변의 사물과 거기서 연상되는 이미지로 이별의 슬픔과 괴로움을 유감없이 표현한 시라고 하겠습니다. 이별이라고 저 혼자 서럽고 겨워서 눈물 콧물 짜내는 감상적인 말을 잔뜩 늘어놓아 봐야 남들은 다들 식상해 하고 말지요. 이 시는 어떻게 그런 감정을 다스려야 시가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첫댓글 달밤에 학교운동장에 가보면 저녁 먹고 바람 쐬러 나온 인근 동네사람들이 트랙을 빙빙 돌며 걷는 모습이 흔한 풍경인데, 운동장은 달빛이 자욱 깔린 사막 같고 사람들은 사막을 방랑하는 유목민 같아 보이기도 하지요... 이 시에서 달밤에 운동장 둘레를 싸고 있는 침침한 나무그림자를 낙타에 비유한 것이 흥미롭군요. 다음번에는 그 낙타를 타고 사막을 한번 제대로 건너 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