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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
동쪽은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22리, 풍기군(豐基郡) 경계까지 34리, 남쪽은 용궁현(龍宮縣)경계까지 21리, 서쪽도 용궁현 경계까지 33리, 북쪽은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70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보주(甫州)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에는 안동부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는 태자(太子)의 태(胎)를 이 고을에 장치(藏置)하고 기양(基陽)으로 고쳐서 승격시켜 현령(縣令)으로 하였다. 신종(神宗) 때, 남도초토사(南道招討使) 최광의(崔光義)가 동경의 적[東京賊]과 이 고을에서 싸워서 크게 이겼으므로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보천군(甫川郡)으로 고쳤고, 16년에는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하였다.
【속현】 다인현(多仁縣) 본래 신라의 달이현(達已縣)으로, 혹은 다이현(多已縣)이라고 하였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 본군의 속현이 되었다. 본군의 서남쪽 40리에 있으니 용궁현 동촌에 넘어 들어가 있다. 다른 이름을 인양(仁陽)이라고 한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 인.
【군명】 수주(水酒)ㆍ보주(甫州)ㆍ기양(基陽)ㆍ청하(淸河)ㆍ양양(襄陽).
【성씨】 본군(本郡) 임(林)ㆍ윤(尹)ㆍ권(權) 권(權)은 본래 흔(昕)씨 였으나 고려 신종(神宗) 원년에 명종(明宗)의 휘(諱) 자를 피하여 권씨(權氏)로 고쳐 사성(賜姓)하였다. 허(許)ㆍ이(李) 모두 내성(來姓)이다. 황(黃)ㆍ방(邦) 모두 촌성(村姓)이다.다인(多仁) 황(黃)ㆍ최(崔)ㆍ장(張), 목(睦) 육(陸)이라 하기도 한다. 나(羅)ㆍ백(白) 모두 내성(來姓)이다.보진(寶進) 명(明) 효천(孝川)도 같다. 최(崔)ㆍ김(金) 모두 속성(續姓)이다.선천(善川) 윤(尹) 연천(連川)ㆍ웅천(熊川)도 같다.금천(金川) 심(沈). 우니곡(亏尒谷) 태(太). 고림(高林) 김(金)ㆍ황(黃) 모두 속성(續姓)이다.동로(冬老) 김(金)ㆍ임(林)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속】 풍속은 평이(平易)한 것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여염에 야박한 풍속이 없다. 이지강(李之剛)의 시(詩).
【형승】 동쪽과 서쪽의 두 재[嶺] 사이에 끼어있다. 윤상(尹祥)의 기(記)
【산천】 덕봉산(德逢山)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산 위에 흑응성(黑鷹城)이 있다. 서암산(西菴山) 군 서쪽 8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다인현(多仁縣)의 남쪽에 있다. 군과의 거리는 남으로 35리. 용문산(龍門山) 군의 북쪽 32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에 고승(高僧) 두운(杜雲)이 이 산에 들어와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일찍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갔다. 동구(洞口)에 이르러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용문산(龍門山)이라고 불렀다. 보문산(普門山) 군의 동쪽 34리에 있다. 작성산(鵲城山) 군의 북쪽 75리에 있다. 하가산(下駕山) 군의 동쪽 31리에 있다. 남천(南川)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사천(沙川) 군의 동쪽 14리에 있다. 영천군(榮川郡) 임천(臨川)의 하류이다. 양천(襄川)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풍기군(豐基郡) 명봉산(鳴鳳山)에서 나와서, 본군의 남쪽 12리에 이르러 사천에 들어간다. 대곡탄(大谷灘) 다인현(多仁縣)의 동쪽 9리에 있다. 선창진(船倉津) 현(縣)의 동쪽 3리에 있다. ○ 두 갈래의 물은 자세하게 용궁현(龍宮縣)에 나온다. 홍련지(紅蓮池) 다인현에 있다. 군의 동쪽 60리의 거리에 있다.『신증』 정개산(鼎蓋山) 군의 동쪽 6리에 있다. 귀모현(歸毛峴)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대지지(大旨池) 군의 서쪽 8리에 있다.
【토산】 철(鐵) 다인현의 동쪽 대곡탄에서 난다. 자초(紫草)ㆍ왕골[莞草]ㆍ은어[銀口魚]ㆍ붕어[鯽魚]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인삼ㆍ산무애뱀[白花蛇]ㆍ오미자(五味子)ㆍ잣[海松子]ㆍ닥종이[楮]ㆍ설면(雪緜).
【성곽】 덕봉산성(德峯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4천 80척, 높이가 10척 6촌(寸), 안에 우물 둘, 못 1개가 있다.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서암산 봉수(西菴山烽燧) 동쪽으로 안동부 풍산현(豐山縣) 소산(所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용궁현 용비산(龍飛山) 봉수에 응한다. 소이산(所伊山) 봉수 다인현에 있다. 동쪽으로 비안현(比安縣) 대암산(大巖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용궁현 용비산 봉수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윤상(尹祥)의 기(記)에, “무릇 주군(州郡)에 관사(館舍)를 설치하는 것은, 사신(使臣)이 왕화(王化)를 선포(宣布)하는 때를 기다려, 행례(行禮)할 곳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주 작은 고을이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예천군(醴泉郡)은 동쪽과 서쪽에서 죽령(竹嶺)과 초령(草嶺) 두 재[嶺] 사이에 끼어 있다. 죽령으로부터 상주(商州) 낙동(洛東)으로 가는 자, 초령으로부터 화산(花山)에 가는 자는 반드시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된다. 그래서 사신의 순시(巡視)와 길가는 나그네의 오고 감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그런데, 객관이 좁고 누추하여서 고을과 더불어 서로 걸맞지 않았다. 기미년에 완산(完山) 이지명(李知命) 후(侯)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왔다. 정사를 본지 3년에 정사는 형통하고 사람들은 화합하게 되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과 모의하고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농부나 공장이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일시켰다. 관사가 이루어지니 뜰 층계[階廳]가 높고 커서 심한 더위의 무더움을 제거할 수 있고, 마루의 간살이 넓고 시원하여서, 예(禮)를 행할 때에 읍양(揖讓)할 위치를 마련하기에 넉넉하다. 서늘한 곳과 더운 방을 따로 만들었으며, 외관(外觀)과 실질(實質)은 알맞게 되었으니, 이후(李侯)의 정사하는 것이 급소(急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한도를 넘지 아니하였다. 공사를 일으켰으나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니 어짐[仁]을 베풂이요, 사신을 우대하고 왕명을 존중하니 공경함이 크다. 어짐과 공경함을 갖추었으니 수령의 직책은 다한 것이다. 예천은 나의 누대(累代)의 고향 땅이다. 이후의 정사하는 것은 내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대강 일의 경과를 적을 뿐이다.” 하였다.
【누정】 쾌빈루(快賓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양양(襄陽 고을의 옛 이름)의 누(樓) 위에 늦은 바람 차운데, 청산(靑山)을 향하여 주렴 걷고 홀로 난간에 의지해 선다. 죽령(竹嶺) 높아 하늘이 낮으니 북두(北斗)를 보고, 화산(花山)에서 나오는 길 동관(東關)에 이어졌네. 호걸스럽게 읊으니 도리어 이 강산 좁은 것을 깨닫게 되고, 크게 취(醉)하니 우주가 너그러운 것을 알겠다. 정말 웃을 만하구나. 공명(功名)이 무르익기만 생각하고, 몸과 세상이란 남가일몽(南柯一夢)인 것을 알지 못하니.” 하였다. 『신증』 이의무(李宜茂)의 기(記)에, “신유년에 나는 철성(鐵城) 이심원(李深源)ㆍ성산(星山) 이자고(李子固)ㆍ남원(南原) 황실지(黃實之)와 더불어, 백성을 옮기는 일로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길을 나누어 영남으로 내려갔다. 나는 장차 안동(安東)으로 가려고 하는데, 길이 예천을 경유하게 되어서, 예천의 객관 동헌(東軒)에 유숙하게 되었다. 동헌의 북쪽 모퉁이에 누(樓)의 옛터가 있었는데, 바야흐로 새로 창건하고자 하여 재목을 모아놓은 채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누의 이름을 물으니 쾌빈(快賓)이라 하였으며, 그 신축을 시작하지 못한 이유를 물으니, 태수(太守) 민후(閔侯)가 사건으로 인하여 갈려 갔기 때문에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배회하며 두루 살펴보면서 오랫동안을 슬프게 여기었다. 이 누가 성취되지 못한 것은, 또한 우리들 이번 걸음에 불쾌한 일의 한 가지라고도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각군을 두루 다니며 각군의 웅장하고도 걸출한 누각들을 보니, 그때마다 이 누의 성취 못 된 것이 한스러웠다. 얼마 뒤에 윤후(尹侯)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와서, 제일 먼저 이 누부터 준공시키기를 계획한다는 것을 듣고, 혼자서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면서, 또, 과연 한 번 그 누에 올라가 봄으로써, 우리 일행을 쾌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두어 달이 못 되어서 심원(深源)은 경주(慶州)로부터, 자고(子固)는 진주(晉州)로부터, 실지(實之)는 상주(尙州)로부터 각각 일을 마치고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 와 보니 쾌빈루라는 것이 높다랗고 빛나게 서 있어서, 마치 며칠이 못 되어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우리들은 서로 경하해 말하기를, ‘윤후의 이 일이 이렇게 신통하고 또 신속하였으니, 현명하지 않고야 해낼 수 있겠는가. 옛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데 있어서도 멀고도 큰 것을 계책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현명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누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높은 산이 뒤에 솟아 있고 큰 냇물이 앞을 지나간다. 민가는 사방에 퍼졌으며, 편평한 언덕과 끊어진 둔덕이 둘러싸고 옹위(擁衛)하여서, 마치 이 세상 밖의 딴 한 동천(洞天)인 것 같다. 이것 또한 이 누의 좋은 경치들이다. 조금 뒤에 잔치를 열고 술을 마련하여 함께 마시면서 낙성(落成)을 축하하였다. 좌우에서 술잔을 주고받고하여, 술잔과 그릇들이 뒤섞이고, 거문고와 피리ㆍ젓대 소리가 사이사이 일어나니, 서로 일어나 춤을 추어서 즐겁고 유쾌한 정경이 거나하여 누가 주인이며 누가 손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치 균천(鈞天)에 올라 광악(廣樂)을 듣는 것 같아서, 아무리 뛰고 춤추어도 오히려 부족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누대를 설치하는 것은 경치를 구경하기 위함만이 아니고, 장차 막히고 답답한 것을 인도하여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때때로 나가서 노닐며 구경하여 노고(勞苦)와 안일(安逸)을 조절하는 것도, 또한 정치하는 자의 없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윤후의 이 일은 옛것에 의거하여, 확대해서 전공(前功)을 떨어뜨림이 없게 하고, 뒷사람이 보기에 사치함이 없게 하였음이랴. 사물의 말절(末節)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들이 올라가 유람하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른 나머지에 스스로 쾌(快)하게 되도록 하였다. 우리들이 이 누에서 낙성축하연(落成祝賀宴)을 연 것은 한갓 우리들만의 다행일 뿐이 아니고, 도리어 이 고을의 큰 행복인 것이다. 윤후는 여러 고을의 동인(銅印)을 찼었는데 모두 성예(聲譽)와 치적(治績)이 드러나서, 공수(龔遂), 황패(黃覇)처럼 되는 것도 다 쉽게 여길 만하니, 이번에 이 고을에 온 것이 어찌 그저 수령이 되었을 뿐이겠는가. 아마 이 일로 말미암아 미루어서, 모든 황폐하고 타락(墮落)한 것을 수거(修擧)하는 일은 하나도 원대한 계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위로 봉양하고 아래로 기르는 데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게 하고, 어진 풍속과 화합한 분위기 속에 고무(鼓舞)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사람의 마음이 쾌족하게 되는 것은 유독 손[賓]이겠는가, 주인이겠는가, 또는 이 백성들이겠는가. 나는 경중(輕重)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외람되게 연석에 참여하였으므로, 후의 청탁을 중하게 여겨 대강 일의 경과를 적어서 돌려보낸다. 후의 휘(諱)는 수천(壽泉)이고 자(字)는 영호(永灝)인데, 파평(坡平)의 이름 높은 가문이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매괴(玫瑰 해당화(海棠花))가 피어 다할 때에 보주(甫州)에 머무르니, 푸른 못[池], 푸른 봉우리에 더더구나 높은 누(樓)까지. 징병되어 나가는 위사(衛士)는 새 마음을 망설이고, 웃음을 웃게 하는 아름다운 아가씨 취한 이를 벗하여 논다. 보리 알맹이를 소생시키는 산비[山雨]는 지나가고, 물고기 새끼를 보호하는 수의(水衣 물에 뜨는 푸른 풀)가 떠 있다. 티끌 세상에서 반날[半日]동안 한가함을 얻은 곳이니, 마음에 쾌한 것이 어찌 반드시 만호(萬戶)의 유(留)이겠는가.” 하였다. ○ “뽕나무ㆍ삼대ㆍ버드나무ㆍ느릅나무가 펀펀한 냇가에 성했는데, 누워서 양양(襄陽)의 하늘을 본다. 이 몸은 벽유당(碧油幢 임금과 왕후가 쓰는 기름 먹인 푸른 당막) 아래에서 온 손님, 누에 오르니 회포가 더욱 아득하구나.” 하였다.
『신증』 연빈루(燕賓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향사당(鄕射堂)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권오복(權五福)의 기(記)에, “영(嶺)의 남쪽 60여 주(州)는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때로부터 합하여 한 도(道)를 두었으며, 아조(我朝)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크게 인재(人材)와 물산(物産)의 부고(府庫)가 되었으니, 우리 예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예천은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다. 신라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후 수천 년 동안에 고을의 수령은 몇 사람이었으며, 향대부(鄕大夫)는 몇 사람이었던가. 그중에서 옛 도[古道]에 뜻을 두고, 옛 예[古禮]를 회복하여 능히 백성을 예속(禮俗)으로 인도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고을의 수령은 장부(帳簿)의 처리와 받아들이는 일에 바빠서, 시설(施設)하는 데에는 겨를이 없었으며, 향대부들은 비록 세속을 교화시킬 방법이 있었으나, 한 고을에서는 관리하는 바가 없었다. 소위 지위가 높지 않은 자는 비록 착하더라도, 지위가 높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이 일을 병되게 여기었다. 우리 전하가 즉위하신 무신년에, 옛날에 있었던 곳에 다시 유향소(留鄕所)를 두게 하였으니, 좌수(座首)가 있고 별감(別監)이 있다. 나이와 덕망이 높은 자를 추대하여 좌수라고 일컫고, 그 다음을 별감이라고 일컬었다. 그들이 한 고을의 풍속을 규찰(糾察)하고 관리하였다. 향소의 임원은 부(府)는 4명, 군(郡)은 3명, 현(縣)은 2명이었다. 우리 고을은 군(郡)이다. 윤계은(尹季殷) 후(侯)와 권추(權推) 후가 별감(別監)이 되고 나의 아버지가 좌수(座首)가 되었다. 계은씨는 바로 제학(提學) 윤상(尹祥)의 아들이다. 집안의 대대가 문헌(文獻)이므로 백성을 예속(禮俗)에 인도할 것을 생각하였다. 이것이 향사당(鄕射堂)을 짓게 한 유래이다. 향사당은 좌우 채와 주방(廚房) 등 모두 20칸이다. 향부로(鄕父老)들이 함께 돈을 내어서 기와를 굽고 재목을 모았으며, 군수(郡守) 이잠(李箴) 공도 또한 재목(材木)을 도와주었다. 임자년에 처음 착공하여 계축년에 마쳤다. 그 공사를 감독한 자는 고을 사람 누구 누구이며, 그 공사를 집행한 자는 고을의 아전 누구 누구이다. 지난해 가을에 내가 휴가를 얻어 금당곡(金堂谷)에 귀성(歸省)하였더니,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나를 향사당으로 이끌고 갔다. 술이 반쯤 취했을 때에 윤후가 잔을 잡고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서 이 향사당을 열려고 한 것이 오래 되었으나, 그 적당한 터를 잡지 못하여 어떤 이는 북정(北亭)을 철훼(撤毁)하고, 그 자리에 향사당을 세우자고 하는 이도 있었다. 끝없는 여러 사람의 논의가 대개 또한 몇 해를 끌었다. 하루는 군의 치소(治所) 서쪽 2리 남짓한 곳에 가보게 되었는데 거친 언덕 개암나무ㆍ망초대 우거진 사이로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기이한 곳을 발견하였다. 모든 그 눈에 보이는 것, 마음에 꾀하는 것이 뛰어난 경지 아닌 것이 없었다. 여러 산은 푸르게 둘러싸고, 냇물 하나가 옥 같은 물결을 쏟고 있는데, 숲은 무성하고 대나무는 길며, 집은 그윽하고 지세는 막히어서 마치 하늘아버지와 땅어머니가 감춰 두고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여기에 당(堂)을 짓기로 결의하였다. 향사당이 이루어지자, 그대가 마침 왔으니 한 말씀 기(記)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제사(題詞)나 기(記)를 짓는 것은, 반드시 대가(大家)의 손을 얻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문장에 이름 높은 대가들이 우뚝우뚝하여 서로 바라다볼 만큼 많으니, 요구하여 좋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인데, 버선의 실 같은 보잘것없는 내가 도리어 어찌 능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후가 굳이 명하므로 나는 더 이상 사양할 수 없게 되었다. 곧 말하기를, ‘당(堂)을 개설(開設)하는 것이 어찌 한갓 허튼 일이겠는가. 고대의 성스러운 황제와 밝은 임금은 몸소 인(仁)과 의(義)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함이 두터웠으나, 그것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또 향관(鄕官)을 설치하여 가르쳤으니, 여서(閭胥)니, 족사(族師)니, 비장(比長)이니, 당정(黨正)이니 하니 등속과 같은 것이 있어서, 각기 계령(戒令)ㆍ정사(政事)ㆍ백성 모으는 일[屬民], 법령을 읽어 들려주는 일[讀法] 등을 맡았다. 봄, 가을에는 예(禮)로써 모여서 고을의 학교에서 술 마시고 쏘게 하고, 그들의 덕(德)과 행(行)과 도(道)와 예(藝)를 기록하고, 그들의 과오를 규찰하여 권장하고 징계하였다.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다워져서 한 세상을 인(仁)ㆍ의(義)의 경역(境域)에 올려 놓았었다. 지금의 유향소(留鄕所)라는 것은 즉 옛날 당정(黨正)의 남은 뜻이다. 고을에 완악하고 간특하여 제 멋대로 방자하는 자, 효도하고 우애하지 아니하는 자, 친족간에 화목하지 아니한 자, 인척(姻戚)간에 친애하지 아니한 자, 친신(親信)하지 아니하며 진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당(堂)에서 그에 대한 징계를 의논할 수 있으며, 아전으로서 간특한 마음을 남몰래 품고 있어서, 성(城)과 사(社)를 의지하고[城孤社鼠]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는 자가 있으면 이 당에서 징계를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주관(周官) 향삼물(鄕三物)의 가르침을 미루어 행하고, 여남(汝南)의 월단평(月旦評)을 실시하여 한 고을의 풍속을 격려하는 것도, 또한 이 당(堂)에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당의 임무에 포함된 사항은 광범위하다. 그런데 홀로 사(射)로써 편액(扁額)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말하기를 향사(鄕射)의 예(禮)는 오래 된 옛 풍속이다. 공자(孔子)가 확상(矍相 땅 이름)의 포전(圃田)에서 활을 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 섰었다. 술잔을 들게 하고 말하기를, ‘어릴 때와 장년기에는 효제(孝悌)하고, 늙어서는 예(禮)를 좋아하여 유행하는 풍속에 좇지 아니하며, 몸을 닦으면서 죽기를 기다리는 자가 이 자리에 없습니까.’ 하니, 대체로 가는 자가 반이나 되고 있는 자가 반이나 되었다. 또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예를 좋아하여 어지럽지 않으며, 노년이 되어서는 도에 알맞게 하여, 변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 자리에 없습니까.’ 하니, 겨우 남아 있는 자가 한 사람이었다. 술잔을 드는 사이에 그 착한 자를 골라서 머무르게 하면, 그에 해당하지 아니한 사람은 스스로 물러가는 것이다. 이것은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바 손님의 차례를 현명함의 정도로써 한다는 것으로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바 ‘고을에 가보아서 왕도(王道)의 쉽게 실행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국가가 옛 법을 좇아서 예교(禮敎)를 숭상하여 향사(鄕射)의 예의를 마련하였다. 무릇 활 쏜다[射]는 것은 한 무예(武藝)이지만, 손님을 차례 있게 하고 벌배(罰杯)를 드는 예가 이 의식에서 거행된다. 그리하여 한 고을의 숙덕(淑德)함과 사특(邪慝)함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향부로들이 오직 향사당이라고 현판을 걸었으나, 권장하고 징계하는 모든 뜻이 실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활 쏘는 것은 마땅히 단(壇)에서 해야 하는 것인데, 이제 당(堂)이라 함은 무엇인가. 말하기를, 활 쏘는 것은 단에서 하고, 향빈(鄕賓)의 숙계(宿戒 의식ㆍ제사의 기일에 앞서 목욕재계하는 일)는 당에서 한다. 옛날의 향당(鄕黨)의 선생들은 살아서는 사(社)에 모이고, 죽어서는 사에서 제사되는 것이었다. 아, 이 당은 그 사와 같은 것이다. 내가 훗날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 당에 결사(結社)하여, 봄ㆍ가을의 좋은 날에 닭ㆍ돼지의 안주로 한가하게 부로들을 따라 다니게 되면, 그때에 다시 술 마시고 활 쏘고 하는 예절을 강론하리라.”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군(郡)의 북쪽 1리에 있다. 군수(郡守) 김겸(金謙)이 세웠다.
【역원】 통명역(通明驛)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수산역(守山驛) 다인현(多仁縣)에 있다. 망현원(芒峴院)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호명원(虎鳴院) 군의 남쪽 16리에 있다. 황리원(黃利院) 군의 서쪽 5리에 있다. 우두원(牛頭院)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북원(北院) 군의 북쪽 7리에 있다. 모현원(毛峴院) 군의 북쪽 11리에 있다. 죽원(竹院) 다인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광덕원(光德院) 다인현의 동쪽 21리에 있다.
【불우】 용문사(龍門寺) 용문산(龍門山)에 있다. 고려 태조가 두운(杜雲)을 위하여 창건한 것이다. 뒤에 명종(明宗) 때에 태자(太子)의 태(胎)를 절의 왼편에 있는 봉우리에 장치(藏置)하고 이름을 창기사(昌期寺)라 고쳤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이 기(記)를 썼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두 번째 용문사에 이르니, 산이 깊어서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上方 중 있는 곳)에는 중의 평상[榻]이 고요하고, 옛 벽(壁)에는 불등(佛燈)이 환하다. 한 줄기[一道] 샘물 소리는 가늘고, 일천 봉우리 달빛이 나누인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기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잊어버린다.” 하였다.『신증』 대곡사(大谷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詩)에, “돌 길이 높고 낮아 평탄하기도 평탄하지 않기도 하니, 한가한 손이 과하(果下)를 타고 채찍을 늘어뜨리고 가네. 가벼운 바람은 고요히 연기 빛을 쓸어 가고, 넘어가는 달 때로는 새벽 빛을 겸하여 밝다. 짧은 산기슭 앞머리에서 절[寺]의 현판을 보고, 배를 옆 언덕에 가로 대고는 여울[灘] 이름을 묻는다. 외로운 마을 어디에서 쓸쓸히 피리를 부는가, 타향에서 병들어 있는 사람의 심정은 괴로워지기 쉬운데.” 하였다.
【사묘】 사직단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덕봉산(德峯山)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안인폐현(安仁廢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난산현(蘭山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보주(甫州)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하였다. 지금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 고림부곡(高林部曲)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용궁현(龍宮縣)의 북촌(北村)에 넘어 들어가 있다. 효천부곡(孝川部曲) 군의 남쪽 18리에 있다. 보진부곡(寶進部曲) 다인현(多仁縣)의 남쪽 27리에 있다. 동로평소(冬老坪所) 군의 북쪽 53리에 있다. 작성(鵲城) 둘레가 6백 10척이다. 지금은 폐성(廢城)이다. 서쪽에 석문(石門)이 있는데, 높이가 11척, 넓이가 12척이다. 삼면(三面)은 암석(巖石)이다.
【명환】 고려 조운흘(趙云仡). 본조 전백영(全伯英)ㆍ김겸(金謙)ㆍ안성(安省), 이혜(李惠) 일찍이 지보주(知甫州)를 지냈고, 시(詩)로 유명하였다. 이백겸(李伯謙)ㆍ윤기견(尹起畎)ㆍ김인민(金仁民)ㆍ정종소(鄭從韶). 『신증』 박한주(朴漢柱) 정사는 잘 되고 다스림은 태평하였으며,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심복(心服)하였다.
【인물】 고려 임민비(林民庇) 의종 조(毅宗朝)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중서 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정승이 되어 의젓하여 옛 풍모가 있었으며, 착한 이를 좋아하고, 급한 것을 구제하며, 확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비록 무부(武夫)와 사나운 졸병이라도 또한 그를 존경할 줄 알았다. 73세에 치사(致仕)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임종비(林宗庇) 사륙체(四六體)의 문사(文詞)에 재주가 있었다. 임춘(林椿) 종비(宗庇)의 종자(從子)이다. 의종(毅宗) 때의 사람인데 문장(文章)으로써 세상에 드날렸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정중부(鄭仲夫)의 난(亂) 때에 온 집안이 화(禍)를 만났으나, 춘은 몸을 빼어 탈주하여 겨우 화를 면하였으나, 끝내 곤중하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호(號)를 서하선생(西河先生)이라고 한다. 문집(文集)이 있어서 세상에 전하고 있다. ○ 《고려사(高麗史)》에, “서하(西河)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다. 임지한(林支漢) 원종(元宗) 때에 본군의 아전으로서 동도(東都)의 배반한 장수 최종(崔宗)ㆍ최적(崔積)ㆍ최사(崔思) 등의 정벌에 종군(從軍)하여 공이 있었다. 벼슬로써 상을 주려고 하니 임지한이 사양하고, 상주(尙州) 관내의 다인현(多仁縣)을 본군에 이속(移屬)시켜 주기를 청하여 원종이 허락하였다. 임유정(林惟正) 급제하여 벼슬이 좨주(祭酒)에 이르렀다. 옛 사람의 글귀를 모아서 새로 시(詩)를 만드는 일에 능숙하였다. 《백가의집(百家衣集)》이라는 저서가 있다.본조 권맹손(權孟孫)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제평(齊平)이다. 윤상(尹祥) 현(縣)의 아전으로서 급제하였다.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16년간이나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었으며, 벼슬이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나이 78세가 되어서 고향에 퇴로(退老)하니, 배우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83세에 졸(卒)하였으며 근대(近代)에 가장 뛰어난 유학(儒學)의 스승이었다.
【유우】 본조 조용(趙庸) 홍무(洪武) 임신년에 여기에서 귀양살이하였다. 자세한 것은 진보현(眞寶縣)에 나온다.
【효자】 본조 임즐(林騭) 벼슬이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아버지를 위하여 3년 동안을 여묘(廬墓)살이하면서 웃는 일이 없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김뉴(金忸) 그의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그가 어렸기 때문에 상주노릇을 못하였더니, 장성하여서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을 여묘살이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계속하여 또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가각고 녹사(架閣庫錄事)에 임명하였다. 반유(潘濡) 아버지를 위하여 3년간 여묘살이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권절산(權節山) 어머니를 위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윤혁(尹奕) 군(郡)의 아전이다. 부모를 봉양하는데 집이 비록 가난하였으나 일찍이 술과 고기가 떨어진 일이 없었다. 부모가 죽으니 슬퍼함이 예(禮)를 넘게 하였는데,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노순(盧珣) 진사(進士)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조부 진(珍)에게서 길러졌다. 진이 나이 60에 어머니를 위하여 여묘살이하다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 순이 약을 받드는데 반드시 먼저 맛보며,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제 몸이 대신 죽기를 구(求)하였다. 조부의 똥을 맛보아 쓰더니[苦] 병이 과연 나았다고 한다.
【열녀】 권씨(權氏) 안동(安東) 권계생(權啓生)의 딸이다. 20세 때에 그의 남편 송효종(宋孝從)이 죽으니, 몸소 흙을 져다가 집의 북쪽에 장사지내고, 5세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아침저녁으로 무덤 곁을 떠나지 않은 채 3년을 마쳤다. 하루는 범이 아들을 잡아가니 권씨는 왼손으로 아들을 붙들고, 오른손으로 범에게 항거하며 말하기를, “하늘이여, 아는 것이 있거든 빌건대 굽어 살피소서.” 하니 범이 곧 버리고 갔다고 한다.
【제영】 십리상마우로심(十里桑麻雨露深) 윤상(尹祥)의 시에, “천 길 산성에는 운연(雲煙)이 오랬고, 십리 들 뽕나무와 삼[麻] 대에는 비와 이슬이 깊구나.” 하였다. 문전화류격평천(門前花柳隔平川) 이거인(李居仁)의 시에, “문 앞의 버들과 꽃은 평평한 냇물을 격했고, 발 밖의 소나무 가득한 봉우리는 푸르름이 하늘에 닿았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다인(多仁) 용궁(龍宮) 동남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군(郡)과는 남쪽으로 45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의 달이(達已)인데 다이(多已)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에 다인(多仁)으로 고쳐 상주(尙州)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이에 속한 후 본군에 내속하였다. ○ 읍호는 인양(仁陽)이다.
【방면】 동읍내(東邑內)ㆍ남읍내(南邑內)ㆍ서읍내(西邑內)ㆍ북읍내(北邑內) 모두 끝이 10리이다. 신당(神堂)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보문(普門) 동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음산(陰山)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뇌택(雷澤)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신당명(神堂鳴)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위라곡(位羅谷) 위와 같다. 개포리(開浦里)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유등천(柳等川)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당동(堂洞)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지서아(只西牙)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제곡(諸谷)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유리동(流里洞) 위와 같다. 화북(花北)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80리이다. 동로소(冬老所) 서북쪽으로 끝이 90리이다. 위의 두 면은 서북쪽으로 쑥 들어갔는데, 동쪽은 풍기(豐基)의 상리(上里)와 하리(下里) 두 면이다. 화북면(花北面)의 서랑(西郞)과 상주(尙州)의 산양(山陽)ㆍ산동(山東)ㆍ산서(山西)ㆍ산북(山北)의 네 면은, 동로소의 갈라진 곳과 경계하고 있다. 서쪽은 문경(聞慶)의 신북면(身北面) 경계에 접하여 있고, 북쪽은 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풍기(豐基)가 교차하는 곳에 접하여 있다. 현내(縣內)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현서(縣西) 남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10리이다. 현남(縣南) 위와 같다. 현동(縣東)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위의 네 면은 다인(多仁) 고현(古縣)의 땅이다. 동쪽은 안동의 풍남면(豐南面), 의성(義城)의 우곡면(羽谷面), 비안(比安)의 정서면(定西面)과 접해 있으며, 남쪽은 상주의 중동면(中東面), 용궁(龍宮)의 내하(內下)ㆍ남하(南下) 양면(兩面)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동현(同縣)의 중상(中上)ㆍ중하(中下) 양면과 접해 있다. ○ 고림부곡은 용궁(龍宮)의 북쪽 경계에 넘어들어갔으며, 군은 서로 20리 떨어져 있다. 효천부곡은 남쪽으로 18리이다. 보진부곡은 남쪽으로 27리이다.
【성곽】 작성(鵲城) 작성산 위에 있고 둘레는 6백 10척이다. 서쪽에는 석문(石門)이 있으며, 삼면은 모두 암석(巖石)이다. 고성(姑城) 안인(安仁) 고현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현창(縣倉) 다인(多仁) 고현이다. 갈평창(葛平倉) 서북쪽으로 40리이다. 산창(山倉) 문경(聞慶) 조령산성(鳥嶺山城)에 있다.
【진도】 현창진(縣倉津)
【토산】 뽕[桑]ㆍ석이버섯[石蕈]
【누정】 용두정(龍頭亭)ㆍ읍호정(揖湖亭)
【사원】 정산서원(鼎山書院) 광해(光海) 임자년에 건립하고 숙종(肅宗)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편에 보라. 조목(趙穆) 자(字)는 사경(士敬)이고 호는 월천(月川)이며, 횡성(橫城) 사람으로 벼슬은 공조 참판이다.
醴泉郡
東至安東府界二十二里,至豐基郡界三十四里。南至龍宮縣界二十一里。西至同縣界三十三里。北至忠淸道丹陽郡界七十里。距京都四百九十八里。
建置沿革
本新羅水酒縣。景德王改今名
爲郡。高麗初改甫州,顯宗屬安東府。明宗二年,藏太子胎,改基陽,陞爲縣令。神宗時,南道招討使崔光義與東京賊戰于縣地,大捷,陞知甫州事。本朝太宗十三年,例改爲甫州郡。十六年復今名。
屬縣 多仁縣。本新羅達已縣,或云多已。景德王改今名,屬尙州。高麗時來屬。在郡西南四十里。越入龍宮東村。別號仁陽。
官員 郡守,訓導。各一人。
郡名
水酒,甫州,基陽,淸河,襄陽。
姓氏
本郡 林,尹,權。權,本昕氏。高麗神宗元年,避明宗諱,改賜權。許,李。竝來。黃,邦。竝村。
多仁 黃,崔,張,睦。一作“陸”。羅,白。竝來。
寶進 明。孝川同。崔,金。竝續。
僐川 尹。連川、熊川同。
金川 沈。
于爾谷 太。
高林 金,黃。竝續。
冬老 金,林。竝續。
風俗
俗尙平易。觀風案。
閭閻無薄俗。李之剛詩。
形勝
東西介于二嶺。尹祥記。
山川
德逢山。在郡西三里。鎭山。山上有黑鷹城。
西菴山。在郡西八里。
飛鳳山。在多仁縣南。距郡南三十五里。
龍門山。在郡北三十二里。世傳新羅高
僧杜雲入此山,結草菴而居。高麗太祖嘗南征,過此聞雲名,入洞尋訪,至洞口忽見龍在巖上,因號龍門山。
普門山。在郡東三十四里。
鵲城山。在郡北七十五里。
下駕山。在郡東三十一里。
南川。在郡南一里。
沙川。在郡東十四里。榮川郡臨川下流。
襄川。在郡南一里。其源出豐基郡鳴鳳山,至郡南十二里,入于沙川。
大谷灘,在多仁縣東九里。船倉津。在縣東三里。○二水詳見龍宮縣。
紅蓮池。在多仁縣。距郡東六十里。
〔新增〕 鼎蓋山。在郡東六里。
歸毛峴。在郡東十里。
大旨池。在郡西八里。
土産
鐵,出多仁縣東大谷灘。紫草,莞草,銀口魚,
鯽魚,蜂蜜,松蕈,人參,白花蛇,五味子,海松子,楮,雪綿。
城郭
德峯山城。石築。周四千八十尺,高十尺六寸。內有二井、一池。有軍倉。
烽燧
西菴山烽燧。東應安東府豐山縣所山,西應龍宮縣龍飛山。
所伊山烽燧。在多仁縣。東應比安縣大巖山,西應龍宮縣龍飛山。
宮室
客館。尹祥記:“凡州郡館舍之設,所以待使臣宣王化,以備行禮之所,雖十室之邑,不可廢也。醴泉爲郡,東西介于竹、草二嶺。自竹而之商洛,由草而達花山者,必經由是邑,使華之巡遊,行旅之往來,殆無虛日矣。其館隘陋,不與邑相稱。歲己未,完山李侯知命出宰是邑,視事三載,政通人和。乃謀
諸邑人,報于監司,不煩農工,遊手是役。階序峻壯,可以袪炎暑之濕;軒楹敞豁,足以備揖讓之位。涼燠異所,文質得宜,李侯爲政,可謂知所急而亦不踰制矣。興役而不勞民力,仁之施也;優使臣以尊王命,敬之大也。具仁與敬,守令之職盡矣。醴,吾桑梓鄕也。李侯之政,余所悉知。故聊書終始云耳。”
樓亭
快賓樓。在客館東。○徐居正詩:“襄陽樓上晩風寒,簾捲靑山獨倚闌。竹嶺天低瞻北斗,花山路出接東關。豪吟轉覺江湖窄,大醉從敎宇宙寬。可笑功名思爛熟,不知身世是槐安。” 〔新增〕 李宜茂記:“歲辛酉,予與李鐵城深源、李星山子固、黃南原實之奉使徙民分道于嶺南,將抵安東,路由醴泉,經宿于客館東軒。軒之東北隅,有樓舊基,方欲刱新,鳩材孱功而未就也。問其名,則快賓也,問其未就,則曰太守閔侯以事見遞未就也。徘徊周覽,悵然者久之,以爲斯樓之未就,亦吾輩斯行之一不快也。自此
歷抵列郡,見列郡之雄樓傑閣,則每以斯樓爲恨也。旣而聞尹侯來莅于玆首謀所以成就之,私自喜幸,又以爲果一登覽以快吾行與否耶。未數月,深源自慶,子固自晉,實之自尙,各竣事俱會于斯,則所謂快賓者巋然煥然,若不日而成也。吾輩相賀曰:‘尹侯之此擧,如此其神且速也,不賢而能之乎?古人於一事之修擧而遠且大者從可策也,可不謂賢乎?’ 遂相與登樓四望,則高山聳後,大川經前,閭閻四布,平岡斷壟,擁衛周遭,彷彿若別一洞天,亦斯樓之勝槪也。俄而開宴置酒,共飮以落之。左右獻酬,盃盤交錯,絲竹間作,迭起爲舞,怡怡愉愉,情景陶然,不知誰主誰賓,怳然若登鈞天聞廣樂而不覺蹈舞之不足也。嘗聞樓臺之設,非直爲景物役也,將以道宣堙鬱。時出而遊觀之,以節勞逸,則亦爲政者之所不可廢也。況侯之此擧,卽其舊而張大之,無墜前功,無侈後觀,不規規於事爲之末,而人自快於登覽觴詠之餘。則吾輩
之落成於樓者,非徒吾輩之幸,抑亦斯邑之大幸也。侯嘗累佩銅章,咸著聲績,龔、黃蓋易之也。今之來豈徒然哉?儻能由此而推之,凡所以修擧廢墜者,無一不出於遠且大者。使斯民自得於仰事俯育之間,鼓舞於仁風和氣之中,則人之快足於心者,獨賓乎?主乎?抑斯民乎?吾不知所輕重矣。忝預宴席,重侯之請,姑書始末以歸之。侯諱壽泉,字永灝,坡平望族也。” ○金宗直詩:“開盡玟瑰滯甫州,綠池靑嶂況高樓。點行衛士迷新部,索笑佳兒伴醉遊。蘇醒麥人山雨過,護持魚子水衣浮。塵埃半日偸閑處,快意何須萬戶留。” ○“桑麻楡柳藹平川,臥看襄陽半壁天。身是碧油幢下客,登樓懷抱更悠然。”
〔新增〕 燕賓樓。在客館東。
鄕射堂。在郡西二里。○權五福記:“嶺之南六十餘州,自高麗氏統三置爲一道,國家仍之,大爲人材、物産之府庫,而吾醴泉,其一也。然醴泉本新羅之水酒縣,自羅代迄今上下
數千載間,不知邑宰凡幾人,鄕大夫凡幾人,志古道而復古禮,能導民禮俗者,有幾人哉?邑宰以簿領爲急而未遑於施設,鄕大夫雖或有化俗之方,於一邑無所管。所謂雖善不尊,不尊人不信,識者病焉。我殿下卽位之戊申,令所在復立留鄕所,有座首別監焉。推年德高者,謂之座首,其次稱別監,糾管一鄕風俗,所員,府四人,郡三,縣二。吾鄕,郡也,尹侯季殷、權侯推爲別監,而吾家君爲座首。季殷氏卽尹提學祥之胤也。家世文獻,思導民禮俗,此鄕射堂之所由作也。堂合左右序、庖廚,凡二十間,鄕父老共出力,陶瓦鳩材,太守李公箴亦助以材。始攻於壬子,斷手於癸丑。董其役者,鄕人某與某也,執其事者,郡吏某與某也。去年秋,五福謁告省親金堂谷,鄕父老拉余於鄕射堂。酒半,尹侯執盞言曰:‘吾鄕之欲闢此堂,久矣。未卜其地,或欲撤北亭而堂之,悠悠郡議,蓋亦有年。一日屨及于郡治西二里許,丘荒榛莽之間,登高而望,得異
處焉。凡其與目接、與心謀者,無非勝境。群山擁翠,一溪瀉玉,林茂而竹脩,宅幽而勢阻,若天公地媼秘以待人。遂決意經營。堂旣成而子適來,可無一言以記?’ 余曰:‘凡題記之作,必得大手。今文章鉅公磊落相望而求之無有不可,如我襪線,顧何能爲?’ 侯固命之,余辭不獲,則曰:‘堂之設,豈徒然哉?古昔聖帝、明王躬行仁義以導民厚矣,猶以爲未也。又設鄕官以敎之,有若閭胥、族師、比長、黨正之屬,各掌其戒令、政事、屬民、讀法。春秋以禮會而飮射于州序,書其德行道藝,糾其過惡而勸戒之,風淳俗美,躋一世於仁義之域。今之留鄕所卽古黨正之遺意也。鄕有頑嚚自恣、不孝悌、不睦、不姻、不任恤者,此堂得以議之,吏有包藏姦慝憑假城社侵漁百姓者,此堂得以議之。推周官三物之敎,行汝南月朝之評,以勵一鄕之風俗者,亦莫不於堂焉。然則堂之所包者廣,而獨扁以射,何也?曰鄕射之禮,尙矣。孔子射於瞿相之圃,觀者如堵墻,使
揚觶而語曰:「幼壯孝悌,耆耋好禮,不從流俗,修身以俟死者,不在此位也?」 蓋去者半,處者半。又揚觶而語曰:「好學不倦,好禮不亂,耄期稱道不變者,不在此位也?」 蓋僅有存者一。揚觶之間,擧其善者而留之,則非其人者自退。此詩人所謂序賓以賢、以不侮者也,夫子所謂觀於鄕而知王道之易易者也。今國家率舊章崇禮敎,設鄕射之禮。夫射,一藝也,序賓、揚觶之禮擧,而一鄕之淑慝,可以旌別。此鄕父老之獨揭此爲扁,而勸戒之實,寓於其間也。然射當於壇,而今於堂,何也?曰射則於壇,而鄕賓之宿戒則在堂也。古者鄕先生,生而會於社,歿而祭於社。嗚呼!斯堂,其社矣。夫五福他日謝事,結社於此堂,春秋吉日,以鷄豚燕隨父老,更講飮射之禮焉。’”
學校
鄕校。在郡北一里。郡守金謙建。
驛院
通明驛。在郡東七里。
守山驛。在多仁縣。
芒峴院。在郡東二十里。
虎鳴院。在郡南十六里。
黃利院。在郡西五里。
牛頭院。在郡西二十里。
北院。在郡北七里。
毛峴院。在郡北十一里。
竹院。在多仁縣西二十二里。
光德院。在多仁縣東二十一里。
佛宇
龍門寺。在龍門山。高麗太祖爲杜雲而創。後明宗藏太子胎于寺之左峯,改號昌期寺。散騎常侍李知命爲記。○徐居正詩:“再到龍門寺,山深絶俗喧。上方僧榻靜,古壁佛燈熏。一道泉聲細,千峯月色分。居然發深省,聊復喪吾存。”
〔新增〕 大谷寺。在飛鳳山。○李奎報詩:“石路高低平不平,閑騎果下嚲鞭行。輕風靜掃煙光去,落月時兼曉色明。短麓前頭看寺榜,橫舟側畔問灘
名。孤村何處吹寒笛,抱疾他鄕易惱情。”
祠廟
社稷壇。在郡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德峯山。
厲壇。在郡北。
古跡
安仁廢縣。金富軾云:“本蘭山縣。景德王改今名,爲甫州領縣。今未詳。”
高林部曲。在郡西二十里。越入龍宮縣北村。
孝川部曲。在郡南十八里。
寶進部曲。在多仁縣南二十七里。
冬老坪所。在郡北五十三里。
鵲城。周六百十尺。今廢。城西有石門,高十一尺,廣十二尺,三面皆巖石。
名宦
高麗 趙云仡。
本朝 全伯英。
金謙。
安省。
李惠。嘗知甫州。有詩名。
李伯謙。
尹起畎。
金仁民。
鄭從韶。
〔新增〕 朴漢柱。政擧治平,吏畏民服。
人物
高麗 林民庇。毅宗朝擢第,官至同中書門下平章事。爲相,挺然有古風,好善周急,確實無華。故武夫、悍卒亦知景仰。年七十三致仕。諡文靖。
林宗庇。工於四六。
林椿。宗庇從子。毅宗時人。以文章鳴世,屢擧不第。鄭仲夫之亂,闔門遭禍,椿脫身僅免,卒窮夭而死。號西河先生,有集行於世。○《高麗史》云西河人,未知何據。
林支漢。元宗時,以本郡吏,從征東都叛將崔宗、崔積、崔思等,有功。欲賞以職,支漢辭,請以尙州管內多仁縣移屬本郡,元宗許之。
林惟正。登第,官至祭酒。工於集句,有《百家衣集》。
本朝 權孟孫。登第,官至
藝文館大提學。諡齊平。
尹祥。以縣吏登第。學問精深,誨人不倦。長成均凡十有六年,官至藝文館提學。年七十八,退老于鄕,學者雲集,八十三卒。近代師儒之最。
流寓
本朝 趙庸。洪武壬申謫居。詳眞寶縣。
孝子
本朝 林騭。仕至監察。爲父居廬三年,未嘗見齒。事聞旌閭。
金忸。其父早死,以幼未得行喪。及壯母歿,廬墓三年,爲父仍居三年。事聞,拜架閣庫錄事。
潘濡。爲父居廬三年。事聞旌閭。
權節山。爲母居廬三年。事聞旌閭。
尹奕。郡吏也。養父母,家雖貧,未嘗闕酒肉。及歿,哀毁踰禮。事聞旌閭。
盧珣。進士也。少失父,鞠於其祖珍。珍年六十,居母廬,罹疾幾死。珣奉藥先嘗,禱於北辰,求以身代。嘗糞味苦,疾果愈。
烈女
權氏。安東權啓生女。年二十,其夫宋孝從死,親自負土,葬於家
北,率五歲兒,朝夕不離墓側,終三年。一日有虎,攬子而去,權氏左手扶子,右手拒虎呼曰:“皇天有知,乞賜照臨。” 虎乃棄去。
題詠
十里桑麻雨露深。尹祥詩:“千尋山郭雲煙老,云云。”
門前花柳隔平川。李居仁詩:“云云。簾外松巒翠接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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