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함에
그러니까 꼭 68년 전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중앙일보에서 언젠가 연재된 시리즈가 생각나서 오늘, 7월 31일 소사를 훑어봤더니 생텍쥐페리라는 금세기 최고의 로맨티스트가 사라진 날이네요. 생텍쥐페리에 심취해서 프랑스어를 배우려고 수선을 떤 것도, 여학생하고 데이트 갈 때면 꼭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들고 가던 추억도 아슴하네요. 영어판이라도 들고 가야 폼이 날까 해서 어렵게 구해서 다닌 걸 지금 생각해도 영낙없이 꼴값 떨었던 거지요. 흐흐 뒷주머니에 읽지도 못하는 타임즈를 꼽고 다닌 적도 있는 철없는 청춘이었다는 걸 밝힙니다. *****************************************************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30분, 코르시카섬(나폴레 옹이 태어난곳), 미 공군기지를 이륙한 생텍쥐페리가 정찰기와 함께 실종된 날이랍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전시라 조종사로 참전한 탓이지요. 생텍쥐페리라 하시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기도하지만 사랑하는 애기(愛機) 를 몰고서 행방불명이 되어서 더욱 유명해진 분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딘처럼 말예요. 불후의 스타가 되려면 행방불명이 되는 게 제일 간단합니다. 제임스 딘도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날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도록 어디에 살아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곤 했잖아요.
조종사 출신인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인이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자랑할 정도로 로맨틱하고 유려한 필체로 우리나라에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지요. 그의 작품 '남방우편', '야간비행'과 '어린왕자'에는 비행기가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하지요.
생텍쥐페리, 캄캄한 밤하늘을 비행하는 고독한 조종사가 내려다보는 세상은 어떨까요? 야간 비행 중에 계기판의 불빛만이 희미한 조종석에서 세상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고독한 휴머니스트라 부르는 게 어울리지 않겠어요? 어린왕자 하면 떠오르는 그림, 생각나세요? 어린왕자를 꺼내노라니 어느새 지루한 삶에 지친 제게 속삭이듯 다가오는 휴머니스트를 만났던 여름밤을 떠오르네요! 한 여름 밤의 꿈이랄까, 그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지요.
은하수, 망망대해에 펼쳐진 안개꽃처럼 신비한 어린 날의 꿈이 기억나나요? 매캐한 모깃불 피워놓고 들마루에 누워서, 이럴 땐 할머니의 무릎을 배개 삼아 누워야 제 맛이 나지요. 갓 쪄낸 옥수수든가 감자를 먹으면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얼마나 신비로웠는지. 참 이상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름밤을 보낸 우리나라에 천문학자가 숱하게 나와야 하는데 말예요. 은하수가 장관을 이루며 동쪽 하늘에서 서쪽으로 끝없이 흘러가더이다. 금방이라도 은하수가 쏟아질 것 같아 ‘으이크~’ 하고 벌떡 일어나면 할매는 물에 젖을까봐 손자를 부등켜 안아 주시며 말씀하셨네요. "내 귀여운 손주 개똥아! 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은하수를 다 껴안을 듯이 두 팔을 펴렴. 크고도 너른 하늘을 다 안을 것 같이. 머스마는 그렇게 꿈이 커야한단다"
하지만 다큰 어른이 되어서 이 손주는 꿈도 쪼그라들곤 깊은 밤 은하수를 바라볼 뿐이랍니다.
정말이지 그때는 은하수에는 배를 젓는 사공이 옥토끼라는 걸 믿었다니까요. 설핏 잠이 들었을까, 할매도 이야기를 멈추고 별자리 끝을 멍하니 쳐다보시던 모습이 새삼 떠오르네요. 일찍이 세상을 뜨신 할배를 생각하셨을 테지요.
이제는 별자리도 까맣게 잊어버린 무심한 사내가 되어 아파트 앞 공터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적막한 밤입니다. 왠 일이람, 생텍쥐페리가 불현듯 기억이 난 건. 그래서인가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봤지요. ‘니가 사는 서울에도 밤하늘에 별이 보이던가?’ 하고 물으시면 대답하기 무척 곤란해요. 키 자랑하느라 높이 뽑아 올린 아파트랑 빌딩 때문에 겨우 그 틈새, 자투리에 삐꿈 내민 하늘이 무슨 정취가 있으려고요.
밤 12시가 넘어도 운동하느라 땀을 흠뻑 흘리면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와 저처럼 똥배 나온 아저씨 몇 사람으로 분주한 풍경 속으로 우리 벗님네들을 초대할까요. 저와 함께 은하수나 찾아보자고요. 아! 눈부신 은하수와 은하수를 저어가던 나룻배는 어디 있나요? 모기불의 매캐한 내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올려보던 여름밤, 밤바다를 해쳐가던 은하수의 외로운 뱃사공은 지금 어디 갔나요? 늙어 은퇴했다구요? 그럼 외동딸 처녀뱃사공이라도 있을 법한데.... ***********************************
이렇게 캄캄한 밤하늘에 희미하지만 먼데서 무슨 소리인가 들려오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모터소리인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면서 비행기에서 나온 소리라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 맙소사 쌍발기 날개가 쇳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구닥다리 정찰기 한 대를 보다니... 나지막하니 비행하느라 코쟁이 프랑스 조종사가 씨익 미소를 짓는 것까지 보일정도로 다가온다. 사라졌다는 생텍쥐페리가 붉은 머플러를 멋스레 나풀거리며 알 수 없는 머언 하늘을 향해 야간 비행을 하는 게 아닌가? 영원한 휴머니스트가 날아가고자 하는 그곳은 어디일까? 그는 아직 착륙할 곳을 찾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캄캄한 밤하늘을 정처 없이 날아가고 있는 걸까? 깊은 어둠 속에 깜박이는 계기판을 노려보는 단조로운 야간 비행을 하다가 조종석 위로 펼쳐진 은하수에 홀려 그만 길을 잃어버린 외로운 로맨티스트가 이곳까지 날아 왔나 보네.
"왜 술을 마셔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잊기 위해서지." 술꾼이 대답했다.
"무엇을 잊기 위해서요?" 어린 왕자는 술꾼이 불쌍해져서 물었다.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서지." 머리를 숙이며 비밀을 고백하듯 술꾼이 대답했다.
"뭐가 부끄럽다는 거지요?" 술꾼을 위로해 줄 생각으로 어린 왕자가 다시 물었다.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이렇게 말하고 술꾼은 침묵을 지켰다.
오늘도 건너편 대림상가 '사또 치킨'에는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서 술을 마시는 주당들이 있겠지? 생텍쥐페리를 기억 하다가 별 생각을 다 하는군...그래,
어린왕자를 처음으로 만나던 때는 아마 시답잖게 연애하던 때였지.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마침내 네 시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돼. 그런데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을 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참 좋은 시절이었지. 2층에 자리한 다방에 앉아서 성냥 쌓기를 하며 기다리던 그 때, 삐걱거리며 올라오던 발자국 소리, 다방문을 밀치며 들어서는 인기척마다 고개를 돌려 보다가 종내에는 번잡한 큰 길을 건너오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듣는다.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오던 하이힐 소리에도 목을 스윽 내밀며 조마조마하던 내 심장의 고동을 어찌 잊을까!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에서)
애타게 그 사람을 마음에 담았던 "그리움"과 "기다림"이 이처럼 나를 키운 셈이고 또한 달콤한 추억으로 데려온 걸 거야. ************************
후덥지근한 한 낮의 더위를 식히는 선들바람이 불어오는 밤은 고적했습니다. 알싸했던 첫 사랑과 어린 왕자를 떠올리며 내 잃어버린 순수가 날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하네요. 생텍쥐페리가 조종하는 비행기는 어느새 저만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홀로 남은 깊은 밤, 내 꿈과 순수를 일깨운 탓에 씁쓸해 하는 중년의 사내만 남았습니다.
"넌 네 삶에 지쳐있는 것 같아. 그런데도 용케 이곳까지 끌고 왔구나, 이리도 힘들게 너를 버티게 한 그 무엇이 무언지................................................넌 아니?"
희망도 꿈도 왠지 아득하기만 한 내게 다가와 어린왕자가 한 말은 바로 이 말이었지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What makes the desert beautiful," said the little prince, "is that somewhere it hides a well...."
어떠세요? 시원한 오이냉채를 마신 거 같이 시원하지 않으세요? 아니, 어린 왕자를 주제로 한 냉채를 꺼~억 한 사발 마시고 여름 잘 나세요.
우리 정겨운 벗님네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