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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새로운 물건들이 넘쳐나는 환경에 살고 있으면서,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을 줄이고 최소한의 물건들로만 살아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을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디자인이나 기능 등이 새롭다는 이유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물건들을 구입하곤 한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렇듯 물건에 대한 욕구는 많든 적든 많은 이들에게 그것을 소유하는 잠시 동안이라도 만족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뜻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표현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에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버리거나 소유하지 않고, 최소한의 물건으로만 살아가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른바 ‘미니멀리스트’로 자처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물건들을 지니고 살면서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물건들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랫동안 몸에 익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 습관을 어떻게 들이는가에 따라서,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면서, ‘다다익선’이 아닌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소소익선(少少益善)’을 추구하는 저자들의 경험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책의 부제도 ‘미니멀리스트 단순한 진심의 소소익선 에세이’라고 붙였는데,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미니멀리스트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일단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기 위해서 삶의 방식들을 고민하고, 작은 공간에서 살려면 불기피하게 선택했던 방식이 바로 미니멀리즘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가고, 이제는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삶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라고 자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학에서 만나 지금까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두 사람의 저자는 서로 뜻이 잘 맞아 외국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배운 손으로 노트를 만드는 ‘북바인딩’을 배우고, 그것을 생업으로 삼아 서울을 떠나 강원도 동해에 정착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전혀 연고가 없었던 지역을 선택하면서 가족들을 비롯한 주위의 우려와 반대가 적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공방을 운영하면서 7년째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때 단독주택을 임대해서 방 하나를 게스트하우스로 꾸며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8평 원룸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즐기며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동해라는 도시는 내가 과거에 직장 때문에 8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저자들이 소개하는 그곳에서의 생활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저자들의 진심어린 생각들이 이 책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저자들은 ‘무엇이 되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고, 무엇을 해야 해서 억지로 하지도 않았다’고 강조하면서, ‘그저 마음의 소리를 따라 몸과 마음이 편안한 쪽으로 흘러왔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우리 삶에 필요한 물건뿐 아니라 마음을 짓누르는 과거의 기억, 어찌할 수 없는 타인의 시선, 걷잡을 수 없는 복잡한 생각들을 덜어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알맹이만 남길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을 터이지만, 저자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는 현재의 삶에 익숙하도록 만들어갔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는 늘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미니멀리즘이라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에 맞는 삶의 형태를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삶이라 할 수 있고, 이 책의 저자들은 그것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뿐이라고 여겨진다. 나 자신은 여전히 책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최소한의 물건을 소유하며 산다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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