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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대학>과 <중용>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에 의해 유가의 ‘경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후 조선에서는 그것이 성리학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려 말 유학의 한 분파인 성리학이 유입된 이후, 조선시대에는 지배 이념으로 자리를 잡아 막강한 위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특히 경전 해석에 있어 주희의 권위는 불가침의 영역이라 할 수 있었으며, 주희의 해석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곧바로 ‘학문을 어지럽히는 적’이라는 뜻의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공격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태도는 학문을 받아들이는 유연성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경직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유가의 경전으로 취급되는 <대학>과 <중용>은 사서(四書) 가운데 처음과 끝을 담당했다고 평가되었으며,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사서의 주해서들은 주자의 주석본을 따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최근 대만과 프랑스 등의 학자들에 의해 객관적인 해석을 시도한 책들이 적지 않게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중용>과 <대학>은 유가의 경전인 <예기(禮記)>에 속해 있었지만,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정이와 주희 등에 의해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하나의 독립된 경전으로 각각 분리되었다.
흔히 <대학>은 유가의 서적인 <소학>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사자 소학>으로 많이 알려진 <소학>은 일상생활의 규칙들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어, 어린 시절부터 유가의 규범을 익히기 위한 교재의 역할을 했다. 이에 비해 <대학>은 개인적 수양을 주 내용으로 하는 수신(修身)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인 치국(治國)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으로서의 삶의 방향과 교육의 목적을 추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지침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대학>이 당대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수신학(修身學)’ 교과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주자는 <대학>을 편집하면서, ‘경(經)’과 ‘전(傳)’으로 나누어 여기에 자신의 주석을 붙여 <대학장구>로 재편집했다. 이 책에서는 <대학>의 원문만을 제시하여 번역하고, 주희의 주석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학설들 가운데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해석들을 주석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유학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대체로 추상적인 개념 위주로 구성된 <대학>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대학>의 내용들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내용들이기에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함께 수록된 <중용> 역시 원문 위주로 번역되어 있으며, 다양한 학설들 가운데 합리적인 견해들을 주석을 통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중용’이라는 의미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라도 할 수 있다. ‘중용’이란 표현은 딱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중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도덕적 성격을 전제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유가의 경전인 <중용>의 구절들은 더욱 추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중용>은 전체 33장으로 이뤄졌는데, 그 내용은 유가의 철학적 배경을 가장 치밀하게 논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사서 가운데 가장 나중에 읽는 책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중용>의 구절들은 추상적으로 제시되어 있어 분량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텍스트이다.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중용>의 강독에 참여했지만, 다양한 해설서와 번역서들을 함께 보면서 그 개념과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경험이 있다.
비록 분량이 그리 많지 않지만, 이 두 권의 문헌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내공이 요구된다. 성리학의 기본 개념들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으며, 추상적인 개념들 역시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주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전히 <대학>과 <중용>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다만 또 한 번 새로운 마음으로 정독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다만 역자가 제시한 주석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고자 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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