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홀씨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위로 하얀 홀씨가 바람에 날아간다.
어디에 내려앉을 것인가 눈길이 따라갔지만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무나 무심코 밟고 다니는 길가의 척박한 땅이지만 양지바른 햇볕을 자양분으로 알고 구김살 없이 예쁘게 노란 꽃을 피운 민들레를 보면 둘째 네 생각이 난다.
한 때, 난 너를 평생을 내 품에 안고 살아가야 될지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넌 너무 말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 아이인가 오해도 받았지.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애미의 손길이 부족했던 탓이었을까.
의기소침하고 내 치맛자락 뒤에서 맴돌며 스스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소심한 울보였지.
어른들 말씀에 아이들도 제 위치를 안다고 하더니, 갑작스레 나빠진 집안 형편을 알았을까.
그렇게 징징대던 울보도 철이 들더라. 언니가 물려준 옷도 예쁘다며 좋아라했고, 동생에게 양보도 할 줄 알고 챙길 줄도 알고 조금씩 홀로서기를 시작하더구나.
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외국인이 살던 사원아파트에 이사를 했었지.
그 집은 난방이 온돌식이 아니고 공기만 데우는 입식 난방이라 방바닥이 너무 차가워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던 날,
넌 집안을 멋지게 장식을 하는 줄 알았는지 신나하면서 그 날 일기장에
'엄마와 언니와 셋이 방바닥에 깔 스티로폼을 사러갔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스티로폼이 날아갈 것 같았다.
스티로폼을 깔고 나니 방바닥이 몰랑몰랑 해서 참 좋았다'라고 썼더라.
난 그걸 보고 이런 건 부끄러운 일이니 앞으로는 쓰지 말라고 했었지.
그때는 어디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었던 때였기에 너의 순수한 마음까지도 나의 자존심 속에 묻어버리려 했던 것 같다.
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학교와 집만 오가다가
사회생활의 시작점인 대학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 환영회에 갔다 와서
"엄마, 손 닦으라고 나온 물수건을 보고 행주를 왜 이렇게 많이 주느냐니까
옆의 친구가 넌 외식을 한 번도 안 해 봤느냐 하더라“라면서 조잘대었지.
넌 웃자고 한 말이었겠지만 애미는 참 많이 미안 했었단다.
그때까지는 오로지 대학 교육비 저축에 신경 쓰느라 외식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단다.
눈치가 발바닥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순진했던 너에게 바깥세상의 사회 경험을 너무 시켜주지 않아 그런 말을 듣게 했나 싶어 많이 민망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이 아린다.
네가 서울로 떠나던 날, 아직 철부지 같은 네가 걱정이 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은 긴장된 모습으로 손을 흔들던 너에게
“밥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말고...”
미래를 위해 작은 두 날개에 안간힘을 쓰며 파다닥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더라. 빨간 열매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 참 예뻤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그 나무 아래에 노란 민들레가 피었고,
얼마 후 하얀 홀씨는 바람만 불면 하늘을 향해 날아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더라.
생면부지 낯선 타지에 발령받고 나서, 그곳 말씨가 달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며,
농촌생활에 적응이 힘들다며, 전화기 속에서 울먹이며 훌쩍이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터전에 뿌리를 내리려면 스스로 터득하고 힘을 길러야 될 일이지만, 무슨 말로 너의 답답함을 풀어 줄 수 있을까,
나름대로 겨우 생각해낸 말이 ‘배꼽 밑 단전에 힘을 모으고, 깊은 숨을 쉬고 나면 마음에 힘이 생길 것이다'
뿐이었다니 나도 참 주변머리 없는 엄마였지.
이제 보물 같은 너의 꿈나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니 대견스럽구나.
"엄마는 구제역 방지 현장에 나가고, '산불 조심' 모자 쓰고 등산화 신고 산불 캠페인도 나가요"라며
바쁜 너의 근황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동연이 말에 혼자 웃음 짓기도 했었는데,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니 세월이 참 빠르구나.
'아이들 공부 걱정은 부모의 욕심인가요'라는 고민은 너 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의 공통적인 마음일거야.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에게 참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더라.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아가는 길에는 참고 이겨야 하는 진통의 아픔도 있지만 감당해내는 성취감도 있단다.
오늘, 솜털이 보송보송한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포르르 날아가는 것을 보니 너를 보는 듯해서,
따뜻하고 포근한 자리에 내려앉으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 주었단다.
푸른 오월 가정의 달에 엄마가
첫댓글 정 선생님. 인간미가 듬뿍있는 글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