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창고외 / 김인갑 / 가시박외 / 박성진 / 애지 신인문학상 당선작
황혼창고 외
김인갑
대체로 호로자식이었다 동네 버려진 창고마다 바지 안쪽에 식칼을 넣은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사내들을 만나러 온 동네
계집들은 식칼에 잘린 손가락 피를 빨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손가락이 없어 팔목을 잘린 아랫마을 끝순이, 사내를 만
나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뭉툭한 손목을 꼬아 황혼을 안고 사라졌다 비 오는 밤이면 알전구 아래 둘러앉은 계집들이 솜이
불 위에 잘린 손가락을 던지면서 낄낄 댔다 밖으로 새나간 웃음소리가 동네 사람들 귀에 들리기라도 하는 밤이면 사람들
은 계집들의 윷놀이가 한창이라 여겼다 계집들은 손가락 피가 마른 순으로 오공본드를 발라주었다
십 년에 한번 꼴로 호로 자식 중 하나가 마을에 나타나곤 했다 그런 밤이면, 골목 어수룩한 벽마다 계집들의 혈흔이 담
쟁이넝쿨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손가락 없는 계집들의 손이 벽을 잡으려 애썼다 개 눈알을 낀 채, 황혼과 죽음만을
기억하는 가로등은 사내의 바지에서 탈옥한 식칼을 막지 못했다 식칼은 피맛을 되찾은 듯 빛을 냈다
창고에 남은 사내들이 던진 식칼 주위로 둘러앉아 낄낄대지만 죽음을 앞두고 나누는 담론은 날카로웠다 사내들은 식칼
더미 앞에서 맹세했다 이곳에서 나갈 때 그 동안 자른 계집들 손가락 개수만큼 황혼을 짊어지고 나가기로 했다 숫자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에 황혼을.
베르쿠치의 겨울
한겨울,
울란바토르 행 유베트촌에 도착,
카자흐족의 겨울을 따라 나섰네
눈 덮인 험준한 산등성이
족장 바이텔의 눈에
설원을 가로지르는 여우가 들어오네
젊은 베르쿠치*들 팔뚝에서
독수리들이 날아올라
도망치는 여우목덜미를 낚아채 몇 바퀴 구르네
발톱으로 비명을 짓누르고
힘 풀린 허벅살을 쪼고 물어뜯네
알타이아 겨울도 베르쿠치들에게 그러했네
발목 묶인 까마귀를 낚아채다
그물에 걸린 독수리로
여우를 사냥하는 카자흐족
유르트* 안, 일곱 살 사내아이 어깨에
독수리 한 마리가 얹혀진다
이제 아이도 베르쿠치라는 바이텔의 말에
궁지에 몰린 늑대가 되어
말에 탄 사람에게 달려들고 싶은 밤
눈 내린 겨울의 먼 발자국을 따라
낙타 등에 원정을 싣는 카자흐족
여우모피 가죽을 입고
독수리를 날려보내는 날
바이텔도 언젠가
자연의 팔뚝에서 날아올라
겨울과 공생하는 법을 낚아챌 것이네
알타이아에서 보낸 일주일,
극한의 바람과 호흡하는
야크의 습성을 익혔네
인적 드문 이국땅
비탈길에 쌓인 눈밭을 다시 찾아야겠네
깊은 겨울이 찍어 놓고 간
생존의 흔적을 따라
한 백년쯤 헤매어야겠네
*베르쿠치 - 독수리를 이용해서 여우나 늑대를 사냥하는 사람.
*유르트 - 나무기둥에 거적을 둘러싼 유목민의 이동식 주택.
간격
바다에 살면서
몸집이 크다 하여 지어진 이름
바다코끼리,
그에게는 누구보다 가지런한 이빨이 두개 있다
지붕 아래 열린
아이들 것의 고드름이나
밤을 쓸고 담는 환경미화원이
차에 매달린 모습이나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간 남자가
흔들어 댈 것 같은 철창이 그에게는 있다
그 희디흰 이빨을 보면서 나는
사람사이에도 저만큼에
간격이 있음을 안다
부딪히지 않고 맞물리지 않지만
때때로 힘을 합쳐 공복을 채우는 일,
남남처럼 지내다 위협을 느끼면
한 가지 무기로 변하는 그의 이빨,
탐스런 그의 이빨을 자꾸 보다 보면
죽음을 앞둔 사람과
산 사람의 간격도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닭
날고 싶다
새벽닭이 대낮에 우는 건
아마 날아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한 여름 밤,
날지 못하는 팔로
그래도 나는 척 이라도 하자고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친다
날듯 말듯 땅에 떨어지는 배드민턴공,
살다보면
착지가 곧 추락인 것들도 있다
격렬하게 배드민턴을 치고 나면
내 손에 닭의 주검 냄새가 베어나 있다
아직 새벽이 오지도 않았는데
닭이 우는 건
푸드득,
또 날고 싶은 마음이
새벽보다 먼저 찾아오기 때문이다
배드민턴공이 오래 날지 못하는 건
닭털로 만든 배드민턴공을 향해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 쫓아가지 않기 때문
어둠과 아침의 간격이
닭의 울음소리보다 짧기 때문이다
닭이 새벽녘에 불현듯
서럽게 우는 것은
날고 싶은 마음만 훌쩍,
어디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늘 운동회
전봇대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전깃줄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뒤꿈치로 금 밟은 구름을 못 본 척, 바람이 심판을 보고 있다 기차가 지나가면 전봇
대 줄에 앉은 새들이 파도처럼 날아간다 한쪽에서 전깃줄의 그림자로 줄넘기하는 아파트, 구름을 제치고 옆집 참새와 제
비가 공동 1등으로 도착 끈을 끊고 날아가는 그 아래, 아이가 문간방의 공간을 활보하고 있다
골목마다 소란스러움 들이
재재배배 재재배배 베어나는 봄날
하늘 운동장은 환호성들로 가득한데
아이는 빈방에 담겨
키가 닿지 않는 선반 위 운동화만 바라보고 있다
맨 마지막 주자인 해와 달의
계주가 끝나도록
운동회간 꼬까참새가 놀러오도록
달동네 기울어진 문간방 안,
선반 위 놓인 운동화에
눈을 떼지 못하는 그 아이
그 아이를 생각하는 밤이면,
새도 구름도 보이지 않는 그런 밤이면
현수막 그림자와 나는
오랫동안 줄넘기를 하곤 했다
선반에 손이 닿을 만큼
자란 그 아이를 생각하는 밤이면…
김인갑
1987년 전남 장성 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장학과 졸업,
제 23회 순천대학교 학술문학상 시 당선,
제 28회 황룡 학술문학상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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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박* 외
박성진
감나무 밑둥 휘감아
가지 하나 남김없이 덮어버린 것도 모자라
담장 위 허공마저 붙들 기세로 뻗어나가는
가시박, 아버지의 설움을 목 조르던
바로 그 푸른 끈이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의 아버지마저 공중에 매단
내일이 두려운 그림자였다
끊임없이 자라면서
그 노란 꽃잎 주둥이로 낄낄거리는
저 손톱, 내 목도 옥죄려나
발 뒷꿈치가 욱신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네 가닥으로 갈라진 줄기들 내몸 타고 올라
태양마저 삼켜버릴 것 같은 아찔한 저녁
젠장!
숨이 막힌다 둥글넓적한 그늘 속에 갇혀
샛노랗게 변해가는 나의 생들
다시 한 번 햇빛 내려쬐기 위해선
진절머리 나는 저 덩굴손들 걷어내야 하나
시지푸스가 굴렸다던 바위 으깰 듯 낫 휘둘러
가난 줄기들을 나의 집으로부터 뿌리째
뽑아버려야 하나
숨통이 차츰차츰 트여오는 감나무 아래
불살라지는 집안 내력들 더 이상
가시 박힌 까만 열매 맺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시박 : 박과의 덩굴 식물로 다른 식물들을 덮어 고사시킴으로써 식물계의 황소개구리라 별칭하기도 함.
태풍
성난 황소 한 마리가
이제 막
우리집을 덮쳤다
창문이 깨지고 화분이 엎어졌다
흙바람이 이나 싶더니
냄비며 바가지며 물통까지 방을 어지럽혔다
성난 기세 앞에서
우리집은 그저 들썩들썩 거릴 뿐
누가 이 집을 붉은 벽돌로 만들었을까
재차 달려오는 황소를 막아보려 해도
도무지 저 뿔을 감당할 수 없다
튼튼하던 제방도 둑도 모두 무너뜨리고
여기까지 달려온 황소 한 마리
서글서글한 눈망울도
느릿느릿 흔들리던 꼬리도 온데간데 없다
좁은 골방에서
넓은 목초지가 그리도 그리웠던가
있는 힘껏 달려오는 황소의 울음소리가
우~ 우~
나무와 나무 사이를 뒤흔들고 있다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내 몸도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무릎 속의 기상청
그는 오늘도 발이 시립다 한다
벌써 수 년 째다
누가 저 좁은 연골 속에
기압계라도 달아놓았나
몇 번을 주무르고 또 주물러도
아픔이 가시지 않다던 무릎은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하게
비를 부르곤 했다
비가 그치고
한층 더 넓어진 문틈을 본다
빡빡하게 열리던 현관문이
가벼운 몸짓으로 여닫히는 오후
저기 저 전깃줄도
그의 무릎을 닮아가는 것인가
축 늘어졌던 것이
어느 새 팽팽해졌다
다가가 주무르면 어느 새
참새 몇 마리 날아와 앉은 듯 삐걱대는 무릎 관절 위로
무지개 하나 떴을 법한
시원한 봄날
무릎 속 삐걱거림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홍시를 보며
단단했던
씨앗이 없다
껍질을 죄다 벗기고
알맹이를 훑어봐도
진득한 과즙만 떨어질 뿐
홍시는 그 어떤 것도
품고 있지 않았다
가슴에 품은 감씨라니!
누군가를 해할 마음 생겼다면
감나무 아래서
가을 바람 맞아보면 알 것이다
견고하게 굳었던 응어리도
느슨하게 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달디단 생으로 탈바꿈 할 수 있다는 것을
감나무에 내 몸 매달아
발갛게 익어가고 싶은 새벽녘
보름달도 제 속을 죄다 비워낸 것일까
가지 끝에 걸려 환하게 빛난다
학생
나는 학생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나는 여전히 학생이다
배워야 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 뿐이다
밥 짓는 것이며, 찌개를 끓였다가 다시 김치를 담그기도 하고
형광등을 갈다가 끊어진 전선을 있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망치질, 대패질, 사포질도 배우고
트럭이며 자동차, 봉고차 모는 법도 새롭게 알게 됐다
손이 가는 족족 또 다른 공부인 것이다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신분이다
사회라는 틀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학생이다
박성진
1985년 광주에서 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 대학 국어교육과 대학원 석사 졸업
2006년 제 22회 학술문학상 대상 수상
2011년 민들레문학상 장려상 수상
2012년 제 2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대상 수상
2012년 IT활용 체험수기 및 우수 프로그램 공모전 수기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