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향기가 났다
조회수 7,2402022. 08. 20. 11:01
▲ 영화 <헌트>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양기자의 영화영수증] <헌트> (Hunt, 2022)
글 : 양미르 에디터
※ 영화 <헌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이제 이정재가 '배우(심지어 네 편의 천만 영화에 출연한)'라는 수식어보다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더 익숙할 것 같았다.
아니, 한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헌트>는 최근 충무로 배우들의 감독 데뷔작 중 가장 강렬한 작품이었고, 2022년 여름 '텐트폴 시장'에서 흥행에 실패한 한국 영화의 몇몇 문제점을 타개할 수 있는 '힌트'가 될 작품이었다.
'흥행 제조기' 감독과 자신의 분량을 어느 정도 챙겨야 하는 '스타 캐스팅'만 믿고, 상대적으로 안일한 시나리오를 통해 무너져버린 영화들과 대비해 <헌트>는 철저히 다른 전략으로 나타났기 때문.
<헌트>의 주요 배경은 1983년의 제5공화국 시기로, 실제 사건을 각색한 '평행 세계'라 보면 될 것 같다.
안기부 해외팀 차장 '박평호'(이정재)는 군부 출신인 안기부 국내팀 차장 '김정도'(정우성)와 함께 미국 워싱턴 D.C.에서 대통령 경호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곳에서는 독재 정치에 반대하는 교민들의 시위가 있었는데, 1981년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정식 권력자로 인정받기 위해 워싱턴 D.C.를 방문했고, 이를 집중적으로 찬양하던 국내 언론과 달리, 재미교포들은 광주 학살 등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헌트>는 첫 장면부터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보여준 것.
대통령이 극장으로 이동할 때, 합동 경호를 수행하던 CIA는 외국인 저격수를 발견하고, 추격 도중 '김정도'는 '박평호'를 인질로 잡은 저격수를 사살한다.
'박평호'는 암살 사주의 배후를 알 수 없게 됐다고 '김정도'를 나무라지만, '김정도'는 오히려 인질이 되지 말았어야 한다며 질책한다.
<헌트>의 오프닝 타이틀 로고는 이 긴박한 순간에 등장한다.
'사냥감'과 '사냥꾼', 그리고 그 '사냥'을 이끈 사람들의 관계성을 묻는 오프닝 시퀀스였던 셈.
이후 영화는 안기부 내에 '동림'이라는 스파이가 잠입해, 기밀이 외부로 유출된 사건을 보여준다.
이 사건으로 '강무영'(송영창) 안기부장이 퇴임하고,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인 '안병기'(김종수)가 새롭게 안기부장으로 부임한다.
'김정도'는 '안 부장'을 등에 업고 안기부 내에 잠입한 '동림'의 색출을 위해 '박평호'가 이끄는 해외팀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다.
'박평호'도 역시 똑같은 지령을 '안 부장'에게 받았고, '박평호'의 부하 '방주경'(전혜진)은 '김정도'와 관련된 군납업체 '목성사'의 '최규상 사장'(유재명)을 고문해 뒤를 캐내려 한다.
'김정도'도 오른팔 '장철성'(허성태)을 내세워 '박평호'와 관계가 있던 대학생 '조유정'(고윤정)을 잡아, 고문을 진행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건에 파고들수록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마주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헌트>는 '동림'의 어원이 됐던 1967년 '동백림 사건', 1980년 '5.18 민주화운동'(사망하기 전까지 대통령이 부인했던 '헬기 사격'이 진행됐다는 내용이 대사에 등장한다), 1983년 '이웅평 귀순 사건'(황정민이 라면을 먹는 내용은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를 극화한 것), 그리고 그해 10월 일어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버마는 현재의 미얀마로, 영화는 태국 방콕으로 각색했다)를 인지하고 관람하면 좋은 작품이다.
왜냐면, 영화는 해당 역사를 알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확고히 드러나기 때문.
일례로, 미국의 평점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의 전문가 지수는 '썩은 토마토'인 55%(8월 18일 현재)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지 않고서, 두 주인공의 '급변하는 선택'을 보면 '의문 부호'를 남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
다른 목적으로 '사냥감'(대통령)을 노리는 두 '사냥꾼'의 이야기를 담았으나, 두 '사냥꾼'의 사냥 성공 여부는 '평행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맞춰져야 했다.
"만약, 그 테러로 사냥이 이뤄졌다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어떤 방식으로 변화되었을까?"
처음부터 재미교포들의 시위를 담아냈던 것을 떠올려 볼 때,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는 두 사람의 계획은 실패해야 했다.
영화에서 직접 사냥을 하는 걸 보여주면 '속은 시원할 수'는 있겠으나, 훗날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영화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담았음에도, 편향적이지 않은 선택지를 취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이정재 감독은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의 세대 갈등에서 변화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테러의 여파로 인해 '김정도'는 세상을 떠나고, '동림'이라는 정체가 노출된 '박평호'는 상황을 정리한 후 '조유정'을 만난다.
사실, '조유정'도 '박평호'를 감시하기 위한 북한의 간첩이었고,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조유정'은 선물을 준비한다.
옛정 때문에 '조유정'은 '박평호'를 직접 죽일 수 없었으나, 옆에 있던 동료 북한 공작원들이 '박평호'를 대신 처리한다.
'박평호'는 '조유정'에게 가명이 담긴 대한민국 여권('평호'와 성이 같은 '박은수'로 기재되어 있다)을 전달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나고, '조유정'은 같이 있던 공작원을 처리한 후 현장을 떠난다. (이는 이정재 감독이 직접 밝힌 사항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작품 중 <그랜 토리노>(2008년)를 생각하게 했다.
온건 보수주의자였던 노인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이 떠나고 난 이후, 미래 세대에게 남기는 처연하면서도 따스했던 모습(심지어 죽음까지도)이 그대로 연상됐기 때문.
'조유정'은 술자리에서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데 멍청해. 나쁜 놈(북한 정권)보다 더 나쁜 것은 나쁜 놈의 하수인('박평호')"라고 말했기에, 분명 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움직였으리라.
그래서 '박평호'는 본인이 이룰 수 없었던 미래를 '조유정'이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헌트>는 단순히 과거 시대에 대한 '팩션'을, 탄탄한 시나리오와 액션을 기반으로 한 끝내주는 재현에만 그치지 않았고, 나아가 '현재의 어른'이 '미래 세대'에게 "너는 다르게 살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다층의 메시지가 함께 세밀히 작동해 폭발하는 연출이, 감독 이정재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2022/08/09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헌트감독이정재출연이정재, 정우성, 전혜진, 허성태, 고윤정, 김종수, 정만식, 최민, 박윤희평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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