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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으로 자살한 신앙인에 대하여"
이 글을 쓴 이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어떤 분께서 매우 가까운 친구분이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셔서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메일을 보내셨다. 본인이 배운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자살자는 지옥에 간다고 배웠는데, 친구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셨다. 그러면서 제게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셔서, 제가 다음과 같이 답을 드렸다. 참고로 자살하신 친구분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핵심만 드린 답이지만, 이런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분들께 혹시 작은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기 답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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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4.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교리는, 초기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 한 이야기로 알고 있다. 그의 의견은, 성경처럼 영감을 받은 권위 있는 말씀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한 신학자의 의견이다.
5. 통상 자살자가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살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자살자가 자기를 살해했기에, 용서 받을 기회가 아예 원천적으로 박탈되었다는 논리이다(본인이 이미 죽었으므로 회개할 기회가 없기에)
6. 하지만 예수님은 자살자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 자살할 경우에 대해서 성경은 철저히 침묵을 지킨다.
7. 예수님이 나누신 죄의 기준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 두 가지이다. 예수님의 기준에 의하면, 원칙상 모든 죄는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살인죄도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훼방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여기서 성령훼방죄란 (아마도)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부정하는 것을 말하는 듯 한다.
8. 여기서 문제는, 자살한 친구가 본인의 목숨을 스스로 끊었으므로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친구는 살인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이 된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9. 하지만 친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곧 성령훼방죄를 지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살아생전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용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구의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의 기준에 딱 떨어지게 부합하는 경우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비단 그 친구 뿐 아니라, 비슷한 문제로 큰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10. 결국 우리가 고려해야 할 관건은, 우울증에 대한 지식과 판단에 기초할 수 밖에 없습니다.
통상 극심한 우울증은, 그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본인의 자유의지로 도저히 저항하거나 거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자살 충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친구분의 경우도, 본인의 자유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떤 강력한 충동에 의해 순간적으로 그런 무서운 일을 벌이셨을 것입니다.
11.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들의 경우, 뇌 신경계통의 이상이나 호르몬의 이상으로 그런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그분들의 경우 평소에도 늘 자살충동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12. 이렇게 육체의 특정한 이상과 한계 때문에, 본인의 자유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의 경우, 저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살하신 분이 평소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13. 만일 본인이 멀쩡한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예수님의 주되심과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부정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특별히 우울증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자살할 경우,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자녀들을 지옥으로 보내실 리가 만무하다고 봅니다.
14. 자살하신 분이 평소 건강하실 때, 즉 본인이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분명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는데, 어느날 나쁜 병에 걸려 자유의지를 따라 판단할 수 없어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고 해서 지옥에 보내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 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고인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활동할 때의 신앙을 기억하시는 분이시지, 그런 능력을 상실하거나 훼손당했을 때의 행동에 따라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15. 저는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를 넘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용납하심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라고 믿습니다.
16. 끝으로,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물론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 분이 불시에 떠나셔서 충격이 클 것이고 또 친구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관심 갖고 근심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한 인간의 가치와 고귀함은 비단 그가 사후에 천국에 갔느냐 지옥에 갔느냐는 문제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가 살아 생전 어떤 삶을 살았느냐와 더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즉 떠나신 친구분의 영원한 운명 못지 않게, 그 친구 분이 생전에 남긴 좋은 추억들, 삶의 자취들, 함께 했던 의미 있는 시간들을 반추해보시면서 그 친구분의 고귀함과 유일함을 가슴에 오랫동안 새기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7. 이 글의 첫 부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 답변은 어떤 권위를 가진 교리나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그저 한 개인의 의견일 뿐입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큰 상심에 빠져 있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제 소박한 마음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 글이 선생님의 마음에 더 큰 짐이나 고통이 되질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참된 위로와 영원한 소망의 하나님께서 고인의 가족들과 친우들께 인간의 인식 능력을 넘어서는 깊은 위로를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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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목사(도서출판 새물결플러스 대표)의 글
"우울증으로 자살한 신앙인에 대하여"를 읽고...
(1) 서론 두번째 문장 중 "... 친구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셨다."라는 글에 대하여...
•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1-22).
베드로는 예수님께 요한의 미래에 대해 여쭈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말고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데에만 집중할 것을 당부하셨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염려하며 우리는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한다. 나 자신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들을 간섭하고 염려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남 걱정 하지말고, 우리 자신의 일부터 먼저 잘 하라고 하신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3-34).
그리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운명(fate)'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섭리(Providenc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해야 옳을 일에 대해서 '이것은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매우 악한 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말도 완전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방해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방해를 받고 악이 성행할지언정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하에서 이루어지므로 언젠가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 3항.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에 대하여...
살인자(자살자도 포함)는 지옥에 간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φονεῦσιν, murderers)과 행음자들과 술객들(마법사)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계 22:15)
요한계시록 마지막 두 장에서 "살인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것이며 그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하며 "성밖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한다. 즉 새예루살렘 성(천국)밖이면 '지옥'을 뜻하며 둘째 사망은 심판 후의 지옥을 말한다. 즉 살인자들은 모두 지옥에 갈 것이라고 분명히 성경의 마지막 두 장에서 두번이나 반복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살인"과 "자살"을 다르게 본다. 자살은 살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한다. 다른 사람은 사람이고, 자기 자신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사람이 아니면 무엇인가? 짐승이란 말인가? 이런 자들을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고 명철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각이 없는 자"라고 말씀한다. 즉 지각이 없으므로 성경에 써 있는 말씀을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다.
•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נְבוֹנִ֖ים, understanding)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נְבוֹנִ֖ים, prudent)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사 5:21).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있고 또 자주 듣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이 그 말이 성경에 있는듯이 설교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말을 한다. 왜 그럴까? 이 말씀은 마태복음 16장26절에 기록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말씀을 줄여서 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살인하면 지옥에 가지만,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라면서 따라서 "자살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씀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자살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말씀이 성경에 없으므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지 않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말장난 하기를 즐기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3) 4항.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교리는, 초기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 한 이야기로 알고 있다. 그의 의견은, 성경처럼 영감을 받은 권위 있는 말씀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한 신학자의 의견이다"에 대하여...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교리는 성경에 기초한 것이다.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φθείρει, destroy)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φθείρει, destroy).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6-17)
고전 3장17절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φθείρει, destroy)"의 "더럽히다"와 그 뒤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φθείρει, destroy)"의 "멸하다"는 같은 단어(φθείρει 프데이레이)로 쓰였다. 즉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몸을 죽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죽이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몸을 죽이면(첫째 사망),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죽이실 것(둘째 사망)이란 말이다.
레위기 15장31절에는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내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 할찌니라", 또 민수기 19장20절에는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죽임을 당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전인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면 즉 죽이면 사형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난 사람이 갈 곳이 어디인가? 당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나라는 아니다.
또한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한 신학자의 의견"이 아니다.
•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주요 원천이라는 성경의 근본 명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예컨대 로마 사회의 견유학파나 스토아주의자들과 같이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면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상황에서 명예롭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강한 정신력을 지닌 것으로 인정하고 또 때로는 존경하기까지 하는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 욥과 같이 죽고 싶을 정도의 곤경과 억압의 상황에 처해서도 결코 스스로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되고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도성』1권
22-24절 참조).
•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자살은 하나님, 자신, 그리고 이웃을 향한 죄이다(아퀴나스, 『신학대전』2부의 2부 64문제 5절 참조).
• 자살은 생명의 권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악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죽음에 대한 준비를 명하시지만 그 때를 결정할 권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칼뱅, 삼상31:1-13 사울과 무기병에 관한 설교 참조).
• 자살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범한 결정이요, 불신의 행위요, 생명을 은혜의 선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칼 바르트,『교회교의학』3/4 “생명을 위한 자유” 참조).
(4) 5항. "통상 자살자가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살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자살자가 자기를 살해했기에, 용서 받을 기회가 아예 원천적으로 박탈되었다는 논리이다(본인이 이미 죽었으므로 회개할 기회가 없기에)"에 대하여...
이 문제는 사람들이 가장 말장난하기 좋아하는 부분이다. 만약 자살한 사람이 금방 죽지 않고 몇시간 동안 살아있을 경우, 또는 얼마간이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자살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자살한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회개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통상 말하는 '자살'은 그런 경우까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끊고 회개없이 죽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마지막날에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자살자가 죽기 전에 회개를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자살자가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용서 받을 기회가 박탈되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을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지만, 정말로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이 주인행세를 해왔던 것을 고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버리고 내가 주관하려고 한 것이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선택하는 행위이다. 겉으로는 바리새인처럼 종교인이 지켜야할 생활을 잘 해왔으므로 큰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진짜 믿음은 욥처럼 고통 속에서 증명되기 때문이다.
(5) 6항. "예수님은 자살자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 자살할 경우에 대해서 성경은 철저히 침묵을 지킨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살인자는 영원히 지옥에 간다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다(계 21:8, 22:15). 성경은, 생명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누구의 생명이건 자기 마음대로 해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주권을 빼앗은 반역자이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자살하는 경우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제자이며 사도로 임명을 받았던 가룟유다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신 후에 사도로 임명하신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살했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뻔 했다고 말씀하신 것을 공관복음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다. 천국에 갈 사람이라면 왜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이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하셨겠는가?
•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 막 14:21).
•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 22:22).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3).
특히 사도행전 1장25절에 기록된 말씀인 "...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에서 "제 곳으로 갔다"라는 것을 마태복음 27장3절의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로 보며, 주석가들은 이를 "지옥에 갔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주석가의 해석이 없더라도 어린아이들까지도 가룟유다는 지옥에 갔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자살하는 이들은 '자기애(自己愛)'가 크다. 오늘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매우 성행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들으면서 '자기애'를 더 키워간다. 그런데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는데, 주위에서 사랑을 받지 못할 때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더욱 좌절감만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노래를 불러주면 안 된다. 기독교의 교리는 이 노래와 정 반대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하라고 하셨다.
•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ἀρνησάσθω, let him deny)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μισεῖ, hate)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과 반대로 가르치는 일들로 인하여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도록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발생하고 있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갖고있는 모든 것을 부인하지만, 우리의 몸은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육체가 원하는 정욕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육체 안에 있는 생명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육체가 망가지면 죽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자,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강도만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강도 즉 살인자 마귀를 만나서 거의 죽게된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지 말고 그의 생명을 살리라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이웃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몸을 살인자인 사탄 때문에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매우 귀하게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귀한 생명까지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6-18).
(6) 8, 9항.
"여기서 문제는, 자살한 친구가 본인의 목숨을 스스로 끊었으므로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친구는 살인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이 된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9. 하지만 친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곧 성령훼방죄를 지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살아생전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용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구의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의 기준에 딱 떨어지게 부합하는 경우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비단 그 친구 뿐 아니라, 비슷한 문제로 큰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에 대하여...
다시 반복하지만, 계시록 21장 8절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 그러나 두려워하는(비겁한, 겁이 많은)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가증한, 가공할만한) 자들과 살인자들(murderers)과 행음자들(성적으로 타락한 자들)과 술객들(마법사)과 우상 숭배자들(idolaters)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liars)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지옥에 가는 죄의 항목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이런한 죄들은 성령훼방죄 안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지 않기 때문에 행하는 죄들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했다면, 이러한 일들을 행할 수 없고 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고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결코 자신의 목숨을 마치 내 목숨인 것처럼 아무렇게나 다룰 수 없다. 내가 갖고있는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께서 주관하시도록 나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제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갖고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주관하려고 하는 그 순간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을 비롯하여 내뜻대로 행하려는 것은, 나 자신이 우상이 되어있는 것이므로 여기에는 '우상숭배의 죄'라는 항목이 하나 더 붙게 되는 것이다.
(7) 11, 12 항.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들의 경우, 뇌 신경계통의 이상이나 호르몬의 이상으로 그런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그분들의 경우 평소에도 늘 자살충동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12. 이렇게 육체의 특정한 이상과 한계 때문에, 본인의 자유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의 경우, 저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살하신 분이 평소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에 대하여...
우울증과 믿음은 반비례한다. 믿음이 떨어지는 순간이 우울증이 상승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우울증이 깊다는 말은 믿음이 적거나 없다는 말이다.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두려움과 믿음"을 함께 말씀하셨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낙망하며 좌절하게 하여 믿음을 떨어뜨린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6).
•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have no faith)? 하시니(막 4:40)
•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그래서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3-5).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울하고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낙망하며 좌절하며 불안하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히려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입에서 찬송이 나오지 않는 순간은 이미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증명하는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늘 자살 충동을 겪고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우울증 환자들이 모두 자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특히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울증을 갖고있다고 한다. 때때로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수많은 인류가 우울증을 갖고있는데, 자살하는 사람보다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생명의 귀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생명이 왜 귀중할까?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또 "늘 자살충동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라고 했는데, 충동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의 마지막이 "절제(self-control)"이다.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에게 충동질을 하지 않으시며 절제와 인내하라고 하신다. 고통을 인내하지 못하며 감정적인 충동을 절재하지 못하는 상태는 이미 성령님이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인인가? 우리의 삶 속에서 수많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렇게 마귀가 넣어주는 충동질에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천국과 멀어지는 것이며 지옥과 가까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21장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며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항상 두려워하는 것과 믿음이 없는 것을 함께 묶어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해주는 것보다 믿음을 갖도록 기도해주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 순간의 기분만 올려준다고해서 해결되는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8) 13항. "만일 본인이 멀쩡한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예수님의 주되심과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부정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특별히 우울증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자살할 경우,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자녀들을 지옥으로 보내실 리가 만무하다고 봅니다"에 대하여...
"우울증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자살할 경우"라고 했는데, 우울증은 불가항력적인 병이 아니다. 우울증은 얼마든지 창조주 하나님, 치유의 하나님 안에서 치유될 수 있는 병이다. 장로교 교리 중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라는 것이 있다. 이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은혜"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백성이 되도록 이끌어가시는 그 은혜를 인간이 거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이 싫어하는데 억지로 끌고가시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져서 죽게 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끌고가야만 살릴 수 있기에 그를 살리기 위하여 끌고가는 것을 말한다. 이때 죽게 된 사람이 "왜 나를 끌고가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불가항력적 또는 거부할 수 없는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을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한다면, 누군가 그를 끌고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상황... 성령께서는 생명의 길로 이끌고 가시는 분이므로 성령이 아니면 악령이다. 즉 자살을 하도록 이끌고 가는 것은 마귀라는 것이다. 마귀가 끌고 가는데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면, 그는 마귀의 자녀인 것이며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가 아닐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러한 일시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살을 성공하지 못하게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불가항력적 은혜이다.
(9) 14 항. "자살하신 분이 평소 건강하실 때, 즉 본인이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분명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는데, 어느날 나쁜 병에 걸려 자유의지를 따라 판단할 수 없어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고 해서 지옥에 보내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 분에 불과할 것입니다"에 대하여...
이 말은, 자살한 자를 하나님께서 지옥에 보내신다면 하나님을 자기모순에 빠진 분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므로 매우 위험한 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중 4번째 계명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라는 말씀에 저촉되는 말이다.
또 레위기 24장16-1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신성모독하면, בְּנָקְבוֹ버나커보, blaspheme)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거나 글을 쓸 때에는 죽을 결심을 하고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피조물의 일차적 자세이다.
(10) 14항. "... 저는 하나님이 고인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활동할 때의 신앙을 기억하시는 분이시지, 그런 능력을 상실하거나 훼손당했을 때의 행동에 따라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에 대하여
•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찌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20).
"기독교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건 회개하면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그것을 기억지도 않으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했어도 현재 악한 길로 가고 있다면, 과거의 의로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15항. "저는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를 넘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용납하심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라고 믿습니다"에 대하여...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용납하심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따라 이루어진다. 또한 "구원의 때"는 "심판의 때"의 다른 말이다. 구원과 심판은 항상 동시에 이루어지며 마지막날 심판날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가 빠진다면 진정한 구원이 아니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로우심은 그분의 택한 노아 가족에게만 해당되었고, 그 이외의 불법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공의로우심으로 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불심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롯의 가족에게만 자비로우셨으며, 나머지 악인들에게는 공의로 심판하셨다.
현대에 들어 인본주의가 너무나 성행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만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아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그분의 공의 때문에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심판을 내리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의 택한 백성들이 죽어야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고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공의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먼저 베풀지 않으셨다. 죄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먼저 선포하시고, 그 이후에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입히는 자비를 베푸셨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아가셔서 그의 죄를 물으셨으며 그에게 자비롭게 다가가지 않으셨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에도 사람들을 심판하신 뒤에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자 무지게를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약속하셨다.
(12) 17항. "제 답변은 어떤 권위를 가진 교리나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그저 한 개인의 의견일 뿐입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큰 상심에 빠져 있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제 소박한 마음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 글이 선생님의 마음에 더 큰 짐이나 고통이 되질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15:2-3)
로마서 15장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행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선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예를 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비방과 굴욕적인 말을 들으시면서도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인본주의적인 말을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 선한 말씀을 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을 선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은 하나님 편에서의 '선'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이면서 주님의 양떼들을 지옥자식이 되도록 이끌고 가며 참된 종들을 죽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선'이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 특히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종교 지도자들에게 '뱀들'이나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게 말한 예수님을 악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본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에 이렇게 분별력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결국 그들은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하여 예수님을 죽였다.
악한 세상에서는 이처럼 선한 말씀을 하면, 그 댓가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양떼들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기꺼이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고, 분별력이 없어서 종교지도자들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고 있는 양떼들이 보는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가르치시며 자신의 목숨을 던지셨던 것이다.
이처럼 목회자들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자신의 죽음을 버릴 각오를 하고 선한 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혹시라도 욕을 먹을까봐 몸을 도사리며, 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고자 사람들이 듣고싶어하는 말을 골라서 한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말하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 ...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
•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결 론]
만약 진짜로 죽어서 보니, "자살하면 지옥에 가더라"가 맞는다면, 자살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주장해온 모든 이들은 자살해서 죽은 이들의 피값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피값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찌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20).
오늘날 자살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목회자들로 인하여, 조금만 힘들면 자살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살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고통스러운 이세상에서 하루라도 더 살 이유가 없다. 죽으면 눈물도 고통도 없는 천국에 갈 수 있는데, 죽는 순간의 고통만 이겨내면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런 말들을 하는 목회자들 때문에 자살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며, 그런 목회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살한 이들의 피값을 치를 준비를 하던가, 속히 회개하고 더이상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자살하는 이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귀중함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내가 가진 생명도 내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밝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욥기 3장을 보면, 너무나 괴로운 욥도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기까지 했으나, 결코 자살하지 않았다. 자기의 자녀들이 죽었을 때에도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즉 삶과 죽음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실 일이지 인간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왜 오셨는가? 생명을 주기위해 오셨다. 어둠과 흑암의 땅에서 고통당하며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생명의 주 예수님과 반대로 예수께서는 마귀를 살인자라고 밝히셨다.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결론적으로 자살은 살인죄이며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나 살인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 말씀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또한 자기 자신이건 타인이건 죽인 뒤에 회개하지 않은 모든 이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그들이 성령훼방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게 하는 것인데, 살인죄를 지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욕적이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언젠가 그분께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여, 주여"하며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내쫓으며 병자를 고치며 큰 권능을 행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내면을 보시기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음이 있다고는 하지만 회개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즉 진짜 믿음이 아니라 자기 확신에 빠져서 믿음이 있는 줄로 착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시며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회개하여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들은 믿는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들의 믿음은 가짜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살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결과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이 있는 곳에 가야하기 때문이며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살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이들로 인하여 조금만 힘들면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이미 한국은 '자살 공화국'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을 정도로 하루에 수십명이 자살하고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그 동안 잘못 설교하며 가르쳐온 것을 진정으로 회개해야 한다.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 자살한 이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마음 상할까봐, 그래서 교회를 떠날까봐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잘못 말한 그 한 마디로 계속해서 수많은 이들을 자살의 길에 서게 한 것을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것이다. 이미 죽은 이들의 피값을 짊어지고...
그리고 이제는 이미 죽은 자들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자들을 생각해야만 한다. 앞으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살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자살하지 않도록 강한 메세지를 전달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난 뒤에도 계속해서 "자살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라는 달콤한 말로 수많은 이들을 자살의 길에 서도록 미혹한다면, 그러한 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면 누구의 종? 왜냐하면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들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면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선택하라. 자살자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그럴듯한 말로 미혹할 것인가? 그래서 수많은 이들을 자살의 대열에 서게 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참된 진리를 선포할 것인가?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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