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 진성 이공 묘갈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處士眞城李公墓碣銘 幷序
처사 진성(眞城) 이공(李公) 휘 종호(鍾鎬)가 돌아가신 지 이미 60여 년이 되었다. 그 종제 각호(珏鎬)가 유사(遺事)를 서술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종백형(從伯兄)은 재지(才志))를 지닌 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작은 비석을 세워 무덤을 표시하고자 하는데 사행(事行)이 매우 소략하니 입언가(立言家)를 구해서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는 이미 나의 백부의 묘갈명을 지어 우리 집안일을 상세히 아니, 다시 한 말씀 은혜를 내려 주기바랍니다.
내가 부족한 문장으로 한 번도 오히려 참람한데 하물며 거듭 할 수 있겠는가? 누차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유사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자는 학빈(學賓)이니, 문순공 퇴계 선생의 13세손이다. 선생의 후손은 문학과 벼슬이 대대로 이어져, 휘 귀운(龜雲)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三司)를 역임하여 아경(亞卿)에 이르고 호가 사은(仕隱)이니 공에게 5대조이다. 휘 정순(程淳)은 음직으로 현감이 되었으며 호는 용곡(龍谷)이고, 휘 휘명(彙明)은 통덕랑이고, 휘 만갑(晩甲)은 성균 진사이고, 휘 중숙(中 )은 통덕랑이니, 이분들은 부친 이상 4대이다. 모친은 김해 허씨(金海許氏)이니 도사 도(燾)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 계유년(1873)에 태어나고, 무신년(1908) 12월 4일에 돌아가시니, 집 뒷산 유좌(酉坐)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출중하여 권면과 독려를 기다리지 않고 독서를 좋아할 줄 아니, 부친이 기대하여 족조 용산(龍山) 선생 문하에서 배우기를 명하였다. 집이 지척인지라 조석으로 모시고서 12, 13세에 경전을 다 읽고 공령문(功令文)을 지었는데 구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함이 많았다. 이에 용산 옹이 자주 칭찬하였고, 동년배로 같이 배우는 이들은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행실을 우선하고 문예를 뒤로 하는 것은 절로 가학의 전래와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고, 다른 형제가 없어 집안일을 대신 맡아 부모님에게 음식으로 받들기를, 빈궁하다 하여 혹시라도 부족하게 하지 않았고, 행하고 남은 힘이 있는 여가에는 글을 읽는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효경》과 고문선(古文選)을 손으로 베낌에 자획이 단정하여 구슬을 꿰어놓은 듯 사랑스러웠다.
시국의 일이 날로 잘못되니 일찌감치 세상에 쓰이기를 단념하였으나 바야흐로 문학과 행실이 함께 나아가 장래에 성취할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겨우 30세를 넘긴 나이에 끝내 뜻을 간직한 채 돌아가셔서,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여 눈을 감지 못하는 한을 품게 하니, 하늘이 부여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 맏아들과 손자가 잇달아 장수하지 못하고, 난리로 객지를 떠돌면서 상자 속의 남긴 시문 또한 사라져 전함이 없으니 애석하다.
배위는 풍산 김씨(豐山金氏)이니 낙두(洛斗)의 따님이다. 경오년(1873 고종10)에 태어나고, 정축년(1937)년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가현(加峴) 유좌(酉坐) 등성이에 있다.
2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원필(源必)·원용(源用)이고, 딸은 정규빈(丁奎斌)·금우현(琴宇絃)·변덕우(邊德雨)의 처이다. 원필의 아들은 동준(東駿), 동기(東璣)이다. 원용의 아들은 동극(東極)이다. 정규빈의 아들은 창진(昌鎭)·진발(鎭發)이고, 딸은 장순익(張淳翼)의 처이다. 금우현의 아들은 창직(昌稷)·창목(昌穆)·창한(昌漢)이고, 딸은 정해명(丁海明)·김□□(金□□)의 처이다. 변덕우의 아들은 형일(衡一)이고, 딸은 박□□(朴□□)의 처이다.
명(銘)을 붙인다.
가학의 향기에 훈도되고 薰沐乎孔林芬馥
스승의 가르침에 도야 되었네 陶鑄乎湖庠爐鞴
길게 뻗은 길에 준마가 달리듯 逸駕脩途
일찍부터 명성을 드날렸네 早擅聲譽
하늘이 어찌 나이를 더해주어 胡不假年
원대한 포부 다하게 하지 않았던가 卒究遠大
그래도 공정한 인물평 있으리니 尙有公評
나의 명을 채택하리라 我銘是採
용산(龍山) 선생 : 이만인(李晩寅, 1834∼1897)을 말한다.
공령문(功令文) : 과거시험에 쓰는 시와 문장을 말한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