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컷 외 / 황중하 / 이인 / 2013년 시인동네 신인상
숏컷 외
황중하
머리가 길다는 건 좋은 것이죠.
머리숱이 많다는 것도 좋은 것이에요.
자를 수 있는 머리가 없었다면
난 유방을 잘랐을 테니까요.
어느 날 환자가 내 가슴을 움켜잡았죠.
난 주사를 놓으러 다가갔을 뿐인데
그놈은 그냥 한번 잡아봤다고 웃으며 말했죠.
성추행 당하셨어요? 네.
누가요? 제가요.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죠. 뭐, 뭐, 뭐라고요?
짧게 잘라주세요. 남자머리처럼 아주 짧게요.
내 머리카락은 검은 비가 되어 미용실 바닥을 적셔요.
철벅철벅 서글픈 소리로 우는 머리칼
이봐요. 내 머리카락을 밟지 말라고요.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기분이 드니까.
다음날 정신과를 찾아갔죠.
하지만 의사의 처방전엔 난 한낱 여자일 뿐이었어요.
나와 같이 자고 싶다나요?
더 짧게 잘라주세요. 남자머리처럼 아주 짧게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더 더 더 더 더 짧게, 나를 거세시켜 달라고요.
2인치의 머리로 거리를 나섰어요.
아직도 내가 여자로 보인다구요?
다음엔 진짜 가슴이나 엉덩이 한쪽을 도려내야겠군요.
삼 분 동안의 감옥
컵라면은 뜨거운 감옥
저 물의 감옥 속엔
너무 일찍 끓어버린 열 살의 소녀와
분말스프처럼 건조했던 스무 살의 소녀와
알몸의 소녀를 칼로 위협하던 전과를 가진 남자와
그 옆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옆집 아저씨와
짬뽕국물처럼 시뻘건 눈으로 구경하던 중국집 배달원이 있다.
서른 살의 소녀가 감옥을 열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감옥이 끓어 넘치도록.
뜨거운 물이 뜨거운 국물이 되기까지.
열 살의 소녀가 스무 살의 소녀가 되기까지.
스무 살의 소녀가 서른 살의 소녀가 되기까지.
容器가 勇氣가 되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삼십 년 같은 삼 분이 지나면 뚜껑을 열고
면발을 휘휘 젓는다.
한 젓가락씩 사람들을 일으킨다.
전과를 가진 남자와 옆집 아저씨와
중국집 배달원과
방 한구석에 울고 있는 열 살의 소녀와
분말스프처럼 건조했던 스무 살의 소녀를 일으킨다.
후루룩 후루룩 면발을 나눠 먹는다.
후루룩 후루룩 뜨거운 국물을 나눠 마신다.
그렇게 후루룩 후루룩 컵을 비운다.
감옥은 깨끗이 비워도 여전히 감옥이다.
해마와 물음표와 갈퀴
저녁 13시.
신발을 벗고 현관문에 들어서자
난닝구 바람의 아버지가 휙 돌아서며 무섭게 쳐다본다.
해마 같은 아버지.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가 술집 여자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물음표가 내 목을 꽉 조른다.
갈퀴 같은 손으로 내 목을 조르며 코너로 몰아세운다.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던진 물음표가 아버지의 손목을 낚아챈다.
어딜 갔었어? 누굴 만난 거야? 뭐하다 이제 왔어?
물음표… 물음표… 물음표가 물음표를 낳는 밤.
졸지에 딸을 술집 여자로 만드는 아버지의 물음표.
아빠, 아빠. 켁 켁 켁. 나는 좀 놀면 안 돼요?
이것이 어디서?
물음표가 난무하는 동안 나는 캔맥주처럼 찌그러져 운다.
울다 묻는다.
아빠는 왜? 아빠는 왜? 아빠는 왜?
물음표가 자꾸 입을 막는다.
갈퀴 같은 물음표. 꼬리가 긴 물음표.
나는 물음표를 들고 아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빠는 목을 길게 빼고 물음표의 갈퀴를 뽑는다.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와 이해받지 못하는 물음표.
이해받지 못하는 물음표와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
네 개의 물음표가 두 개의 물음표를 매달고
각자의 방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눈물콧물로 일기를 쓴다.
일기장 한 장을 물음표로 가득 채운다.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물음표에 목을 매달았다.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 같은 날 낳고 엄마는 행복했을까.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다가와 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다. 넌 콜라라며 콜라가 사는 나라로 가버리라고 한
다. 나는 모래더미 속에 얼굴을 묻는다. 나만 홀로 캄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는 콜라병 속에 날 가둔다.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병 밖의 엄마를 본다.
엄마는 콜라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빛을 꿰어 넣는다. 엄마의 눈물 같은 빛이 콜라병 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울면 안 된다
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간다. 사이다 같은 아이들이 내 주위를 맴돈다. 넌 콜라라며 톡 톡 톡 쏘아댄다. 돌멩이를 던
져댄다. 난 콜라병 속에 다시 나를 가둔다. 엄마가 만들어준 콜라병. 아프지 않을 콜라병.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병 밖의 세상을 본다.
툭 툭 툭 틈만 나면 나를 흔들어대는 세상. 나는 흔들린다. 세차게 흔들린다. 반항하듯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기포를
천장까지 끌어 모으며. 누군가 내 생의 한가운데 빨간 딱지를 붙인다. 나는 위험하다. 뗄 수 없는 빨간 딱지를 붙인 나는
위험하다.
엄마는 기포를 숨긴 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난 언제든 분출하기 위한 꿈을 꾸며 산다.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며 내 몸의 탄산을 끌어 모은 채 자유롭게 뚜껑 밖으
로 흘러가는 꿈을 꾼다. 누구의 유리잔에도 담겨지지 않는 꿈. 플로리다에서 건너온 한 흑인 남자와 함께 콜라의 비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꿈.
콜라병 밖으로 주르륵 흘러나오는 슬픔.
아무도 모르는 뚜껑 속의 내가 세상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다. 위험한 콜라가 새어나가고 있다.
컴퍼스의 거리
당신은 컴퍼스의 긴 다리. 나는 짧은 다리. 당신이 중심을 잡으면 난 하나의 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려낸다. 당신이 서 있
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당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나는 좁은 동그라미 속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 안정적인 반지름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당신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기로 한다. 그럴수록 당신의 방은 넓어져 갔고 당신은 물고기처
럼 자유로워진다. 나는 당신을 축으로 하나의 물방울을 그린다. 당신이 뛰놀 수 있는 커다란 물방울을 그린다. 너무 가깝
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물고기처럼 첨벙거리는 당신이 있다. 낄낄대며 웃는 당신. 술병 속에 갇힌 당신. 오늘도 난 당신
을 축으로 안정적인 반지름의 거리를 계산해내고 천천히 당신의 주위를 선회한다. 당신은 내 파란 물방울 속에 갇히는 줄
도 모르고 낄낄대며 웃는다. 나는 물방울의 소리를 듣는다.
황중하
1982년 경기도 광명 출생.
안산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 문예창작학과 3학년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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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박, 동백꽃 외
이 인
동박새가 유두처럼 생긴 꽃봉오리 쪼아대는 대낮
동백 숲에 드니
산도(産道) 열고 순풍순풍 붉은 꽃 피어나는
오랜 수령의 동백나무에서
피, 비린내가 난다
한 달에 한 번씩 꽉 차오르는 아랫배 움켜쥐고
붉은 혈 질펀하게 쏟아내야 가벼웠던 몸
자식 둘을 낳고 이제는 자궁 문이 닫히는 중이다
시도 때도 없이 벌겋게 홍조 띤 얼굴
계절과 상관없이 불같은 적막을 견뎌내며
새벽 맞는 일 허다하다
도대체 틈을 주지 않는다
여자가 빠져나가는 몸에선 버석버석 물기 마른 소리 들린다
동박새 앉았다 간 나뭇가지
낭창낭창 휘어진다
춘정에 못이긴 꽃모가지 우수수 떨어진다
저 흥건하게 젖은 붉은 혈 서럽도록 화사하다
달빛 환하게 내려앉는 밤
나, 거기 동백 숲에 들어 발정 난 동박, 동박새와
한 열흘쯤 몸을 섞다
덜컹, 애라도 밴다면
완강하게 달려드는 갱년기 견딜 만하겠다
부드러운 독
모난 몸피를 돌려 깎는다.
상처 난 부위를 살살 도려낸다
한입 크기로 저미려는데
손아귀에서 재빠르게 미끄러진다
빈손에 끈적끈적 달라붙는 감촉이 부드럽다
쌉쌀한 날씨에 저녁거리로 선택한 토란국
이파리에 이슬 고이면
새침하게 털어내는 토란잎 일대기를 생각하다가
엇갈린 인연 골똘하게 떠올린다
확, 달려드는 가려움증
손등을 타고 올라온다
깜박 잊었다
토란 알에는 독성이 있다는 것을
지워지지 않는 독이 고통으로 남는다
저 부드러움을 사랑한 적 있다
한 사내가 가져다준 독한 사랑으로
생의 열꽃 피워낸 적 있다
가끔 불쑥 도지는 부드럽고 달콤했던 사랑
붉은 독성으로 돋아 온몸 가려울 때가 있다
집이 운다
늙은 감나무 빈집을 내려다보고 있다
흙담벽 떨어져 나간 토방 앞
들고양이 배 깔고 자울자울 졸고
댓돌 위 다 해진 검정 고무신 한 짝 누워있다
문턱이 다 닳도록 드나들던 안방 방문 위
윗대서부터 내려왔다는 가훈이
비딱하게 걸려있다
여름 한철 국수를 밀던 밀대는
부뚜막을 굴러다니고
녹슨 가마솥에는 거미들이 집을 짓고 있다
빈손으로 허공만 더듬거리던 바람
마당귀, 저 홀로 피어 만삭이 된
봉숭아꽃 씨주머니를 만지작거리고
나비는 문 열린 빈집을 제 집처럼 드나든다
붉은 굴뚝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
그늘 넓히느라 하루가 짧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집
불쑥 대문을 밀고 들어올 것 같은 사람이 그리워
집이 운다
땡감 매달고 있는 감나무 가지 끝
귀 닮은 낮달이 걸려있다
장다리꽃
비알밭
속대 겉대 잘려나간
배추꼬랑이가 장다리꽃을 피워 올렸다
겨우내 시린 발로 건너와
노란 물감 울컥울컥
게워내는 모가지가 긴 봄
자식 넷을 키운
어머니 쭈그렁 젖처럼
속대 겉대 다 내어주고
쪼그라든 배추꼬랑이
빈 젖을 물린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배추흰나비
한들거리는 장다리꽃에 앉아 젖을 빤다
오래도록 쪼그리고 앉아 그 꽃을 들여다본다
봄을 밀고 올라온 꽃 대궁에
눈뜬 씨앗들이 모여 있다
산벚나무
중동이 꺾인 채 썩어가는 산벚나무
우묵한 몸통에서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 팥배나무를
새끼 보듬듯
품에 안고 햇살을 떠먹이고 있다
제 육신을 거름으로 내주고 있는 저 헌신
산벚나무 밑동에 벌레들이 모여든다
그늘이 접혔다 펴지고
나무 겨드랑이에 오래 감겼던 골바람을
술술 풀어내는 오후의 풍경 속에서
나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바친
한 신부의 가난을 떠 올린다
들숨 날숨으로 붐비는 숲속
봄들이 가만가만 걸어 들어간다
이 인
충남 당진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시인동네>2013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