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8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
나는 요즘 무척 큰 혼란을 겪고 있는데 그것은 분수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분수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고,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상담도 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내가 분수에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분수를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갑자기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각각 분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분수(分數)는 (1)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를 말하고, (2)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를 말하며, (3) 사람으로서 일정하게 이를 수 있는 한계를 말합니다.
지금 가만히 살펴보면 내 분수를 모르고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가 부족함에도 그것을 잘 알지 못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처럼 처신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절대로 지식으로 그 수준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임을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는데 성경의 말씀도 지식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였고, 하느님의 뜻도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 품어 안는 것으로 착각하였으니 내가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분수에도 미치지 못하고 푼수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정말 현명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지혜로 다시 다듬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봉사나 피정이나 많은 신자 재교육 프로그램은 그에 따른 기본정신이 있고, 기본정신에 따라 운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리적이고, 과거의 경험에 의한 답습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큰 오류를 겪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론에만 밝았다고 자부하면서 운용의 지혜를 살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나는 내 신분의 격에 맞지 않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허울만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살았고 내가 가진 학위는 학문의 발전에 따라가지 못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수반 하지 못하여 옛날의 수준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갑니다. 새로 생기는 많은 이론들을 접하면서 내가 얼마나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은 사람인지 새삼스럽게 느끼기도 합니다. 내가 대학의 교수로 강의를 하면서도 신분에 맞는 행동으로 살지 못하고 분에 넘치는 생각과 행동으로 교만하게 자신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내 신분은 교회 안에서 평신도로서 성직자나 신학자가 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지도자가 되기에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꾸르실료의 교구 주간이라는 중책을 맡아서 봉사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되 돌이켜 반성해보면 꾸르실료에서 내가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봉사하고 있으면서 내 신분에 걸맞게 봉사하고 있는지, 또한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내가 봉사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정말 형식적으로 봉사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신분은 무엇인가? 나의 교회 안에서의 신분은 평신도 봉사자의 신분으로 다른 사람의 ‘종’이어야 합니다. 즉 봉사자의 신분이랍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봉사자임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았으며 정말 진정한 봉사자였다면 종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봉사자라는 가면 속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선생으로, 주간으로 살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는 것에 자랑스럽게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즐기며 살았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평신도와 성직자와의 관계는 참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하는 교회운동은 평신도가 할 수 있도록 성직자는 영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어야 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직자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평신도와 하느님을 연결하는 역할로 종이 되어야 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서로의 분수를 알아야 하는 아주 미묘하고 어려운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특히 미묘하다는 것은 서로가 분수를 지켜야 하는 신분상의 한계가 아주 복잡하고 분명하지 않으며, 영역에 손상을 받지 않는 단계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특히 평신도의 일은 성직자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해서 성직자는 평신도들이 일하는 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잘 맺을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성직자의 과제일 것입니다. 나는 교회에서 일하면서 평신도로서 성직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본당 회장의 직책을 수행할 때나, 평신도 운동의 책임자로 있을 때 그 일에 많은 장애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세 번째로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으로서 내 역할과 임무와 책임에 대하여 나는 오랜 동안 방관자로서 살았습니다. 내 일에 매달려, 내가 돈을 잘 벌어들이지 못하여, 내 역할과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고 엉터리로 살아서 자상하고 따뜻하고 사랑과 효성이 넘치는 아들이 되지도 못하였고, 포근하고 사랑이 넘치는 남편이 되지 못하였으며, 자상하고 엄격하며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그 모든 것이 뉘우침과 회한으로 남습니다. 수많은 일에 욕심을 내고 자신 있게 덤벼들었으나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그 일에서 손을 떼려고 할 때는 이미 많이 늦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능력은 이제 고갈되어가는 저수지와 같이 도저히 물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기운도 없고, 정력도 떨어지고, 지식도 지혜도 도저히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 젊은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명심보감 안분편에
‘남상 도상신 망동 반치화’(濫想 徒傷神 妄動 反致禍)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생각은 헛되이 정신만 상하게 할뿐이며, 망령 된 행동은 도리어 재앙만 부르게 된다.>
내 자신의 분수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이제는 정말 분수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추스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의 분수에 대하여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니코데모에게 세상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믿고 증언한다고 하는 것은 분수에도 맞지 않는다는 말씀과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정말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광야에서 들려 올려 진 구리 뱀이 된 것처럼 멋모르고 덤벼들었던 나의 삶을 반성하면서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생각에 빠져 살았던 교만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7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6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37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축일4월 18일 성 갈디노 (Galdinus)
신분 : 대주교, 추기경
활동 지역 : 밀라노(Milano)
활동 연도 : 1100-1176년
같은 이름 : 갈디누스, 갈디모, 갈디무스
이탈리아의 유명한 델라 살라(della Sala) 가문 출신인 성 갈디누스(또는 갈디노)는 사제품을 받고 밀라노 교구의 주요 직책과 부주교를 역임하였다. 1161년 프레데릭 바르바로사(Frederick Barbarossa)가 쳐들어와서 밀라노를 탈출했을 때 그는 부재중임에도 불구하고 밀라노의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후에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밀라노로 되돌아온 후 바르바로사에 의해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고, 정열적으로 설교하러 다녔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또한 당대의 복잡한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도 주력하였다. 그의 지혜와 웅변은 매우 뛰어났으며 당시 교회를 어지럽히던 카타리 이단을 압도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와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와 더불어 밀라노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주교로 손꼽힌다. 그는 살라의 성 갈디누스 또는 갈디무스(Galdimus)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갈디노 (Galdinus)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