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爲政篇(위정편)' 제 4장
하루에도 여러 통의 카톡을 주고받는다. 카톡 친구 대부분은 비슷한 연령대나 생각을 공감하는 부류의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내 나이 일흔을 넘겼으니 내가 주고받는 카톡 메시지의 내용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요즈음 주고받는 내용의 대부분은 건강유지법, 운동의 중요성, 나이 들어도 청춘으로 사는 법, 노후준비, 베푸는 인생의 행복, 원만한 가족관계 유지법, 거기에다 정치의 난맥상에 대한 풍자 등이다.
옛 성인들은 인생살이를 자연의 순환원리에 순응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그 자연의 법칙을 ‘道’라고 했다. 그래서 ‘道’를 인생의 최고 덕목으로 여긴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떠나는 전 과정을 가장 진실하게 진술한 글이 있다. 바로 논어 위정편 제4장이다.
위정편 제4장에는 공자께서 스스로의 일생을 돌아보고 자신의 학문 심화과정을 술회한 유명한 글이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三十而立(삼십이립) : 서른 살에 설 수 있었으며,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 마흔 살이 되어 미혹함이 없었고,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 쉰이 되어 천명을 알았으며,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 : 예순이 되어 귀가 순하게 되고,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 일흔 살이 되어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라 하였다.
朱子(주자)는 ‘志于學(지우학)’을 옛날에는 15세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마음이 가는 것을 ‘志’라 한다. 여기에서 말한 ‘學’은 곧 ‘大學’의 ‘道’이다. 大學에 뜻을 둔다면 늘 잊지 않고 생각함이 여기에 있어서 싫증내지 않을 것이다. 라는 註釋(주석)을 붙였다.
또 ‘立’을 스스로 섬이 있으면 지킴이 굳어져서 뜻하는 것을 일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했으며, ‘不惑(불혹)’은 사물의 당연한 도리에 대하여 모두 의혹하는 바가 없다면 아는 것이 분명하여 지킴을 일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 했으며, ‘知天命(지천명)’에서 天命(천명)은 天道(천도)가 유행하여 사물에 부여한 것이니, 바로 사물에 당연한 도리의 까닭이다. 이것을 안다면 아는 것이 그 정밀함을 지극히 하여 의혹하지 않음을 굳이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고 했으며, ‘耳順(이순)’은 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깨달아져서 어긋남이나 걸림이 없는 것이니, 앎이 지극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아지는 것이다. 고 했으며,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는 그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저절로 법도를 넘지 않는 것이니, 편안히 행하여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도에 맞는 것이다. 는 註解(주해)를 붙였다.
글쓴이가 생각할 때 朱子(주자)는 공자가 聖人(성인)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인격체로 생각하고 그렇게 註釋(주석)을 붙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글쓴이는 공자도 평범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나름대로 해석하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라는 항목을 공자의 개인적 처지에서 접근해 보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시다시피 공자는 70이 넘은 어버지 숙양흘(叔梁紇)과 겨우 16살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 태어났다. 불행히도 공자 나이 세살 적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로인해 청상의 과부인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의 손에서 성장했는데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런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늦은 나이인 열다섯이 되어 겨우 학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로부터 15년 후 서른이 되어서야 공자는 겨우 설수 있었노라 술회 한다. 선다(立)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立於禮(입어례), 不知禮, 無而立也(부지례,무이립야)라는 말이 논어 요왈편 제3장에 있는 데, 이는 곧 “선다는 것은 예다, 예를 모른다는 것은 설 수 없다는 것”이니, 이립(而立)은 知禮(지례). 즉, 예를 아는 나이라는 얘기인 것이 분명한 것 같다.
禮(예)란, 각각의 개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모든 구체적 행동양식 및 제 사회제도의 통칭을 의미하는 일반적 의미도 있지만, 근본적 天性(천성)을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非禮(비례)면 보지도(勿視), 듣지도(勿聽), 말 하지도(勿言), 움직이도(勿動)말라” 하였다.
비범한 경지가 아니고는 이립(而立)이라 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경지이니 공자 나이 서른 전후에 이미 그를 따르는 제자가 수십, 수백에 이르렀음을 볼 때 그의 학문적 경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不惑(불혹)의 사십
사십에 미혹함이 없다. 어떠한 유혹에도 빠짐이나 흔들림이 없다는 말이다.
즉, 禮(예)를 알고 이를 실천하여 道(도)를 터득하고 하늘의 도인 德(덕)을 밝히고 그 덕의 본질인 性(성)을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면, 그 어떤 육체적 욕구와 禮(예)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이 해소되는 그런 경지 곧, 훗날 맹자가 말한 不動心(부동심)의 세계에 도달함을 말함이다.
不惑(불혹)이라 함은 곧, 득도의 경지에 이름을 짐작할 수 있다. “아침에 도 서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楣 夕死 可矣(조문도 석사 가의)
공자의 불혹의 경지는 오늘 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불혹과는 차원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知天命(지천명)
하늘의 뜻을 알고.
하늘의 뜻, 참으로 어렵고 형이상학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天命(천명)을 안다는 의미는 天性(천성)과 天理(천리)를 깨우쳤다는 의미인 것이다.
성(性)과 리(理)는 우리가 알고 있는 性理(성리) “天命則性(천명즉성) 性則理(성즉리)” 바로 宋代(송대) 朱子(주자)를 위시한 숱한 선현들이 논구하고 고심한 바로 그 性理(성리)다.
우리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더욱 더한 철학적 개념으로 한 단계 상승한 바로 그 조선 성리학(性理學)과 같은 맥락이니, 이에 대한 논구는 새삼스러이 말하지 아니하여도 조선 500년의 역사와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 선생을 위시한 수많은 선현들의 이기론(理氣論)과의 상관관계에 따른 철학적 형이상학의 논쟁이다. 아직도 그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耳順(이순)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귀가 순해진다’는 뜻이다.
귀가 순해진다함은 천, 지, 인(天地人) 즉 천하 만물의 그 모든, 그 어떤 소리를 들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무욕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어떤 욕심도 욕구도 초월한 경지, 아무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누구에게도 거치적거림이 없는 자유인, 진정한의미의 대 자유인, 그 대 자유인이라면 아마 이런 경지에 이르렀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는 칠십이 되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도 법도 즉 하늘의 법도에도 땅의 법도에도 사람의 법도에도 그 어느 법도에도 어긋남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요즈음 유행하는 진정한 자유인 경지에 이미 도달하여 物我一體(물아일체)의 경지, 천지하물과 나와 일체가 되니, 마음 닿는 대로 몸 가는 대로 행하여도 천지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니, 가히 불가에서 말하는 부처의 경지와 상응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지에 이름은 도가의 진인, 신선이나 불가의 부처이거나 모두 같은 경지이니, 도(道)가 통 하면 그 경지는 어떤 형태로 접근하더라도 최종의 종착지는 같다는 뜻인 게다.
나잇살로는 글쓴이도 일흔이 넘겼으니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에 해당한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공자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음에 비해 글쓴이는 그 나이에도 세속에서 헤매고 있으니 그것이 차이점이다.
가끔은 카톡으로 주고받는 좋은 글을 읽을 때면 내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기도 하고 반성도 한다.
여기에 논어 위정편 제4장을 소개한 것도 성현을 본 받고자하는 지극한 성심에서 출발된 것이기에 그 뜻을 한번이라도 음미해 보았으면 한다.
첫댓글 溪亭 陳永業선생님께서 위의 글을 읽어 보시고 不惑 영역의 '朝楣 夕死 可矣(조문도 석사 가의)' 보다는
논어 里仁篇 8장에 적힌 '朝聞道 夕死 可矣(조문도 석사 가의)'가 옳지 않겠는가?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고주에 '朝楣 夕死 可矣(조문도 석사 가의)'라 적어 놓고, 楣(문미미) 이 글자를 여기서는 '문도'라고 읽는다. 라고 표현을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해석을 이렇게 해 두었습니다.
'朝楣(조문도) : 아침에 도리를 듣는다는 뜻으로, 인간의 도리(道理)에 대해서 지금이라도 당장 깨달아 자신이 체득(體得)한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