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소집 통지서/
출근길, 버스는 오지 않고
손에 든 역사서가 난데없이
예비군 소집 통지서를 내밀었다
수성은 성벽의 높이에 간절하고
함락은 군졸의 사기에 민감하다
적의 함성이 성벽을 기어오르자
안시성 성벽은 오금이 저렸다
책을 투구처럼 말아쥐는 찰나에
고구려 장수 양만춘이 '날 선 창을 휘두르라'
'목숨을 아끼려면 죽기로 싸워라' 쩌렁쩌렁 호령이다
머리채를 잡아채듯 난무하는 화살
성벽을 오르던 적의 피가 허공에 튀었다
20번 버스는 나를 본체만체
적의 포차를 향해 돌진해 가고
오 척 단구가 성벽의 돌처럼 굳었다
애꾸눈 당 태종의 군졸이 혼비백산 퇴각하자
일천삼백여 년을 건너온 승리의 함성,
40년 만에 소집된 전투는 끝이 났다
외진 두 평 망루, 다음 버스는 10분 뒤에 온다는
디지털 자막이 횃불로 박혔다. 또 지각이다
죽음이라는 말 -바람 3
췌장의 어둠을 조율하던 친구가
살만한 미래에 시선을 거두었다
조객(弔客)이 뜸한 빈소에는
시든 감꽃 같은 상주가
통증을 악물고 견뎠을
영정의 마른 눈물 자국을 닦고 있었다
과일 한쪽 깨물지 못하는 입술과
조화(弔花)의 하얀 침묵에 말문이 막혔다
배설을 쏘지 못 하는 일
유골 상자에 가루가 뜨거워지는 일
지팡이 하나가
해보다 밝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을까
상주와 맞절을 하다가
삶의 경계가 서늘해지는 이 말
죽음이라는 말
오늘 -바람 4
북적이는 보도를 걷다가 신발에 물었습니다
배고프지 않니?
대답이 없습니다
그림자에 물었습니다
피곤하지 않니?
무슨 말을 하는데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법 폼 나게 사는 친구의
벤츠 e클래스 승용차가 일방로를 질주했습니다
개미허리의 치수를 까먹은 죄와
흐르는 물의 속도를 잊은 죄를
수명을 다한 구름과 어둠에 묻는 건
내일에 죄짓는 일입니다
진 빚을 내일 갚기로 했습니다
나를 끌고 온 그림자 몰래
오늘 하루만 죄짓기로 했습니다
수명을 다한 것들은 내일 다시 시작하거든요
복사기-바람 5
누구든 어둠을 견디면 빈속이 엉클어져요
내게 다가온 당신 클릭 한 번 부탁해도 될까요 빈속을 환하게 풀어주세요
당신의 손끝에서 정 하나 깨무는 건 순간입니다 침묵에 갇힌 과거는 묻지 말아요 심장의 박동이 빨라져요
어쩌지요 마로니에 창가에 잎이 푸른 걸 환한 내일을 기억하기로 해요 오늘 그냥 꼬옥 안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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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林 안병석(安秉錫)
-전남 화순 생
-경기도 오산시 수청로31(수청동 우미이노스빌아파트) 107동 1001호
-팔도문학 오산시문학 담쟁이문학 동인
-더불어 사는 공동체 주택관리사
-시집<이 길에 우리 있었네>
-한국아파트신문 '시가 있는 풍경' 필진
-전화 010-2617-4785
-e-mail/anbs1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