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발해를 건국한 인물은 누구일까?
대조영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전국토가 당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많은 지역에서 다시 고구려를 세우기 위해 당나라에 저항이 벌어졌다. 고연무, 안승, 검모잠 등이 이끄는 고구려의 부흥군과 안시성 등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사람들은 때로는 신라와도 협력하여 당군과 싸웠다. 하지만 안시성이 함락되고 672년 백수산 전투 등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패배함에 따라 고구려의 부흥의 희망은 한풀 꺾이고 만다. 이후에도 다시 보장왕이 고구려 부흥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고구려의 부활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약 20만의 고구려인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다시는 당나라에 위협이 되는 고구려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을 곳곳에 흩으러 놓았다. 흩어진 고구려인들 가운데 가장 많이 모여 살게 된 곳은 과거 고구려서쪽 경계이자, 당나라의 동북방 전진기지인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인 당나라의 영주였다. 이곳에는 고구려인을 비롯해 거란, 해, 말갈 등 당나라에 굴복한 여러 이민족들이 당의 통치를 받으면서 모여 살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고구려의 장군 출신인 걸걸중상과 그 아들 대조영이 있었다. 약 30년의 세월 동안 이들은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서 차츰 독립할 준비를 하였다.
696년 5월 영주에 끌려와 살던 거란족의 수령 이진충이 손만영과 함께 돌궐의 후원을 받으며 당나라 영주도독 조문훼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이진충과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족은 697년 6월까지 계속 당에 저항했다.
당과 거란의 전쟁으로 영주 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696년 걸걸중상은 말갈 지도자 걸사비우와 함께 사람들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할 수 있었다. 걸걸중상은 무리들을 이끌고 옛 고구려 땅을 향해 동쪽으로 이동했다. 고구려가 다시 부활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당나라는 즉시 거란족 출신 장군 이해고를 보내 뒤를 쫓게 했다.
발해의 건국
고구려 유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대단히 컸다. 이들은 계속해서 당나라군과 전쟁을 했다. 고구려 옛 땅으로 가는 도중 대중상과 걸사비우가 죽자,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두 인솔하게 되었다. 대조영은 영주를 떠나 요하를 건너 옛 고구려의 땅으로 들어갔다. 고구려 유민들을 인솔하고서 고구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당과 싸우는 대조영은 옛 고구려 땅에 남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대조영은 차츰 더 많은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활을 막으려는 당나라 대군과 천문령에서 맞서 싸워 그들을 전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천문령 전투에서 패한 당나라는 더 이상 대조영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대조영은 송화강을 건너 동모산에 이르러 698년에 발해를 세우게 되었다.
[동모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이래 50년간 발해의 수도였던 곳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고구려 멸망 후 30년간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던 고구려 유민들이 오랜 투쟁과 열망이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tip 발해의 건국 기록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남은 무리를 모아 북으로 태백산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 《신라고기》에 고구려의 옛 장수 조영의 성은 대씨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
- 《삼국유사》 기이 말갈발해
◎ 지도 표시 - 고구려 유민들의 이동 상황 (자발적 이동, 강제로 끌려간 것 색으로 구분)
* 사천성 - 보장왕의 귀양처. 감숙성 - 고사계, 고선지 부자 등.
장안 - 남생, 남산, 왕모중, 왕사례 등. 영주 - 대중상, 대조영 부자. 이정기 등
산서성, 양자강 남쪽 등지로 분산.
* 신라 금마저(김제) - 안승을 비롯한 고구려 부흥 활동하던 보덕국인
* 자발적 이동 : 돌궐(몽골초원) - 고문간(제 2돌궐제국 2대 묵철가한의 사위),
일본 - 왕자 약광. 책성 등 고구려 동부지역 - 다수의 고구려인이 숨음
발해의 영토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표명했지만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 지역을 크게 개발하지 않았다. 고구려 수도 평양은 당나라가 크게 파괴하여 폐허나 다름없었고, 신라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발해가 그곳을 나라의 중심으로 삼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넓은 평야지대인 요동 지역도 전쟁으로 인해 농경지가 많이 파괴되었고, 당나라와 가까워 발해가 나라를 세울 때 중심지로 삼기가 어려웠다.
반면 고구려의 동부 지역은 전쟁으로 피해가 적었기에 그곳을 나라의 중심으로 삼을 수 있었다. 특히 발해의 전성기인 10대 선왕 때에는 남쪽보다는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사방 5천리의 큰 나라가 되었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5개의 중심도시인 5경을 두었다. 그 가운데 오랜 동안 수도가 되었던 상경, 잠시 수도였던 동경과 중경은 동부 만주 지역에 있다. 서경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던 압록강 중류의 집안시 또는 그 보다 약간 북쪽인 임강시 지역이고, 남경은 함경남도 해안가인 북청군 지역이다.
[상경용천부 터 궁성 남쪽성벽- 발해의 거의 전 기간 수도였다.
황성 남문 터-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는 현재 옛 궁궐의 터만 남아 있다. 웅장한 규모는 당시 수도의 규모를 보여주며, 건국야익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
해동성국 발해
고구려가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3경으로 관리한 한성이 지금의 황해도 장수군 지역인 것을 보면, 발해가 훨씬 북쪽에서 나라를 다스렸던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최근 북위 51도가 되는 러시아의 아무르강 유역의 트로이츠코예에서 발해 시대 무덤과 성 유적들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렇게 북쪽으로 영토를 넓힌 것은 크게 3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첫째, 남쪽으로 진출하기에는 신라와 당을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두 나라의 국력이 강했고, 두 나라가 힘을 합쳐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남쪽으로 땅을 넓히기가 어려웠다.
둘째, 발해의 건국한 자들 가운데는 말갈인들이 많았다. 말갈 사회를 통일하는 것이 더 발해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동부만주와 연해주 지역 등지의 여러 말갈 부족들을 계속 정벌하는데 발해가 국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셋째, 1세기부터 약 600년까지는 연평균 기온이 낮은 시기였지만, 고구려 말기부터 차츰 더워져서 발해 시기에는 연평균 기온이 크게 올라갔다. 따라서 북쪽 땅도 농사짓기가 좋아져 발해가 북쪽으로 영토를 넓힌 것이다.
벼농사의 경우 추운 곳에서는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어떤 작물이 온도 때문에 재배 가능한 범위를 나타내는 것을 북방한계선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기후가 따뜻해진 발해시대에는 작물의 북방한계선이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따라서 발해가 굳이 남쪽의 평야지대를 차지하지 않고서도 지금의 연변자치주, 연해주 등지의 평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예로 발해 시대에는 두만강 넘어 연변자치주 지역에 해당되는 노성에서는 벼농사가 유명했다. 그곳은 고구려 시대에는 벼농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다.
연평균 기온이 2도만 변해도 작물의 환경이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활공간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기후가 따뜻해지면 농사가 잘 되어 수확량이 늘고, 양식이 풍부해지면 인구가 늘고, 다시 나라 살림도 풍요로워진다.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기후의 변화의 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지도 표시 : 발해의 5경, 고구려의 3경. 고구려의 영토와 발해의 영토 표시.
(수도 이동 상황 : 구국->중경현덕부->상경용천부->동경용원부->상경용원부 표시)
트로이츠코예 유적(발해 고분 등 출토), 하바롭스크 유적(화살촉, 불상 출토)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