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그리는 아이 외 이희은 / 남상진 / 2014년 애지 신인상 당선작
골목을 그리는 아이 외
이희은
붉은 물고기들 지느러미 흔들며 벽 속을 떠돌고, 웅크린 주택의 창문 불빛도 꽃잎처럼 떨어진다, 단풍나무 마른 이파리 몇
개 축축한 바람이 슬몃슬몃 핥으며 지나가면, 집 나간 엄마의 얼굴에는 이끼가 자라나고, 길고양이 한 마리 다리 절뚝이며
구름을 밟고 다닌다, 하늘 한 쪽엔 해먹 같은 초승달 떠 있지만, 눈 코 없는 졸라맨은 민들레 대궁을 꺾어 들고 씨앗처럼 날
아갈 준비를 한다, 알콜 클리닉에 다녀온 아빠는 벽 속에서도 아직 비틀비틀, 햇님 그리려는 순간 분필이 뚝, 부러진다, 그림
들이 점점 시들어 짙어진 어둠과 함께 아이의 눈 속으로 빨려들면, 아이의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킨다, 바닥에 뒹구는 분필로
는 이제 별 하나 그려 넣을 수 없다
검은 목구멍
관절마다 성에가 핀 양버즘나무는 오늘도 종일 기침을 했다 검은 목구멍에서 달을 삼킨 사람들이 걸어 나오다 썩은 나이테
에 걸려 넘어졌다 바닥이 그들보다 먼저 일어나 놀란 얼굴을 삼켜 버렸다 구부러진 달빛이 자꾸 등에 매달렸다 닫힌 창문 같
은 눈빛으로 악취를 뒤적거리던 새벽, 손가락 마디마다 배어 있던 안개가 진물처럼 흘러내렸다 가로등은 서성거리는 발목을
붙잡아다가 껍질 같은 그림자를 키웠다 도로마다 그림자의 비명으로 실금이 가고 갇혔던 발자국들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미명이 오면 한층 더 깜깜해진 배를 쓰다듬는 사람들, 그믐달을 토해 놓은 채 눌러붙은 목구멍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짜다만 나비
포근한 고치가 필요했던 여자는 장롱 서랍 속에 들어가 스스로 갇혔다 가늘고 긴 바람이 모서리로 함께 들어왔다 어둠을 더
듬거리며 털실 한 가닥 찾아내 손가락에 감았다 실이 점점 감겨갈수록 배가 움푹 꺼지고 늑골이 선명해졌다 공중을 긋는 빗
소리와 바람의 올을 섞어 쉬지 않고 얽어 나갔다 그리움의 무늬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가슴을 짜 올라
갈 땐 너무 일찍 잃어버렸던 젖냄새가 비릿하게 풍겨 나왔다 따뜻한 입술을 만드는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둥근 목소리가 바
늘 위로 굴러다녔다 한 가닥씩 떨어지는 머리카락으로 마지막 눈동자를 떠가다가 나비가 되기 직전 그만, 바늘을 놓쳐버렸
다 바닥에 쌓였던 먼지들이 날아올랐다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어느 맑은 날 우연히 열어 본 서랍 속엔 짜다만 빨간 스웨터의 엄마가 올이 풀린 날개로 누워 있었다
문밖에서 뒤돌아보네
바람이 문밖에서 오래 멈춰 섰네
그 사이 문안에선 물소리가 녹슬고
먹다가 흘린 밥알이 늙어 가고
겹겹 푸른 술병이 시들었네
빛이 된 지 한참인 노인은
벽지 속에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네
구부러진 등은
달빛이 슬어 놓은 그림자로 가득했네
못에 걸린 모자들이
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방의 체온이 천천히 회복되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
바스락대던 벽지는 끝내 소리를 멈추었네
유품관리사들이 찾아낸 노인의 잔액은
달랑, 살비듬 한 줌뿐이었네
굳은 몸을 젖히자 가슴에서
쌓여 있던 별똥별이 쏟아져 나왔네
소독을 끝낸 방안에
작은 빛이 몰래 떠다니다 사라지자
멈췄던 바람이 문을 스쳐 지나갔네
발톱 속의 달
열 개의 문이
자유롭게 열리고 닫히던 때가 있었다
바람 속에서 복숭아뼈가
한껏 부풀어 오르는 밤이면
달빛을 마시며 밤새 하늘을 걸었던 것,
별들도 총총 발자국이 되어 주었다
얼어붙은 계절을 넘으며
별빛이 뒤꿈치에 물의 집을 짓자
문들은 울퉁불퉁한 궤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웅덩이에 고였던 달빛,
촛농처럼 굳어 가다 실금이 생겼다
나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
눈송이로 집을 지으며
문의 기억을 달빛처럼 녹여 냈다
날개를 다친 새처럼 비틀거렸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휘청, 닳아 가는 구름을 넘어왔더니
발톱이 다시 여닫이문으로 열렸다
발가락 끝 흔들리는 달 속에서
말랑한 새싹이 돋아났다
경첩이 빠진 문은
저녁 하늘에 발톱으로 걸렸다
이희은
본명 이은희
충북 청원 출생
대전대학교대학원 예술치료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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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은 블랙홀이다 외
남상진
어제는 불을 끄다가 블랙홀에 빠진
어느 가장의 이야기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죠
도심 속 행성으로 소방차를 몰고 나간 그가
우주의 미아가 된 이야기 말이에요
집을 나서는 일은 은하계를 벗어나
안드로메다 어디쯤 떨어져
까맣게 애를 태우다 돌아오는 일이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모두 집을 나선 사람들이에요
아이들은 베란다, 혹은 마당에 둘러서서
엄마 아빠의 무사귀환을 빌기도 해요
현관문을 나서면 우리는 모두 별이 되지요
어두운 밤길을 걸어본 이들은 알아요
얼마나 많은 별이 길을 잃고
둥근 절벽에서 혜성으로 추락하는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새벽의 그물에 갇혀서
여명의 이마에 낮별로 박히는 이들은 말하죠
인생은 블랙홀을 통과하는 일이라고
이 좁은 행성에서 별의 모습으로 줄타기하는 당신
당신의 별은
오늘도 무사하신가요?
죽방렴 멸치-
때로는 구부러진 그의 등에다
시위를 걸고 싶을 때가 있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눈동자는 표적을 잃은 지 오래
골목은
출구도 없는 방안을 따라 이어졌다
누구처럼
막막한 놈들과 마주쳤을 때
한 번쯤 발사할 수 있는
먹물 한 줌 담아내지 못한 학벌
출구를 봉쇄당했을 때
무딘 주둥이를 얼마나 들이박았을까
붉게 물든 주둥이가 무색하게
몸뚱이는 이미 통발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달빛과 등대가 높은 곳에서
밤마다 눈빛을 주고받을 때에도
현수막을 흔들고 스크럼으로 맞섰을 뿐
올곧았던 대나무가
통발의 앞잡이가 될줄 몰랐다
파도가 석화처럼 날을 세우고
통발에 웅크린 별들이
반짝 비늘로 스러지던 보름 밤
생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을까
정리해고 통지를 받은 김씨가
한 평 방 안에서
벽을 향해 누운 등에다 시위를 걸고 있다
바람의 협주곡
두 팔이 없는 사내가 기타를 친다
바람이 벽에 기댄 기타의 공명통을 두드린다
키잡이를 풀었다가 조인다 여러 번
한 번 달아 난 음은 선뜻 돌아오지 않았다
반음만 올려볼까
미 . 라 . 레 . 솔 . 시 . 미
외딴 섬 같은 음들이 사내의 어깨를 배회하다 창을 넘는다
창밖으로 기러기 몇 마리 투명한 오선지에 걸린다
웃고 있다 사내
리듬은 우울하지 않고 뿌리가 없는 팔처럼 매끈했다
혼 . 자 . 가 . 좋 . 아
사내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벽지의 무늬들이 귀를 모으다 우르르 쏟아진다
미끄러지는 삶의 접착력
라 . 라 . 라
음 . 음 . 음
목청을 가다듬는 바람
발가락으로 모자를 눌러 쓴 사내가 눈을 감는다
머리를 감는다 두 손으로
거품이 흘러내리는 손가락
강약 조절 중이다 심호흡
두근대는 심장이 리듬을 탄다
눈뜨고 싶지 않은 방 안
손끝으로 만져보는 바람은 음이 가늘고 높다
하이소프라노
까치발을 해도 닿을 수 없는 높이를 걸어가는 사람들
눈을 뜬다
발로 세수를 해야겠다
다림질하는 여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탁소 여자
다리미 꾹꾹 눌러 옷 다린다
솔기마다 삐죽삐죽 왁자하던 근심 걱정
다리미를 따라 눕고
구겨지고 젖었던 시간이 뽀송뽀송 날 세운다
지나온 것들은 잊혀진다지만
가슴 아픈 기억은 몇 번을 다려도 자국이 남았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먼저 간 남자 생각에
속이 너덜너덜해진 구간을 지날 때면
여자는 무게중심을 발끝으로 옮기는 것이다
상처깊은 과거는 쉽게 펴지지 않는 법인지
마음을 다잡아도 자꾸만 쭈글거렸다
빳빳하게 날 세우기 전
쭈글한 기억을 먼저 펴야 한다
빈 가슴에 찬바람이 파고들 때
느슨한 의지 동여맨 단추 사이를 지날 때는
왠지 숙연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널찍한 등 쪽을 정성 들여 다리는 건
앞만 보며 살아온 한평생
평탄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펴고 또 펴도
구겨지고 상처 나기 일쑤인 삶
주름으로 남은 세월을
여자는 오래도록 다린다
골목, 섬이 되다
속 빈 순대 같은 골목
치킨집 오토바이가 부룩부룩
고소한 향기를 흘리고 지나간다
각각의 자세로 도열한 집들
부동의 침묵이 무겁다
한 때
분주한 발자국 비좁던 골목
헌 옷 수거함, 음식물 쓰레기통, 무릎 꺾여 내려앉은 낡은 리어카에
반쪽을 내 주고도 헐렁한 골목
할머니 몇 분이 유모차로 바리케이트를 친다
햇살은 빗살무늬 갑옷을 입고 지붕을 타고 내려와
사선으로 골목에 빗금을 긋는다
적군이 없는 성에 입성하듯 한무리 개들의 걸음이 상쾌하다
순간
고요하던 골목에 구름이 일고 바람이 분다
전봇대가 얼른 큰 키를 그늘에 숨긴다
골목을 처음 빼앗긴 그 날처럼 하늘빛이 어둡다
주섬주섬 빨랫줄의 옷가지를 걷어 챙기는 바람
휘청거리는 골목
집집마다 서둘러 불을 밝힌다
불이 켜진 집들은 일제히 섬이 된다
바람에 점령당한 공중에 멱살 잡힌 전깃줄이
가로세로 선을 그으며 구획정리를 한다
붉은 딱지는 개발확정구역
파란 딱지는 보류지역으로 나뉜 섬
이제 한바탕 바람이 지나가면
골목이 끝나는 곳부터 바다는 시작되고
우리는 모두 섬이 되어 멀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