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현대성
-피자를 주문하는 저녁/ 손수성
김우연(시조시인․문학평론가)
손수성의 「피자를 주문하는 저녁」은 현실적인 소재로 독자들에게 눈길을 끌었으며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정신마저 함축하여 있어, 제35회 한국시조시인협회상 본상을 수상하였다.
피자는 정복시대
접시라도 삼켰는가
치즈며 토마토며 포획물들을 올려놓고
경계를 나눈 칼자국도 덤으로 담아낸다.
접시들은 언제나 담는 것이 시장하다
우물 정井자로 자르거나 찢어 먺던 전(煎)들에게
중심을 나누어 갖는 칼자국을 맛보게 한다
달콤한 중앙에서 딱딱한 변두리까지
사금파리 하나 없는 균등한 맛의 분배
크기만 칼이 아니라
맛도 검임을 읽게 한다
-손수성, 「피자를 주문하는 저녁」 전문
손수성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 이 작품은, 며느리가 피자를 좋아해서 아들과 셋이서 피자를 자주 먹던 시기 어느 저녁에 느꼈던 것입니다. 잘 나누어진 피자 조각과 웃으며 먹는 모습을 보고 균등한 분배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물 정井자로 자르거나 찢어 먺던 전(煎)들”과 “사금파리 하나 없는 균등한 맛의 분배”가 대조되고 있다. 전통과 현대의 대조이기도 하다. 인정 있음과 인정이 없음의 대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의 대세는 ‘균등’이니 ‘공정’이니 ‘평등’이 화두가 되고 있는 세상이다. 세상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변해 왔고 또 변해갈 것이다. 피자를 먹으면서 “크기만 칼이 아니/ 맛도 검임을 읽게 한다”라는 말속에 현대 우리들의 생활 철학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시조로 표현하였다. 읽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하게 다의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손수성 시인의 성품을 닮은 시조라서 현대를 비판, 풍자하거나 큰 목소리로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조용히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캐나다 심리학자 피터스은 『의미의 지도』(2021)에서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수없이 세우고 역사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실패했다고 한다.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함으로써 ‘그런 악한 역사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그 밖에도 스탈린 치하의 소련, 폴 포트 치하의 캄보디아 등)과 같은 도덕적 재앙을 일으킨 이들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재앙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치명적인 적수, 악한 쌍둥이 형제를 알아보고 이해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확증편향으로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다. 마치 자신은 독립투사요, 민주의 화신으로, 통일 세력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행동은 그 반대로 하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다. 상상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진짜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은 지금도 조용히 묵묵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일제강점기나 6.25때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 있었거나, 강제징용을 당했더라면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와 다르게 행동했다고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심리학자 피터슨의 말처럼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근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저 부유한 사람들을 증오할 뿐이었다. 사회주의의 이념은 실패에서 비롯된 분노와 증오를 감추는 가면이었다. 내가 만난 수많은 당원들은 사회정의라는 이상을 내세우며 개인의 복수 추구를 합리화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좌파들의 거짓된 실상을 보고는 좌파 정당을 떠나서 인간의 심리를 공부하였다.
다만 우리 시인들은 현실성을 강조한 최영효(《시조미학》 권두언(2023봄호))의 말도 음미할 만하다.
“좋은 시(시조)는 반드시 구체적인 체험을 수반한다. 그 안에 녹아 있는 응축된 시상과 표현을 육안 깊숙이 심안에서 솟아난 사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한 시대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상을 품고 있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게 한다. 수백 년의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진실을 통한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시는 함부로 태어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함부로 쓸 수도 없다. 한 번 탄생한 시는 피가 돌고 맥이 뛴다. 이것이 사람과 같은 시의 생명력이다. 진정성을 획득하기 위해선 허구가 아닌 사실에 의한, 상상이 아닌 직접적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산 선생을 돌올한 시대정신은 시공을 초월한 우뚝한 산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시대를 아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라는 그의 시론은 당시 농경시대 지도층의 추상적이고 유미주의적인 또는 음풍농월의 허장성세를 깨우치며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담론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혀나 손끝이 아니라 시인이 세상을 향해 가슴으로 쏘는 화살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슬픈 척하고 아픈 척하지 말자, 그것 역시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시대를 직시한 분노라면 좋은 시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첫댓글 해설 즐겁게 감상합니다. 고맙습니다.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