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 일산 서공 묘갈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處士一山徐公墓碣銘 幷序
젊은 날에 일찍이 들으니, 일산(一山) 처사 서공(徐公)은 가학 연원의 성대함을 계승하여 행실과 문사가 한 고을의 신망이 두텁다고 하였는데, 내가 사는 곳이 달라 한 번도 집을 방문하지 못하여 가만히 책심(責沈)의 한이 있었다. 지금 공이 돌아가신지 이미 10년이 되었다. 맏아들 병춘(丙春)이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니, 이 부탁을 감당하지 못할 줄 매우 잘 알지만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사모하는 처지에 또한 문장의 재능이 없다고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공의 휘는 기윤(基潤), 자는 응초(應初)이고, 일산은 그 호이다.
선계는 달성(達成)에서 나왔으니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진(晉)이 그 상조이다. 조선에 들어와 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 침(沉)이 백성에게 공덕이 있어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건원릉(建元陵) 참봉(參奉) 윤(尹)에 이르러 처음 청송에 살게 되었고 대대로 유업(儒業)을 계승하였다. 고조는 윤모(允模)이고 호는 남와(南窩)이니, 매야(邁埜) 활(活)의 아들로 계부(季父) 숙(淑)의 후사를 이었다. 증조는 문희(汶熙)니 효행으로 알려졌다. 조부는 효원(孝源)이고 호는 석간(石澗)이니 일찍 정재(定齋) 류선생(柳先生) 문하에 수학하여 고제(高弟)가 되었다. 부친은 석화(錫華)이고 호는 청석(淸石)이니 서산(西山) 김선생(金先生)을 사사하여 경술과 문장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모친은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니 학봉(鶴峰) 선생의 후손 주모(周模)의 따님이다. 부녀자의 덕행과 규범이 있었다.
고종 임오년(1882) 12월 5일에 공은 마평(馬坪)의 선대부터 살던 집에서 태어났다. 거동과 용모가 청수하고, 성품과 도량이 온후하였다. 젖니를 갈 무렵에 조부가 시험 삼아 글자를 가르쳐 주었는데 들으면 곧바로 깨달아 이해하고 또 잊지 않으니, 기뻐하며 말하기를 “잘 가르치고 길러 성취하게 하면 가전(家傳)의 문맥이 이 아이에 힘입어서 실추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4,15세에 이미 경전(經傳)을 다 읽고 집안의 명으로 《중용》을 가지고 졸수재(拙修齋) 류공(柳公)에게 학업을 청하여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을 반드시 끝까지 탐구한 뒤에 그만두니 자주 스승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널리 과거공부에 필요한 시문을 익혀 또한 명성이 있었으나 시대의 상황 때문에 일찍 폐하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조부와 부친 아래 두루 명을 받들어 따르고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다. 귀로 듣고 눈으로 익혀 스스로 유가(儒家)의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고, 행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학문하여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었다. 3대의 규화(奎華)가 한 집안에 참으로 밝게 빛나니 이것은 집안이 형통하게 되는 운세였다.
정유년(1897, 고종 광무1)에 조부가 돌아가시고, 몇 년이 안 되어 모친의 상을 당하고, 이어서 두 배위를 잃고, 또 재능 있는 두 아들의 죽음을 겪어 곤궁한 정상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마음을 참고 견디어 능하지 못한 것을 증익하여 오직 연로한 부친의 상심을 근심해서 집안을 단속하여 빈틈없이 치밀하게 다스리고, 부친을 섬기고 선조를 받드는 법도에 혹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가문이 넓고 커서 응대함이 매우 번거로웠고, 동남의 빈객과 벗들의 행차가 서로 이어졌으나 한결같은 뜻으로 정성스레 접대하였고, 더욱이 선대의 벗에 대해서는 예를 행함이 더욱 공손하였다. 부친이 병환으로 해를 넘기도록 오래 앓자 탕약을 달이고 음식을 올림에 집안사람을 대신 시키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니, 이는 남들이 미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갑자년(1924) 겨울에 마침내 부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애통해 하여 뼈가 앙상히 드러났고, 상례의 절차와 슬퍼하는 심정이 지극함을 갖추었다. 유문을 수습하여 누차 교정해서 정리하여 7책을 이루어 세상에 간행했다. 조부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고, 조모의 무덤을 이장한 일은 모두 부친이 미처 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그 유지를 따른 것이었다. 부친을 대신해 계부를 섬겨 날마다 반드시 달려가 살피기를 늙도록 폐하지 않았다. 6형제가 자리를 함께하여 정매(征邁)의 즐거움이 있었는데 만년에 와서 둘째와 막내 두 아우가 서로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공회(孔懷)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여 말하면 곧 눈물을 떨어뜨렸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이단의 설이 멋대로 흘러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나 효경(孝敬)의 가법(家法)은 무너뜨릴 수 없다.”라고 하고, 자제들을 훈계함에 자애와 엄함을 함께 지극히 하고 종족을 대함에 화목을 위주로 삼았다. 문을 닫고 은거하면서 수양하여 오직 선조의 법도를 계승하고 후손에게 규범을 남기는 것을 필생의 일로 삼았다. 돌아가실 즈음 부모님 산소에 비석을 세우는 것과 부친이 편찬한 《경설류편(經說類編)》을 간행하는 일을 신신당부하고 편안히 돌아가시니, 곧 계묘년(1963) 5월 9일이다. 향년 82세였다. 마을 앞 율곡(栗谷) 남쪽 기슭 사향(巳向)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니 태정(泰正)의 따님이다.
3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병춘(丙春)·정춘(正春)·왕춘(旺春)이고, 딸은 김상호(金相鎬)·남항수(南航洙)·김흥식(金興植)·권홍수(權洪壽)·이현근(李鉉根)의 처이다. 병춘의 아들은 점(點)·묵(默)·걸(杰)이고, 딸은 금만동(琴晩東)·최경(崔梗)의 처이다. 정춘의 아들은 훈(勳)·작(焯)·혁(爀)·찬(燦)·현(炫)이고, 딸은 김태년(金泰年)의 처이다. 왕춘의 아들은 종욱(鍾煜), 성욱(晟煜)이다. 김상호는 3녀를 두었다. 남항수는 4남 1녀를 두었다. 김흥식은 3남 2녀를 두었다. 권홍수는 2남을 두었다. 이현근은 1남 1녀를 두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이러한 재주와 자질로 이러한 가정에 처하여 경륜과 포부가 하나도 쓰이지 못하고 암혈에서 삶을 마치니 시대가 그렇게 한 것이었다. 팔순의 사업이 다만 일가를 고르게 잘 다스리는 데에 그쳤으나 이 또한 다스림을 한 것이니 베푼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시문과 잡저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으니 후세에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명(銘)을 붙인다.
시를 듣고 예를 들으니 聞詩聞禮
말씀하신 가르침 받든 것이었네 承咡詔也
말을 돌아보고 행실 돌아보니 顧言顧行
학문의 힘에 바탕하였네 資學力也
낭릉의 가정에 朗陵庭畔
그대로 훌륭함이 이어졌네 簷溜滴滴
그 명성 더욱 펼쳐지니 厥聲彌張
진실로 명가의 훌륭한 적손일세 允矣名家肖嫡
책심(責沈) : 동시대의 군자를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책망하는 말이다. 송(宋)나라 진관(陳瓘, 1057∼1124)이 명도 선생(明道先生)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동남에 생장하여 정백순(程伯淳)이 있는 줄 알지 못하였다.”라고 탄식하고, 〈책심문(責沈文)〉을 지어 자책하였다.
정재(定齋) 류선생(柳先生) :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을 말한다.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대평(大坪)에서 살았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1627∼1704), 밀암(密菴) 이재(李栽, 1657∼1730),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을 통하여 전해지는 퇴계 학맥의 연원(淵源)을 계승하였다. 저서로는 《정재집》이 있다.
서산(西山) 김선생(金先生) :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을 말한다.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11대손이고,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서산집》 이 있다.
위기지학(爲己之學) : 자신의 내면에 가진 인의 도덕을 닦는 학문을 말한다. 공자가 “옛날의 학자는 자신을 위했더니, 지금의 학자는 남을 위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말이 있다. 《論語 憲問》
규화(奎華) : 문명(文名)이 성대함을 말한다. 하늘의 별자리인 28수(宿) 가운데 하나인 규수(奎宿)가 문운(文運)을 주관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정매(征邁) : 형제간에 서로 왕래하며 강론하고 연마하는 것을 말한다.
공회(孔懷) : 형제간의 상사에 걱정하고 슬퍼함을 말한다. 《시경》에
사상의 두려움에 死喪之威
형제가 심히 걱정하네 兄弟孔懷
라고 하였다. 《詩經 小雅 常棣》
낭릉(朗陵) : 후한(後漢) 때 낭릉후상(郞陵侯相)에 봉해진 순숙(荀淑)을 가리키는 말이다. 순숙에게 여덟 아들 검(儉)·곤(緄)·정(靖)·도(燾)·왕(汪)·상(爽)·숙(肅)·전(專)이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나서 당시 사람들이 팔룡(八龍)이라고 불렀다. 《世說新語 德行》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