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쉬운 용어, ‘스파이’는 그다지 좋은 느낌을 주지도 받지도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나쁜 사람이라는 인상이 높습니다. 이 용어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봅니다. 간첩, 밀정, 첩보원, 정보원, 비밀첩보원, 첩자, 염탐꾼, 공작원 그리고 좀 어려운 옛말인 세작 등이 있습니다. 직업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 직업은 따로 있으면서 그 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용어에 따라서는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있고 거부감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오래 전 ‘007’ 시리즈를 보고 나서 ‘비밀첩보원’이라는 사람과 그 활동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사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느 쪽 편이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스파이나 첩보원은 암살자와는 다릅니다. 스파이가 암살을 감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임무는 그것이 아닌 줄 압니다. 상대방 또는 상대국, 곧 적국의 중요 정보를 빼내오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입장으로서는 자칫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또한 상대방의 숨겨진 중요 기밀사항을 빼내려 애씁니다. 이를 위해 전문 요원을 투입할 수도 있고 일반인 중에서 할 만한 사람을 발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위험부담을 안게 됩니다. 그에 상응한 대가를 약속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임무를 맡는 사람이 사명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대의명분 중에 나라를 위한 일은 누구나가 가장 큰 가치로 여깁니다. 적국의 밀정이라면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할 죄인이지만 우리 측의 밀정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주고자 하는 애국자입니다. 때문에 그 어감이 다소 부정적이라 해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 자신 일제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하던 친일파 밀정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 인하여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많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측에서 일본의 주요 기관이나 고급인사들과 교류하던 밀정도 있었습니다. 각각의 입장에서 다르게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암살자를 저들은 극악무도한 살인자라고 부르지만 우리 쪽에서는 존숭할 애국자로 여깁니다.
스파이는 일의 성격상 조국과 적국 사이를 오가며 활동합니다. 그 스파이를 무작정 잡아내서 처형하기보다는 그가 지니고 있는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때문에 가끔은 대상인 그 첩보원을 생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때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 거액의 돈이나 미인계입니다. 미인계라고 꼭 여성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서 여성일 수도 남성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007 시리즈에는 소위 ‘본드 걸’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첩보원 제임스 본드가 미인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또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한 외모와 실력 그리고 재력까지 두루 갖추고 있기에 적합하지요.
세상사가 매우 다양하지만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돈 문제로 많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사랑 문제입니다. 어떤 문제 속에 남녀관계가 개입되면 사건이 좀 더 까다롭고도 다채로워집니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것이지요. 극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마지막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조국이냐, 사랑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갈등하게 만듭니다. 조국을 등지면 배반자가 되고 사랑을 등지면 마치 인간을 포기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조국을 선택하면 존경을 받지만 사랑을 선택하면 말 그대로 사랑을 받습니다.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양쪽을 다 가지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 일은 드뭅니다.
영국인 출판인 ‘발리 블레어’는 소련 여행 중 소련 작가 ‘단테’를 알게 됩니다. 나중에 그의 연인 ‘카티야’를 통하여 원고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만 영국 정보원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단순한 소설 원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한 정보국에서는 이 세 사람을 엮습니다. 일단 블레어를 통해 카티야를 만나야 하고 카티야를 통해서 단테를 만나 그 속뜻을 캐내야 합니다. 그러니 블레어가 카티야를 만나도록 주선하고 나아가 가까이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이끌게 합니다. 그런데 소련의 입장에서는 단테가 반체제 인물이기에 무엇이 유출되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카티야는 이미 두 아이를 기르는 엄마이기에 매우 조심합니다. 두 아이와 돌봐주던 나이든 친척까지 생명이 위협을 느낍니다.
도청장치로 무장(?)한 블레어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그만 카티야를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어떻게든 카티야와 식구들을 구해내야 합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영국의 정보원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러시아 연인과 가족을 건져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이 기다리는 것을 알고 있고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가족을 빼내기 위해서는 일단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치를 취하고 블레어는 먼저 타국으로 도피합니다. 헤어지며 카티야의 귓속에 소곤댑니다. ‘당신이 내 조국입니다.’ 복잡하게 이어지는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로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영화 ‘러시아 하우스’(The Russia House)를 보았습니다. 1990년 작입니다. 총성 없는 스파이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