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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신영복교수 특별강연)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3주년 개관기념 특별 강연으로 마련한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의 강연이 열렸다. 강연장소가 청소년센터이기에 강연 주제를 ‘工夫’로 잡았다는 사회자의 설명이 있었다. 신영복교수의 강의 내용을 요약정리해서 실으려 한다.
이 센터를 개관한 뒤 한 번 오려고 했는데 늦게 왔다. 사회자가 저를 소개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 제가 감옥에 오래 있었다. 책 소개하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라고 했는데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교관을 했다. 그 당시 학생운동 사건으로 감옥에 가서 1968년부터 1988년까지 무기수로 수형생활을 했다. 오늘 ‘공부란 무엇인가’로 이야기하려하는데 예화를 제가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공부 이야기를 하겠다.
공부-공부의 의미를 넓혀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자로 쓰면 工夫, 工-위의 ㅡ가 하늘이고, 아래의 ㅡ가 땅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한 게 工이다. 天과 地,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工이다. 夫는 위 ㅡ가 天이고, 아래 ㅡ가 地인데 연결하는 게 사람 人, 사람이 연결한다. 세계를 인식하고 공부하되 그 주체가 사람이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게 공부이다.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집에 가서 키우기 바란다. 공부는 세계와 인간의 인식이다.
옛날 갑골문, 중국에서는 공부를 이렇게 썼다. 호미, 도끼, 농기구를 옆에 두고 있는 어떤 사람, 동곳을 찔렀다는 것은 성인을 뜻한다.
공부란 무엇인가? 세계를 공부하는 것은 농사짓는 것이 공부이다. 땅 파고, 씨를 뿌리고, 키우고, 또 다른 종족과 전쟁을 하고. 옛날에는 전쟁과 사냥도 생산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런저런 실천 활동이 공부이다. 살아가는 자체가 공부이다. 이 세상이 어떤 것인가 깨달아가고, 자기의 역할이 뭔가를 깨달아가는 것이 공부이다.
그런 공부는 달팽이도 한다. 한여름 비바람 속에서 자기 머리만한 물폭탄을 맞아가면서, 바람에 떨어지지 않도록 애 쓰면서, 책은 안 읽지만 공부한다. 세상과 혹독하게 부딪히면서 온몸으로 공부한다. 공부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이 하는 것이다. 생명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식이 공부이고, 노동이다. 오늘은 인문학이라던가, 과학이라던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공부의 어떤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려 한다.
사람- 세상의 주체가 사람이다, 삶과 사람, 어원이 똑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을 생각하면 70%가 사람과의 일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세상사는 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시대의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고,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이야기하겠다.
졸업식에 쓰는 사각모 같기도 하고 감옥 같기도 하다. 제가 20년 동안 있었던 감옥이 대학이었다고 말한다. 2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바깥에 있었다면 절대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났다. 감옥에서 만나는 사람은 전철에서 사람과 만나는 것과 다르다. 한 방에서 5년, 6년을 만났다. 교도소 20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한다.
고리키가 『나의 대학시절』이라는 성장소설을 썼는데, 고리키가 초등학교 3학년까지밖에 안 다닌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써서 학창 시절에 찾아 읽었다. 볼가강 옆에 있는 까방이라는 도시의 빈민촌에 3년간 살았는데, 그 시절을 일생의 대학시절이라고 한다. 오늘은 여기서 만났던 이야기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젊었을 때 목수였다고 한다. 땅바닥에 집을 그렸다 집을 그리는 순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여러분이 집을 그리는 순서를 보면 지붕부터 그린다.
이 분은 주춧돌부터 그리고 올라가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다.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이 나인데 충격을 받았다. 일하는 사람은 집 짓는 순서대로 그리는구나. 책에서 학교에서 공부한 나는 지붕부터 그리는구나.
나랑 한 방에 있었던 친구인데 그때 서른두세 살쯤 되었다. 이름이 대의(大義)였다. 큰 대자, 옳을 의, 그때 절도 전과 3개가 되었다. 이 친구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얼마나 속상할까 생각했다.
이름을 대의라고 지어서 크게 옳게 살거나, 대의를 위해서 죽으라고 저렇게 멋진 이름을 붙였는데 벌써 전과 3범이니. 그런데 이 친구가 말하기를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한다고 했다. 자기는 부모가 없는 고아인데, 돌 지나고 자기를 버린 장소가 광주 도청 앞에 있는 대의동 파출소 앞이었다고 한다. 나는 문자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버릇이 있다. 내게 있어서 공부는 문자이다. 대의라는 친구보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출소 후 일부러 대의동파출소에 찾아갔는데 진짜 있었다.
노인이야기이다. 전과가 20개인지 30개인지 자기도 잘 못 센다. 나이가 70살이 넘었고, 가족이 없고 접견 오는 사람이 없었다. 감방 안에서 아무도 노인 대접을 안 해 준다. 이 분이 하는 역할이 하나 있었다.
신입이 서무과, 보안과 서류 대조하고 들어오면 밤 9시쯤 된다. 식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신입이 들어오면 호되게 신입식을 치른다. 그 긴장된 순간에 신입자를 자기 앞으로 부른다. 노인이 물어보는 간단한 질문을 한다. 몸 아픈 데는 없느냐, 징역을 얼마 받았는지 묻고는 금방 자기 이야기를 죽 한다.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자기 일생을 이야기한다. 일제 때 만주벌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죽 하는데 아주 길다. 이 노인이 왜 신입이 들어오자말자 하느냐 하면 2-3일 지나면 이 노인이 감방에서 별 볼일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긴 이야기를 안 들어준다.
3-4년 같은 방에 있던 우리는 그 이야기를 또 듣는다. 간혹 가다 빠뜨린 이야기가 있으면 채워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노인의 이야기가 자꾸 각색이 된다. 창피한 이야기는 빼고, 무용담은 부풀려서 상당한 드라마의 주인공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노인네 또 구라 풀고 있네’ 한다.
어느 날 이 노인이 창앞에 서서 하염없이 바깥을 보고 있었다.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는 뒷모습이 아주 쓸쓸해 보였다. 저 노인이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자기가 실제 살았던 삶보다는 신입자에게 들려주는 각색된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각색된 삶을 살고 싶었지만 일제 때 험난한 삶을 살았는데, 그 삶이 이 사람의 인생을 각색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인의 오빠가 감옥에 같이 있었다. 이 사람은 누이동생을 만나면 잡아죽인다고 한다. 누이동생이 12살, 그 오빠가 13살일 때 저녁에 서울역에 내렸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져 두세 시간을 울면서 찾았는데도 못 찾았다. 그 누이동생을 10년 후에 딱 마주쳤다. 서울역 옆 양동 창녀촌에서 마주쳤다. 오빠가 못 알아봤는데 누이동생이 먼저 알아보고 도망을 쳤다. 그래서 잡으면 죽인다고 했다. 그 오빠가 서울을 증오한다.
왜 서울을 증오하느냐하면 자기 누이동생을 창녀로 만든 도시이니까. 이 이야기는 그 도시가 인간을 어떻게 키워내는가를 보여준다. A라는 50가구의 마을과 똑같이 50가구의 B라는 마을이 있다. 12살의 의지가지없는 소녀를 투입한다. 10년 후에 A 마을은 여고까지 졸업시켜서 그 마을에 있는 농협에 취직해서 출퇴근하고 있고, B라는 마을에는 창녀로 살고 있다. A와 B마을의 삶의 가치가 차이가 있다. 우리의 삶을 어떤 기준으로 볼 것인가? 그 친구가 나가서 누이동생을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도시를 평가하는 준거로서의 인간은 대단히 중요하다.
교도소에서 만기가 되면 만기 인사라는 걸 한다. ‘제가 내일이 만기라서 만기빵으로 간다’고 인사를 하러 온다. 보내는 사람은 마음잡고 잘 해라 하고 헤어진다. 나간 뒤 얼마 안 되어 또 들어온다. 내가 무기수니까 수많은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한다. 대전교도소에 15년 동안 있었는데 만기 인사를 7번을 한 친구가 있었다.
나가서 직장도 못 잡고 집도 없다. 마음 잡고 참답게 살라는 말을 못한다. 이번에는 잡히지 말고 잘하라고 한다. 감옥에 살 때는 아주 반듯하다. 그 사람의 처지가 워낙 열악해서 잘 살 수 없다. 돈이 있으면 도둑질을 안 한다. 돈 있을 때는 도둑질하기 싫으니까 안 하다가 급하면 위험한 상황에서 도둑질을 해 잡혀온다. 노인들끼리 평가를 한다. 저 사람은 1년 안에 들어온다, 2년 안에 들어온다고 하면서 정확하게 맞힌다. 세상물정을 많이 겪은 사람은 잘 안다. 대단히 힘든 사람은 그 처지와 함께 그 사람을 봐야 한다.
나이 사십이 좀 지났는데 접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접견을 왔다. 3-40분 후에 접근 마치고 왔는데 ‘누가 왔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했다.
물어물어서 알아낸 내용은 자기가 세 살, 자기 누이동생이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난한 집안이라 엄마가 남매를 키울 여력이 없어서 삼촌네에 맡겨놓고 먼 도시로 돈 벌러 갔는데 안 돌아왔다. 들리는 소문에는 잘 사는 집에 재가해 갔다고 했다. 누이동생은 삼촌네에서 자랐는데 오빠는 가출해서 도시를 전전하다가 감옥에 들어온 것이다.
접견 온 사람은 그 엄마가 재가해서 똑 같은 남매를 키웠는데 아들이었다. 접견하면서 모르는 사람이라 누구냐, 누구냐하고 묻다보니 시간이 다 갔다.
그렇게 알게 되어서 “당신 왜 왔느냐? 남의 감옥살이하는 거 확인하러 왔느냐? 가라고.” 했더니, 돌아서서 가면서 대단히 죄송하다고 했단다. “만약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다면 내가 그 속에 있고, 당신이 이 밖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죄송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감동을 먹었다. 오래 있으면서 그 사람의 길고 긴 인생이야기를 알면 나쁜 사람이 없다. 다 이해가 간다.
공부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70%가 사람과의 일이라고 했다, 인간관계를 잘 하는 사람은 능력이 있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갖고 갈 것인가?
화요일은 기독교 집회, 수요일은 천주교 집회, 목요일은 불교 집회를 한다. 집회별로 신자를 모은다. 예배도 보고 미사도 보고 법회도 본다. 종교집회가 있으면 바깥에 있는 신도들이 재소자들을 위해 위문품을 가지고 온다. 위문품이라면 빵 두 개 든 봉지, 박스에 넣어서 가져온다.
빵이 있다는 종교집회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신자가 아니라도 기를 쓰고 가려한다. 떡이 있는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사람이 대전교도소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가 나이고, 하나는 창신꼬마이다. 창신동에서 자란 꼬마인데 못하는 게 없다.
그 친구와 내가 대전교도소 떡신자로 소문이 났다. 떡이 있는 모든 집회에 나타나는 사람이다. 저는 나가는 방법이 있다. 반장이기도 하고 양화공이었다. 기술자이고 무기징역이라, 어떤 교도관은 신선생은 신자도 아닌데 가느냐고 한다. 그러면 나는 징역이 무기이기 때문에 여러 교회를 나가봐야 한다고 하고 나간다.
세상을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닐까? 개별적 존재가 자기를 배타적으로 고집하는 것, 그러면서 다른 것들을 흡수해서 자기를 키우려는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애정으로 포용하고, 좋은 것, 궂은 것들을 같이 할 수 있는, 현장에 있어서 삶을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 공부이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먼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집회에 가면 창신꼬마가 왔나 안 왔나 라이벌이니까 꼭 봐야한다. 창신꼬마는 박스에 든 위문품과 참석자 인원을 계산해서 줄 빨리 서라, 늦게 서라고 재빨리 알려준다. 위문품 수가 모자랄 때는 줄을 빨리 서야 하고, 남을 때는 늦게 서야 남는 걸 하나 더 주기도 한다.
떡신자라는 별명이 교도소에서 인간관계를 굉장히 부드럽게 했다. 떡신자라는 별명은 교도소에서 쪽팔리는 별명이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뭔가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그림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장면이다. 공부란 것은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것이다. 더 멀리 더 넓게 바라보는 일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책상 위에 올라가서 보면 이렇다는 거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자기 이해관계, 자기의 소유에 철저하다. 개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집단도 우리 회사, 우리나라, 자기라는 개별적 존재를 중심으로 그걸 키워내려는 운동을 200년, 300년 간 쭈욱 해 왔다.
개인적 논리가 무너질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균열을 보이는 피라미드, 양극화를 보이는 우리 사회, 강력한 몇몇 국가가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세계질서일 수도 있다.
사실은 이 밑에 중하부가 무너지면 꼭대기도 자기 위치를 지킬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이 물통의 물을 어디까지 채울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런 모양의 물통과 같지 않을까? 그 속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그림자를 따라잡아야 한다. 가망 없는 질주를 해야 한다. 그림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옛날 규율사회에는 강제로 성과를 높였는데, 요즘은 자기 스스로 성과를 150% 초과달성을 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질병은 바깥에서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아프게 하는 우울증이다.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그림이 아닐까? 편하게 앉으려고 만든 의자를 저렇게 들고 있는 것은 엄청난 역설이다. 자기가 만든 생산물로부터 오히려 억압받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선출한 권력으로부터 오히려 소외되고 있고, 자기는 원치 않는데 갈증을 느껴야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부란 이러한 생각에 갇혀 있는 우리들의 머리를 깨트리는 것이 공부이다. 공부란 망치로 하는 것이다.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이다. 우리는 안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 갇혀 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로 중세 때는 마녀가 있었다. 2-300명의 마녀가 실제로 처형을 당했다. 중세에는 마녀가 실제로 있었겠나? 자기 자신이 마녀라고 승인하고 처형당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끔찍하죠.
우리 시대 우리가 갇혀 있는 문맥의 틀이 굉장히 많다. 이 틀을 깨트리는 것이 공부이다. 깨트려야 삶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다.
결혼 6개월 만에 감옥에 들어온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탈기가 된 모습으로 처가 이번 달에 몹시 아파서 접견 못 올 것 같다고 했다. 양말을 보냈는데 평소보다 두 배 세 배로 진하게 향수를 뿌려왔다는 것이다. 접견 못 오는 마음을 향수의 양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 달 처가 접견을 왔다. 이 친구는 자기가 감옥에서 느끼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었다.
자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처의 고통이 진짜 고통이었다. 자기에게 오는 고통은 모두 견딜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아픔이 자기한테 고통으로 오는 경우에는 이건 달리 방법이 없다. 가장 침통한 아픔은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기쁨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침통했던 아픔도, 가장 큰 기쁨도 사람한테서 오는 것이 아닐까?
아까 개별적 존재를 고집한 그림을 보여줬는데, 세상은 함께 가는 것이다.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일 수 있고, 당신의 기쁨이 나의 기쁨일 수 있다. 이론물리학에서는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 물질이 입자가 아니라고 한다.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고, 수퍼 스트림- 움직이는 에너지의 끈이기도 하고, 멤브레인-막이기도 하다.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확률로서 존재한다. 오늘날 양자역학에 입증되고 있는 가설체계이다. 궁극적으로 쪼갤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함께 가야하는 것이다.
잠자는 토끼를 거북이가 깨워서 같이 가야 한다. 토끼 깰까봐 발소리 죽여서 조용히 지나가는 것은 굉장히 비겁하다. 함께 가는 문화가 필요하다.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고, 함께 가면 또 길이 생긴다. 공부란 것은 길 끝에 찬란한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고행 그 자체가 공부가 된다.
고행 끝에 성과, 성공이라는 결과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부란 것은 참 먼 길이다. 남이 시켜서 하면 안 되고, 자기가 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된다.
네덜란드의 동화작가이며 외과의사이기도 한 반 에덴이라는 분이 쓴 『어린 요한』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런데 바깥에 나와서 이 책을 찾으니 없었다. 꿀벌, 호박, 버섯 온갖 것에 관한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했다. 버섯이 길에 죽 나 있었다. 아버지가 버섯 중에 하나를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애야, 이게 독버섯이야”라고 했다. 그렇게 지목 받은 버섯이 충격을 받아서 쓰러진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 버섯을 일으키고 위로한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버섯은 버섯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더 중요하게는 사람들 식탁의 논리이다. 이게 버섯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아까 우리는 문맥에 갇혀있다고 했다. 우리는 상품 문맥에, 자본 문맥에, 분단 문맥에, 수많은 문맥에 갇혀 있다. 그 문맥을 깨트리고 자기의 이유로 걸어가는 것, 자기의 이유를 분명하게 자각하는 것, 그것을 할 수 있는 곳이 변방이다. 『변방에서』는 제가 쓴 책 제목인데 꽃은 변방에서 피는 것이다. 중심부는 자기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연암 박지원은 열여섯 살까지 글을 몰랐다. 율곡은 세 살 때 한시를 지었다는데 열여섯 살에 장가를 갔는데 새신랑을 떠 보았는데 글을 몰랐다. 그래서 장인 이보천과 처삼촌 이학천이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3년 동안 공부를 시켰다.
어려서부터 변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선시대 지배했던 고문투, 변려문의 문체, 교조주의 성리학에 갇히지 않고, 사유의 자유를 가졌기에 불후의 명작을 쓰지 않았을까? 변방이 창조공간이다. 공부는 우직해야 한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우리한테 맞출 수 없을까?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지혜로운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 때문에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 나간다. 세상을 바꾸는 과정에서 자기가 조금씩 깨닫고 성장하고, 자기를 키워나가는 것이 공부이다.
고귀한 인간적인 영혼을 가지는 예화로 적절할지는 몰라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초원을 한동안 달리고 나면 말무리를 멈추고, 자기가 달려온 초원을 돌아보며 한동안 서 있는다고 한다.
영혼이 미처 쫓아오지 못했을까 봐 같이 가려고. 더 빨리 목표에 도달했지만 영혼을 두고 가면 안 된다. 영혼을 우리말로는 얼이라고 하는데 얼이 빠지면 안 된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고 동질집단이 아니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강의했다. 이 이야기를 연결하기 바란다. 제가 쓴 글씨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난다’. 공부는 자기 삶의 골목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시간 조금 넘는 강연이 끝났다. 좀 어려운 것 같지만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던져준 강연이었다. 특히 신영복교수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서 대단히 흥미로웠다.
강연이 끝나고 참석한 길 건너 묵동에서 왔다는 이진영씨의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평소에 만나보고 싶은 분이었는데 짧지만 강렬한 강연회였던 것 같아요. 몸으로 살아왔던 세월을 이야기해 주셨으니까요. 묵동에 사는데 심리적 공릉동 주민입니다.”
이진영씨는 여기서 하는 프로그램에 3년 동안 참여했다며 다른 지역에서 이런 센터가 생기면 배운 것을 적용시키고 싶어했다.
어린이, 청소년, 어른이 함께 한 강연이지만 모두 집중해서 듣고 예화에서 웃음소리도 크게 들리고 즐거운 강연이었다.
신영복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 등 많은 책을 냈다.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인문학습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나우온 Ⓒ 김바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