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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계속되는 전쟁-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의 무서움보다 더 무서운 것을 생각하며, 그러나 소망 중에 보내는 6월의 마지막 날
보훈의 달 6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6.25 전쟁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다가 신앙의 전쟁을 하는 교회(the Christian church on earth regarded as engaged in a constant warfare against its enemies, the powers of evil —distinguished from church triumphant)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결국은 완전히 승리할 것이요, 지금도 그 승리를 ‘맛보고’ 살아가지만, 오늘 하루하루는 여전히 싸우며 나아가는 우리다. 이미 이겼는데 여전히 싸우다니 참으로 묘한 진리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동시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고, 사명이 있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매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삶이 있다.
1.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6.25 전쟁을 읽어본다.
6.25 전쟁(六二五戰爭) 또는 한국 전쟁[35](韓國戰爭, 문화어: 조선 전쟁/조국해방전쟁[36], 영어: Korean War, 중국어 정체: 韓戰/朝鮮戰爭, 중국어 간체: 韩战/朝鲜战争, 러시아어: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삼팔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이 침공당하면서(남침)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유엔군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쟁이다.
전쟁 이전 미리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3시 30분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삼팔선 이남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진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며 내만주에 핵폭탄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를 1·4 후퇴라고 한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다시 인민군을 몰아붙여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1951년 6월 23일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포로 송환 등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아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다양한 명칭
대한민국 정부와 대다수의 언론은 공식적으로 6·25 사변 혹은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내전적 의미를 강조하는 경우 한국동란, 6·25 동란이라 불린다.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 6·25라고 한다. 영어 원문의 번역을 통해 한국 전쟁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조선전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가끔 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 (抗米援朝/抗美援朝) 이라고 부른다. 미국과 캐나다 등 서구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벌어져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44]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부르기도 한다.
배경
1945년, 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삼팔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소련과 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했고 준비를 해 나갔다. 소련은 소련군이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남침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중국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반면에, 미국은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1949년 6월)하고,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선언(애치슨 선언, 1950년 1월)을 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국은 소련 공산권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였으며, 소련 역시 그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 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김일성은 수차례 소련의 서기장인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무려 48회나 남침 허락 내지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조선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력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38선 이남에는 미군이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기 지원을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계속해서 스탈린을 설득하고 있었다. 일부 역사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였으며 이리하여 스탈린은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최신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전쟁의 결과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그러나 민간인 숫자가 하도 많아서 군인들에 비하면 확률적으론 안전하긴 했다. 이 전쟁에 의해 민간인은 물론 군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서 사상을 당할 확률이 90%에 달했다. 편견과 달리 민간인이 사상을 당할 확률은 군인들처럼 높지 않아서 전후에도 정상인 민간인들이 대다수였다. 전라도인들은 여러 원인으로 인하여 가장 많이 학살을 당했다.
6.25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본이 만들어 놓은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6.25 전쟁으로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더 많은 내용은 직접 위키백과에서 읽어보면 좋겠다. 이런 구체적인 자료를 보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유튜브만 보면서 왜곡된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는 정직한 자세로 역사적 사실을 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요즘 우리나라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그 증거로 중국과 북한의 밀착과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 그리고 그 결과로 더욱 강해진 북한의 핵과 미사일의 위험을 말한다. 어떤 분은 나라의 혼란한 상황이 마치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비슷하다고도 말한다. 좌우 갈등,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전쟁이 아예 표면에 드러난 상태라는 것이다.
성경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아담이 아니라 하와가 있는 곳에 뱀이 찾아와 죄를 짓게 한 일부터 생각한다(창 3;1-7).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아담은 그때 하와와 함께 있었을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었을까? 형인 가인은 동생 아벨과 들에 있을 때에 동생을 쳐죽였다. 그는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더 약한 동생을 쳐죽였다. 사라는 이삭이 젖을 떼는 날 대연을 베풀고 크게 기뻐하던 자리에서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14살이나 아래인 이삭을 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창 21:8-9). 당시 이스마엘의 나이는 17세 가량이었으니 이삭으로 인해 자신의 위치와 상속권이 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요, 그래서 이스마엘은 어린 동생 이삭을 희롱하며 못살게 굴었을 것이다. 에서는 자기에게서 장자권을 가져가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을 20년이 지나도(창 31:38, 41)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애굽 왕 바로는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루도 생명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이 무려 10년 동안을 죽이려고 할 때 도망하고 또 도망해야 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헤롯 왕은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는 다 죽이라고 하였다. 천사의 지시와 인도로 애굽에 피신하지 않았더라면 아기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을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과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가두고 죽였으니 그중에 유명한 자가 나중에 바울로 더 잘 알려진 사울이었다. 그때 죽임을 당한 대표적인 분이 스데반 집사다. 그러나 바울이 회심하여 복음을 전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았다. 초대교회는 유대교로부터, 그리고 나중엔 로마 제국으로부터 무시무시한 핍박을 받았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교가 얼마나 심한 박해를 가했던가. ‘마녀사냥’이니 ‘종교 재판’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여러 이슬람 국가들과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기독교와 교회에 가하는 핍박은 얼마나 심한지 모른다.
언제 우리나라가 평안한 상태로만 지내왔던가. 언제 기독교회가 잔잔한 항해만 해 왔던가. 항상 어려움이 있고, 위험과 두려움과 슬픔이 함께하지 않았던가. 초대 교회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했다. 초대교회가 형성된 후부터 지금까지 70,000,000명 정도의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를 당했다.(Antonio Socci, Nuovi Perseguitati: Indagine sulla Intolleranza Anticristiana nel Nuovo Secolo del Martirio (Alexandria: Piemme, 2002)) 공개적으로 순교된 사람들만 헤아려도 이 정도니 비공개적으로 순교 당한 자들까지 세자면 100,000,000명이 족히 넘을 것이다. 6·25 전쟁 때 북한 공산군이 압록강까지 후퇴하게 되었을 때, 북한 정권은 북한교회 지도자들이 미군의 앞잡이가 되어 북한의 양민을 학살했다고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전가하여 기독교인들을 100%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지금 이 시간도 예수님을 믿는 사실이 적발되어 순교의 피를 흘리는 성도들이 있어서 저 북한 땅은 어제도 오늘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 그 피는 결국 북한 선교의 밑거름이 되어, 북한의 선교의 문이 열려졌을 때 북한 동포들을 구원할 것이며, 북한 교회를 재건하면서 통일 한국의 기초를 놓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너무 위험하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걱정과 불안과 분노와 기도가 회리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지금까지 생각해 본 결과는 “그래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다. 다니엘에 보았던 환상의 최종 결과나 사도 요한이 보았던 예수님의 계시의 최종 결과는 모두 ‘인자’되신 분, 즉 메시야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므로 모든 전투를 이기고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다는 사실이다. 다니엘이 보았던 여러 제국들이 무엇을 위해 몸부림을 쳤을까? 얼른 보기엔 세상의 영토 확장과 통치력 확장이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약속된 메시야를 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전투였던 것 같다. 즉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대적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어찌 그 일이 성공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뤄지고, 그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나서 모든 나라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입으로는 그의 말씀이 참되며 그의 하시는 일이 의롭다고 고백할 것이다.
3. 금산교회 탐방기
어제는 교회의 제 1남선교회 행사로 기독교 역사 탐방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김제 금산교회를 방문했다. 익산의 두동교회와 더불어 “ㄱ” 모형으로 지어진 교회인데 그 당시에 남녀를 구별하던 유교적 관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남녀가 합쳐서 예배를 보지 못하게, 한쪽 날개는 남자 공간, 한쪽 날개는 여자 공간으로 나누어서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금산교회에 가면 꼭 듣고 감탄하는 이야기가 있다. 좀 길지만 처음 듣는 분들을 위해 비교적 자세히 인용해 보고자 한다.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 이야기
이자익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탑정리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님을 잃고 여섯 살 때에는 어머님도 잃었다. 친척집에서 늘 쇠꼴베러 나가는 삶이 싫어 열두 살 때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에 이르고 금산까지 오게 된다. 금산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을 이자익도 듣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금산에서 거상으로 유명하면서도 넓은 땅을 가진 조덕삼 댁을 우연히 찾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신을 마부로 받아주어 생활하게 되었다. 이자익은 머슴으로 살았지만 집안 아이들이 한문 공부하는 것을 들으며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명석했다고 한다. 이런 때에 테이트 선교사의 방문으로 조덕삼과 이자익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금산교회를 함께 섬기게 된다. ‘한 명은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한 명은 머슴’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바로 ‘유명한 일화인 금산교회 장로선출’ 이 있게 된다. 교회의 장로를 세우는 선거였다. 조덕삼은 김제에서 두 번째라면 서러울 만큼의 부자였고 금산교회 운영에도 많은 후원을 하고 있었다. 조덕삼은 이자익보다도 15살이나 많았고 금산교회의 설립자였으며 인격적이나 신앙적으로도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장로로 선출된 사람은 주인 조덕삼이 아니라 마부 이자익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 결과에 조덕삼과 이자익도 놀랐겠지만 선출에 참가한 선교사들도 놀랐다. 갑오년(1894)에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강한 신분제를 유지하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주인이 떨어지고 종이 장로가 되었으니 “이를 어쩐다?”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또 한 번 일어났다. 그때 조덕삼이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을까?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충격적인 발언이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행동인 것이다. 집에서는 주인과 종으로 교회에서는 교회를 책임지고 나아가는 장로와 평신도로서 반대되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자익도 훌륭한 분이지만 나는 조덕삼도 참 훌륭하고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신분 문제로 서울 승동교회는 아픔(양반들이 북촌 안동교회를 세워 분리해 나감)을 겪기도 했고 신분제, 권위적인 유습들로 인해 교회 내의 차별이 여전하던 때였다. 그런데 조덕삼은 자기보다 15살이나 어린 이자익을 장로로 잘 섬기는 것은 물론 후일 이자익의 목회를 위해 평양신학교에 보내고 학비 전액을 지원해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훗날 본인이 장로가 되었을 때 자신의 종 마부 출신 이자익을 목사로 초빙해 금산교회의 담임목사와 장로로 함께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한없이 다시 되새기도 또 되새겨도 지나치지 않는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이자익 목사는 시골 금산교회 목회자이면서도 한국교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했다. 이자익 목사님 같이 그렇게 한국교회 총회장을 3번이나 하신 분은 다시는 없었다.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에게 복음을 전했던 테이트 선교사에 대해서도 잘 알아보고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Lewis B. Tate(최의덕 崔義德), Mattie S. Tate 메티선교사 남매 Lewis Boyd Tate-1892 입국 한국기독교회사 - 전라북도편 - 전주 서문교회
호남 선교의 개척 선교사이신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여동생 매티 선교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한다. 테이트 선교사는 대학에서 의과를 전공하고 선교사로 헌신하여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891년 내쉬빌(Nashville)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당시 유학생이었던 윤치호의 조선(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조선(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여동생 매티와 함께 조선(한국) 선교사로 1892년 11월 3일에 조선(한국)에 왔다. 그는 1892년 호남 선교의 개척 선발대로 전킨 선교사와 함께 전주에 처음 온 선교사이다. 그는 전주를 중심으로 익산, 정읍, 금구, 태인, 고부, 흥덕, 부안, 임실, 남원 등의 각 지방에서 꾸준히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열성적인 선교 활동으로 그가 전도하여 설립된 교회가 78곳, 장립한 장로가 21인, 목사가 5인이었으며, 세례를 베푼 교인의 수는 무려 1,500명이나 되었다. 그는 전라노회와 전북노회, 그리고 총회에서도 오랫동안 봉사하였고, 신학교와 성서공회, 예수교서회, 세브란스 의학교의 이사로 봉직하면서 조선(한국) 선교의 기초를 잘 다져 주었다. 1925년 심장병이 악화되어 조선(한국) 선교 3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도, 미국 각처를 순회하며 조선(한국) 선교를 위한 강연을 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조선(한국) 선교사로 동원하였고, 수많은 미국 교회가 조선(한국) 선교를 도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동원가의 삶을 살다가 1929년 67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의 동생 메티 선교사도 오빠 테이트 선교사와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 가정 심방과 축호 전도를 하며 조선(한국) 선교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았다. 메티 선교사는 특별히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우리말 속어까지도 능란하게 구사하면서 부녀자와 어린이 선교에 주력하였다. 그녀는 오빠 테이트 선교사와 말과 가마를 타고 육로로 전주에 와서 여성으로 호남 선교의 선두주자 역할을 용감하게 담당하였다. 동학 농민혁명군의 난리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굴하지 않고 전주에서 최선을 다해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주일학교와 성경학교를 세웠으며, 또한 여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녀가 시작했던 여학교를 1907년 교육 담당 여선교사 랜킨(Lankin)에게 맡기니 이것이 전주 기전여학교였다. 그녀는 조선(한국) 선교 초기에 내한한 여선교사로서 다른 이가 당해보지 않은 많은 고난의 경험 때문에 선교사 가운데서도, 베테랑 선교사의 권위를 지니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오로지 조선(한국) 여성 선교에 44년간 헌신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교회 탄압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조선(한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던 매티 선교사는 은퇴할 나이까지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매티 선교사는 처녀의 몸으로 한국 땅을 밟아 한평생 그의 젊음과 생애를 다 한국을 위해 바치고 77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실로 호남 선교의 개척 선교사였던, 테이트 선교사와 메티 선교사 남매가 조선(한국) 땅에서 이룬 선교의 열매는 컸다. 많은 동료 선교사가 병으로 순직하고 사고로 순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끝까지 나이 많아 은퇴할 때까지 건강하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교와 순직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끝까지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https://kosinusa.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6_6&wr_id=107312&page=4)
4. 오늘 우리나라에서의 모습과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주목하자
금산교회와 관련한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우리나라가 이렇게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 위에 세워졌고, 그분들의 전도를 받고 믿었던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한국교회가 너무나 썩어서 아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엔 다수의 교회가 그럴지라도 아직도 상당수의 교회와 교인들은 바른 신앙을 갖고 뜨거운 헌신을 드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아직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지켜 주시며, 통일 한국과 선교 한국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바른 신학과 신앙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몸부림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교의 사명, 특히 북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그리고 기도로 헌신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저기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하는 교인들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비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과 신학 교수님들도 많이 계신다고 확신한다. 교회가 다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자기 선입견이요, 안일한 도피주의자의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간절히 찾고 찾으면 감탄할 만한 좋은 교회, 죽을 때까지 함께할 만한 교회도 많이 있다.
모세가, 여호수아가 어려운 현실만 가지고 이야기했던가? 그들은 장차 들어갈 가나안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이야기했다. 신약성경도 우리에게 늘 푯대를 향하여 달리기를 격려하며, 앞서가신 예수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로 알고 그를 바라보면서 경주하기를 가르친다. 멀리 떨어진 남의 나라에 와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테이트 선교사님과, 그와 함께 일한 이자익 목사님과 조덕삼 장로님의 후예로 살아가는 우리는 김정은의 핵과 미사일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사명을 망각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살며 하루하루를 낭비하는 죄를 계속하는 것을 슬퍼하며 두려워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대신에 진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 6월의 마지막 날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