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바람의 상관관계 외 4편 / 장진영 / 2014 시와사람 겨울호 시인상
풍경과 바람의 상관관계 외 4편
장진영
바람 한 점 없는 날들, 숨이 막혔다
바람으로 혈이 트여, 숨을 쉬는 저 놋쇠풍경
허공이 먹여주는 밥
비린 냄새 하나 남기지 않고 살기로 작정한 날
처마 밑 風景으로 결정되었다
한여름 볕에 몸 달구고 달빛에 마음 식히며
처마 밑 모서리에 매달려 한 생을 보냈다
텅 빈 허기가 소리를 키우고
몸을 쳐서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붕어 한 마리, 마른 허공에서 헤엄을 치는 건 바람의 입질 때문
바람이 낚싯대를 던질 때마다
저 산등성이까지 산란의 파문은 퍼지고 있었다
뒤란 대숲이 울 때는 처마도 어깨를 흔들며 흐느꼈다
그때도 묶인 사슬이 풀리지 않았으니,
찰랑찰랑 헛배나 채우고 저 메마른 곳에서 버텨야한다
텅 빈 허기가 부풀어 오른다, 어디선가
밀물처럼 몰려든 바람의 물살에 처마는 꼬리를 치기 시작한다
저 물고기 집, 저곳이 적소適所였다
바람이 드나드는 처마가 아니었다면
진작,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다
老松이 서있는 언덕
모든 하늘은 내게로 왔다
지평선이라는 굄돌로 몸을 추켜세우고 하늘은 다시 일어섰다
하늘과 땅, 둘의 몸은 하나였을 것,
머리 위로 스쳐가던 유성, 그 빈자리에 어린별이 돋는 동안
내 목은 동쪽으로 기울었다
언덕을 넘어온 바람에 온몸이 젖는 날은
오랫동안 울음을 쓰다듬었다
내 품은 젖은 허공이 드나들기 좋은 곳,
정수리에 걸린 지붕 없는 둥지 하나
주린 울음 여섯 개 위로 성급한 새벽별이 돋고
발등으로 떨어진 헛날갯짓 소리만 한 바구니였다
울음이 마르기전 온다던 탁발 나간 아비는 오지 않고
성큼성큼 해가 지면 젖이 마른 초승달도 가슴을 풀고
둥지를 들여다보았다
달빛 한 움큼에 한철 발목을 적시면
또 한 장의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졌다
어둠속 성찬에 내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
바람이 맑아 목탁 소리에 살 오르면 계절도 한 뼘 굵어지고
꼬물꼬물 발가락으로 기름진 흙밥을 떠먹기 좋았다
가뭄이 든 어느 해는 하안거에 들기도 했지만
땅속 미물들과 어둠을 말아 먹은 내 몸은 곡선으로 길을 만든다
천년의 약속이 있기에 끝없이 흔들리며
나는 오직 한 자리를 고집한다
어젯밤 그늘에 기대어 잠든 사내처럼,
그도 비움으로 채우고 있었다
먼 길을 동행 할, 저 늙은 사내는 바람으로 배를 채우고
길을 코앞에 두고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바랑을 지고 훌훌 길을 가는 저 사내
끝내, 흙밥 되어 내 등을 타고 오를 것이다.
훔치다
몸뚱이마저 쓸모없다 푸념이시다 걸레를 주신다. 먼지를 훔치면서 구석구석 흘리셨던 한숨까지 훔쳤다 올겨울 자식 집에 머물면서 인색했던 공경이나 훔치시라 했으나 홀로 피고 지는 자괴화自塊花를 피우셨나 홀대忽待꽃을 보셨나 “머니머니해도 살던 집이 조아야” 하시면서 떠나셨던 어머니,
온기 남은 자리를 훔치다가 반들반들 꿰인 108염주를 보았다 반야의 빛이었다 얼마나 많은 날이 손끝에서 흘러갔을까 새벽빛 합장으로 몸을 일으킨 곡진한 두 무릎은 근심으로 수척해졌을 것인데, 그 누구도 눈물 한 점 훔쳐 주지 못했다.
몸에 고인 물기를 다 쏟으시고 지문은 모두 저 염주에게 내주었다 지문이 길을 만들고 자식들 뿔뿔이 그 빛을 따라 떠났다 어머니를 훔쳐 나 여기까지 왔구나 눈마저 살점마저 나눠줘 버리고서 잡히지 않는 머리칼을 줍고 계신 앙상한 어머니, 박제되어 가는 한 마리 새 같다 손바닥에 얹으시면 잠드시겠다 날아가시겠다.
연꽃 방죽에서 바라본 풍경
연못의 속살이 붉다
환한 물의 속살을 만지려고 하늘이 내려앉는다
둥근 발자국이 또르르 구른다.
구르는 것은 모두 다시 못이 된다
잎을 제작한 누군가 완벽하게 방수를 고집했다
물위에 떠서 젖지 않는 저 붉은 수련은
연못의 오래된 내력
개구리밥 부레옥잠 가시연 가벼운 유전자를 보유한
가문의 계보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치 외줄 타는 서커스소녀처럼 저 연꽃,
가느다란 한 줄기 대궁을 붙잡고 훌쩍이는 눈자위가 붉어졌다
어젯밤 연꽃 닮은 여린 소녀가 방죽에서 울어대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화려한 저 겉옷에 누추한 살갗이 숨겨져 있을 게다
가물치의 입질이 두렵고 개구리 울음마저 무거우면 저 불이 꺼지려나
지금은 제철, 눈물을 훔치고
연잎 방석을 군데군데 깔아두고, 연못은
부지런히 관객을 모으는 중이다
이 공연이 끝나기까지 연못은 호황을 누릴 것이다.
햇밤을 거두다
6월의 산중에는 비릿한 밤꽃 향기 한창이다
산새들도 욕정의 끈을 풀고 울어대는 밤이다
달빛에도 화끈 달아오른 그녀, 공기보다 가볍게 풀밭에 눕는다
식어가는 별빛이라도 삼켜야 했다
꽃이 진다
꽃 진 자리마다 열녀문은 열리고
꽃잎 사이 떨치고 간 머리칼은 몸을 엮었다
바람에도 다칠세라 두꺼운 가시 덫도 세웠다
산고의 여름 가고 9월이 몸을 푼다
신음소리에 숲도 새들도 잔뜩 긴장한다
가늘게 벌어진 자궁 문은 젖히고
툭 툭, 바람 난 장끼도 깃을 접는다
바람도 숨 고르며 양수의 골을 쓰다듬는다
상처 없는 순산이다
동자승 머리통처럼 잘 여문 자식들이다
살갗 비비며 간난 했던 한여름 얘기 망태기엔 가득한데
어찌하랴, 잴 걸음걸이도 없이 잿밥 아래 제물로
보내야 할 자식인데.
[당선소감]
가벼워서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무주에 내려와 마땅히 하릴없이 보냈던 몇 해,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망해본께 알겠더라, 쫄딱 망해본께 물맛이고 술맛이고 글맛이고 사람냄새 조금 더 알겠더라. 바닥 냄새가 징하게도 좋더라“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랬다. 바닥을 치고나니 더 는 내려갈 바닥은 없었다. 순수의 바닥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넓고 가벼운 감옥이다. 가벼움으로 펼쳐진 온 산은 물들어 있다. 봄부터 채웠던 물기를 털어내니 이리 아름답게 펼쳐지는 풍경이다. 가벼움은 바닥으로 내려와 겨울 채비를 한다. 가벼움은 미학으로 다가와 가슴을 후비고 있다.
며칠 전에는 백련사를 찾았다. 왕복 12킬로의 옆으로는 구천동 계곡이라 불리는 물줄기가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성급한 나무는 가벼운 몸으로 가느다란 가지의 물기까지 내리고 있었다. 쓸쓸함마저 감돌았다. 나 또한 일 년의 노동도 마쳐가는 끝물인지라 며칠 남은 가을의 가벼움이 한결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10월의 마지막 날, 어제는 비가 왔다. 올 가을이 시작 될 무렵 뭣엔가 무거움을 떨쳐내고 싶었다. 애지중지 키웠던 자식들을 여위듯 털어버리고 싶었다. 바로 詩였다, 한 번 쯤은 방점을 찍고 가야할 것 같은 미련은 끈질겼다. 삼 년 전에 찾아왔던 몹쓸 병도 어지간히 잡혀가는 것 같아 작정을 하고 투고를 했다.
전화가 왔다. 시와사람사였다. 가을 내내 등산로 작업에 정신 팔리다가 간간히 기다렸던 소식, 감회가 솟구쳤다. 감사했다. 그동안 키우고 주물렀던 나의 자식이 사생아가 되지 않고 출가할 수 있게 됐다니, 좋았다. 무거웠던 짐이 한결 가벼워 졌다. 가벼움으로 알찬 또 다른 것을 꿸 수 있으면 좋겠다. 며칠 뒤면 마지막 가을 식재를 하려한다. 가을걷이의 마지막 일이다. 이 일이 끝나면 가벼움은 더 할 것이다. 공기보다 더 가볍게 바닥을 기며 겨울을 보내고 싶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장진영 시인
전남 장흥 출생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장흥별곡 동인. 시집 <끼리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