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을 시작한 출애굽의 첫날 외 4편 / 임승현 / 동구나무 아래 외 4편 / 이철우 / 제9회 문예감성 시인상
탈출을 시작한 출애굽의 첫날
임승현
대장암 수술후유증으로 팔월 한 달 피똥을 말리며
한해 건네받을 돈 절반으로 땡 처리하고
빚 한 섬에서 한 되 덜어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된장국으로 저녁을 자축하고자 한 달이나 냉장고에서
출애굽을 기다리는 호박 양파를 꺼냈다
칼이 도마 위에 춤을 추는데 내 머리는
남은 빚의 곡선이 영점으로 돌아오는 날을 가늠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셈을 해봐도 끝자리가 딱 떨어지지 않아
잠시 방심한 틈으로 칼날이 장지를 덮쳐 피가 낭자했다
된장국을 퍼 올리는 숟가락에 눈물 꽃이 피었다
그놈의 빚도 된장국처럼 이렇게 맛나면 얼마나 좋을까
어서 빨리 다 비워야 한다고 서두르지 말자
그냥 그렇게 한 뒤웅박 한 쪽박이라도 퍼내다 보면
그 짐도 내 몸처럼 조금씩 가벼워져
어느 날
애굽에서 홀가분하게 빠져나오리라
요즈음 시인
걸리지 말아야할 병은 단연코 죽을병이다
한번은 길거리에 나자빠져서
또 한 번은 육신이 넘어져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렇게 여백이 생기고
몇 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모임에 갔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손들이 무겁다
살아보겠다며 배를 깔다보니 글쟁이가 되었다며
수상작이 실린 책과 대상 받은 기사가 실린 신문을 부끄럽게 내밀었다
모두가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동안 삶에 주눅 들린 고개가 들리는 찰나
그의 팔자나 내 팔자나 엇비슷한 친구가
시를 쓰면 돈벌이가 되냐고 물었다
세찬 파도에 내 배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들이 강렬했다
그때 마침 초등학교 교장이 침몰할번한 나를 살려주었다
“요즈음 누가 시를 읽나?”
사망신고
늙은 애마 자꾸 탈이 났다
속내가 드러나 가까운 사람과 점점 멀어졌다
남의 이목이야 상관 없다하면서도
인격과 체면이 먼저였다
자정을 넘어서도 꿀을 따기 위해 강변북로를 질주하는
부지런한 벌들에게 비상등을 켜놓고
나와 아내와 두 딸은 오십 미터 간격으로 난간에 서서
제발 쏘지 말라고, 두 시간동안 신호를 보냈다
36만 킬로미터의 사막을 17년 동안 달려온 애마
장인어른의 첫 기일 처남댁으로 가는 길
한 시간 남짓 거리인데 앞뒤가 불바다라 네 시간을 기신거렸다
그러나 추도를 하늘에 수놓고 돌아오는 강변북로에서
하얀 입김을 토하며 누워버렸다
애마야, 그동안 우리식구 태워줘서 고맙다
비바람 몰아치는 황야를 건너며
채찍을 휘둘렸던 것 용서해다오
사망 신고 위에
추신 한 장 덧붙였다
누가 소금을 치랴
죽은 생선에 썩지 말라고 소금을 친다
생물의 기관은 방치하면 퇴화되고
생식기도 오래 쓰지 않으면 상한다
상하지 말라고 거기에 소금을 뿌리다 친구에게 들킨
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의 창문에 봄이 다시 왔을까
하긴 나의 그것도 상하지 말라고 소금을 뿌린 자가 어디 그분뿐이랴
졸부가 대궐 같은 집을 짓고
도서관을 차려 놓고 유명 인사를 초빙해 유식을 증명하다가
한국사 토론을 여러 번 읽었다한들 통론이 토론 될 여지는 없다
나도 헤겔과 칸트의 철학서적 전집에 소금 한번 뿌린 적이 없으면서
변증법과 순수이성비판에 박식한 통론자다
어느 시인은 아름다운 꽃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단지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고 했다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거기에 있었던
친구들의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나도 많이 상했구나
소금을 빨리 쳐야겠다
빅뱅
세상은 늘 빅뱅으로 넘친다
히틀러의 말한 마디에 세상은 뒤집어졌다
코페르니쿠스의 말 한마디로 태양이 부활했다
말의 꼬리는 순간에 수만 개의 말을 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의 말이 된다
단맛 나는 거짓말의 속도가 빅뱅이다
쓴맛 나는 참말은 아예 빅뱅이 없다
그러니 봉을 잡기 위해선 단맛 나는 거짓말을 해야한다
“그때 당신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그럼, 거짓말은 빨리 잃어버리니까”
국민은 다 잘살게 되고
나라는 다 부강하게 되고
그런 날이 온다고 하는데 그런 날이 없으니
지구의 심판의 날이 온다
하지만 그런 빅뱅은 결코 없다고 하면
낙동강 오리알처럼 선거에서 떨어질 것이니
할 수 없지, 단맛 나는 거짓말로 빅뱅을 일으키는 거야
그 뒤로는 내가 언제 그랬냐고 그냥 뭉개면 돼
또 다른 빅뱅이 다 삼켜버릴 테니까
임승현
연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졸(경영학석사)
서울시장 표창
월간국보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
주간 한국문학신문 기성문인 수필부문 대상 수상
네이버 아름다운 우리시공모전 50인선 당선
한반도 통일문예제전 수필부문 용인시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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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나무 아래
이철우
길가에 밟히는 들풀같이
세월에 밟혀 등 굽은 어머니
동네어귀 느티나무 그늘 아래
결박된 팔자가 긴 한숨으로 흘러나왔다
이슥한 밤 달빛을 밟고 와
그늘에 숨어 홀로 서러웠다
우묵하게 파인 나무의 가슴
애절한 사연들 받아 안고 삭이다가
속이 썩어 문드러졌다
고목古木은 마을의 기점이다
이별을 배웅하러 와서는
그곳에서 눈물 훔치며 돌아서고
기다림도 그곳까지 마중을 나와
언덕너머 먼 곳을 내려다본다
지금은 모두가 떠나버린 마을
읍내로 도시로 흘러가버리고
옆집 노인도, 어머니도 뻐꾸기 울음 따라
산기슭으로 가셨는데
숱한 전설과 비밀을 간직한 느티나무만 아직 제자리다
들판에 봄이 오는 소리에
다시 귀를 여는 동구나무
구새먹은 구멍사이로 바람만 드나든다
한 끼의 밥
등짝이 시퍼런
육덕진 고등어는
어느 망망한 바다를 휘돌다 왔을까
데쳐도 푸릇한 시금치는
한겨울 내내 오들오들 떨며
햇살 촘촘한 벨벳 같은 봄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윤기 나는 밥 한 그릇을 위해
어느 농부의 하루는 무자리 진창에서
더욱 굽어졌으리
차려진 한 끼의 밥상을 바라보다
값없이 살아온 생이 죄스러워
자꾸 마음이 휜다
고해성사하듯
고개를 주억이며 밥을 삼킨다
바람
바다 저 너머
네가 오는구나
물꽃피우며 매상 달려오는구나
온 산에 나무들이
온 들판에 풀들이
살 맞대며 한 몸같이 춤추고
품에 안은 씨앗을 이리저리 흩뿌려
세상을 푸르게 일구더구나
하늘의 구름도
아침 자욱한 안개도
화장터 굴뚝에 치솟는 연기도
모두 네가 가는 길로 함께 가더구나
청보리 넘실대는 언덕을 지나
네가 가고 또 오는구나
모든 게 다 한줄기 연기처럼
바람이 된다고 귓전에 속삭이며
네가 스쳐 가는구나
굴곡의 속성
1.
몸을 돌돌 말아 똬리를 틀고 먹이를 노리는 뱀이나
목이 달아나도 꿈틀대는 장어처럼
푸른 잎을 매단 나무가 바람에 휘어지는 것처럼
살아 역동하는 것은 곡선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
2.
가만히 누워 몸을 곧게 펴면 일직선이 된다
생명유지장치에 붙들리어
길을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 서성대는
소독약 냄새 가득 찬 중환자실
영별의 통곡은 직선에서 시작된다
삐이이이~~
파동 치던 심전도 웨이브가 일직선이 되자
하얀 천이 드리워지고 심장박동기의 직선은
봉분의 형상같이 한 점으로 끝을 맺는다
3.
풀을 베는 낫은 녹슬지 않고
활대가 휘어질수록 화살은 멀리 날아간다
파란 많은 사랑이 애절하여 아름답고
굴곡을 넘어온 삶에 갈채가 있다
나락에서 웅크려 흐느끼더라도
꿈틀대며 살아 있으라 희망아
절망이 억누른 그 탄성의 반력으로
다시 튕겨오를 때까지
경계선
두 줄의 노란 황색선
중앙선을 넘어 충돌한 으깨진
사고가 흰 연기를 내뿜는다
일순간에 경계선을 넘은 운전자는
돌아올 수 없는 생사의 경계도 넘고 말았다
굵은 빗줄기에 아스팔트는 붉게 번지고
뒷좌석에서 빠져나온 젊은 여자
운전자의 시신 앞에 허물어져 울부짖는다
누가 죽음을 먼 후일의 것이라 했는가
죽음이라는 말은 산 자들의 언어다
죽음은 생명에 깃들어 있으므로
뛰는 심장 속에 죽음도 함께 있다
늘 함께 있어 간격도 없다.
다만, 경계만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늘 사선에 머무는 것
굵은 비는 세차게 쏟아지고 갈 길은 먼데
경광음은 숨이 가쁘고
구급대원의 손을 뿌리치는 여인은
슬픔에 붙잡혀 버둥거린다
이철우
경북 포항 출생
계간 에세이 및 영남문학 수필부문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