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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프랑크 수사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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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내 영혼을 뛰게 하였던
떼제공동체가 갑작스럽게 그리워졌다.
특히 지난날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프랑크 수사님의 근황이 궁금하여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수사님이 작년에 지병으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순간 마음이 덜컥하고 놀랐으나
곧 그분과의 교류를 생각하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세상을 달리했지만
프랑크 수사님은 결코 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헤어진 지 30년이 지났으나
프랑크 수사님은 늘 내 안에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크 수사님은,
(아니 프랑크라고 부르는 게 더 낫겠다.
나이가 스무한 살이나 많았지만 그는 언제나 내겐 친구였으니까.)
내겐 너무나 특별한 분이었다.
그를 만나게 된 것은
대학 은사님이셨던 안젤라 미스투라 선생님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안젤라 선생님은 제게 참 많은 선물을 주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화곡동에 있던 떼제공동체를 소개해 주신 것이었다.
아마 1984년 쯤이었을 것이다.
은사님의 소개로 처음 떼제공동체를 찾아가
프랑크를 만났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화곡동의 단독 주택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방에 아무 가구도 없는
절간 같은 곳에서 프랑크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안젤라 선생님의 안내로 찾아왔다고 얘기하자
곧 부엌으로 가서 차를 준비해 쟁반에 들고 왔다.
프랑크는 두 손으로 “공손히” 차를 권하고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내 얘기를 듣기 위해
온 몸을 내게 기울였다.
당시, 나는 차(茶)에 빠져 있었는데
프랑크가 내어주는 차를 보고는
외국인인데다가 이렇게 “공손하게” 차를 내어주는 모습으로 봐서
틀림없이 매우 귀한 차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내 속으로 흠칫 놀라게 되었다.
그냥 평범한 보리차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프랑크의 태도에
“공손하게”라는 단어보다는
“마음챙김으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크의 너무나도 공손한 태도가
보리차를 아주 귀한 차로 생각케 만든 것이었다.
평범한 것도 이렇게 마음을 다해 대접을 하면
소중한 것이 되는 것이다.
프랑크의 온 마음을 다한 배려 또한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마음을 다한 대접을 받기란
처음이었다.
더구나 나보다도 한참 나이가 많은
그것도 서양인으로부터…
프랑크는 차를 권하고는
계속 미소를 띤 채 나의 얘기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도 하면서 얘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말수가 적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의 나에 대한 관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것도, 예전에 없던 경험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얘기를 이렇게 전적으로 들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야기 하면서 신이 났고
스스로가 대견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어주시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 동안 대화를 나누고 나니
기도 시간이 되었다.
2층의 기도실은 어두웠다.
한옥의 문짝을 배경으로
떼제 십자가와 촛불이 놓여 있었다.
꽤 오랜(처음이어서 꽤 오래 느껴졌다) 침묵 속에서
묵상을 한 후 기도실을 나왔다.
이 묵상 체험도 여러 면에서 나를 자성하게 만들었다.
“난, 왜 이렇게 침묵이 어려운 거지?
왜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에 제대로 귀기울이지 못하고
끊임없는 잡념으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지?”
기도실을 나와 일 주일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얼른 일주일이 흘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들떠
그를 만나고 싶어하였다.
내 자신이 소중하다는 느낌,
인정을 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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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제공동체" 홈피에서 옮긴 선종 소식)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평생의 헌신 마침내 종결되다"
프랑크 수사 (1935-2014)
1월 16일 마이멘싱 (방글라데시) 공동체의 책임자 프랑크 수사가 79세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네덜란드 드렌테 주의 하셀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언어 공부를 한 다음, 1960년 떼제공동체에 입회했다.
오래 전부터 심장과 폐질환을 앓아온 그는, 최근에 증상이 악화되어 급히 떼제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간호사 한 사람이 동행했다. 이스탄불에서 연결편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거의 즉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떼제로 옮겨져 1월 21일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6남매의 맏이였던 프랑크 수사의 친동생 다섯명도 참석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평생의 헌신이 마침내 종결되었다. 공동체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그가 살았던 모든 곳에서, 프랑크 수사는 하느님(하나님)께 대한 깊은 기도에 바탕을 두고,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최우선으로 했다. 1964년말 로제 수사는 그를 미국으로 파견했고 그 방문의 결과 1965년 위스콘신에서 미주 대륙 첫 번째 형제들의 우애공동체가 시작되었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그는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몇몇 떼제 수사들과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함께 사는 우애공동체를 이끌었다. 그리고 아틀랜타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1년동안 생활했다.
1972년 프랑크 수사는 대륙을 바꾸어 아시아로 갔다. 인도를 방문한 그를 통해 떼제공동체는 특히 마더 데레사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다음에 그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을 찾았다. 1974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에서 형제들의 우애공동체가 시작되었다. 1978년에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도쿄 근교 미야데라의 변두리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를 시작했다. 1979년 한국의 서울에 형제들의 우애공동체가 시작되는 것을 도운 다음 1981년 캘커타로 가서 지냈다. 그 뒤 1987년에 그는 완전히 방글라데시로 돌아갔고 나중에 형제들은 마이멘싱 시에 정착했다.
언젠가 프랑크 수사는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오랜 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약하고 쓸모없이 보인다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맞이하면, 그들은 우리를 지나친 경쟁의 세계에서 벗어나 마음의 친교를 나누는 세상으로 나가도록 조금씩 이끌어줍니다. 이슬람 신자나 다른 종교 신자들과의 친교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장애인들과 함께 순례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우리가 함께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섬길 때, 우리를 하나되게 모아주는 사람은 바로 그들입니다. 힘있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우리를 초대해서 하나되게 하고 그들과 함께 하도록 합니다.
http://www.taize.fr/ko_article163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