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와 잡기
영화 '토리노의 말' 감상
자유인 ・ 2021. 2. 2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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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영화를 선호하는 나에게 '토리노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특히 나보다 더 온유하고 따듯한 색갈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감상하면서,
예상대로 영화를 보는 동안도 ,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내키지 않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토록 어둡고,음산하고,처절한 영화도 흔치 않을 것이다
폴란드' 벨라 타르'감독이 만든 '토리노의 말'은 145분이나 되는 짧지않은 시간동안
말과 마부와 그의 딸로 구성된, 조금은 단조로운 연기로서 인간의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목을 그려냈다. 니체의 삶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하였다. 우리를 도울 신은 죽었고, 우리는 너무나 무능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영화후기는 다른 블로그님의 글을 인용한다. 영화는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처음 말했듯이 따듯한 영화를 선호하는 아내에게는 보이지않는게 좋았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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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리노의 말 후기∫ 벨라 타르 감독의 종말론적 세계.
토리노의 말 2012
감독 : 벨라 타르
출연 : 야노스 델시, 에리카 보크, 미할리 코모스
촬영 : 프레드 켈레먼
각본 : 라슬로 크라즈나호르카이, 벨라 타르
음악 : 미할리 빅
벨라 타르를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는 헝가리의 대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기는 아주 어렵다. 사실이다. 그의 작품은 매우 어려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깊게 빠져든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끊이지 않는다. 토리노의 말은 2012년에 나왔고 벨라 타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며, 앞으로도 벨라 타르 감독은 영화계의 전설이 되어서 많은 영화인들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회자될 것이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
카를로 알베르트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 프리드리히 니체는 6번 문 밖으로 나선다. 산책을 하거나 우편물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부가 말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말은 움직일 줄 몰랐다. 마부는 참다못해 채찍을 휘두르고 만다.
니체는 인파로 다가가서 분노로 미쳐 날뛰는 마부의 잔혹한 행동을 말리려고 한다.
건장한 체구의 니체가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어 말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흐느낀다.
이웃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조용히 누워있다가 비로소 몇 마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린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그 후로 10년 동안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얌전하게 정신 나간 상태로 누워있는다.
토리노의 말 내용
첫째 날
마차가 집으로 향한다. 그 마차를 끄는 말과 그 위에 올라탄 마부가 보인다. 집에 온 마부는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그는 팔 하나가 불편해서 딸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딸은 마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고 감자를 찌기 위해서 부엌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녀는 감자를 찐 후에 아버지인 마부에게 식사를 하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집 안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에 든다.
둘째 날.
딸이 부엌에 떼놓은 불이 간밤에 꺼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집 밖으로 나가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온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자 마부도 마침 잠에서 깬다. 딸은 마부의 옷을 입혀준다. 그리고 딸은 세수를 한 후에 마부와 나갈 준비를 한다. 마굿간 안으로 향한 두 사람.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말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마부가 말에게 채찍질을 해도 말은 움직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마부는 집으로 돌아가서 평상복으로 다시 갈아입는다. 그리고 나무를 패고, 딸은 한 편에서 물을 끓여서 빨래를 한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마부는 가죽으로 벨트를 만든다. 그리고 딸은 감자를 끓여서 두 사람은 감자를 먹는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그 사람은 마부에게 술 좀 얻을 수 있냐고 묻는다. 그리고 딸과 마부는 흔쾌히 이웃 사람에게 술을 준다. 그런데 이 이웃은 세상의 파멸에 대해서 말한다.
"탁월하고 위대하며 고귀한 이들이라면 어떤 싸움에도 가담해선 안 되는거지."
셋째 날.
딸이 잠에서 깨어나서 옷을 입는다. 그리고 불을 확인하고 우물에서 물을 떠온다. 그리고 마부의 옷을 입혀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술을 한 잔씩 마신다. 그리고 마굿간으로 향한 두 사람은 마굿간 안을 치우고 사료를 먹여보이지만 말은 사료를 입에도 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다시 감자를 쪄서 먹는다. 그 때, 집 밖에 마차가 오는 것이 보이고, 딸이 먼저 나가보는데 우물에 있는 물을 마시기 위해서 이쪽으로 온 집시들이었다. 마부는 낫을 들고 가서 그들을 내쫓는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딸은 식사를 치우고 성경을 읽는다.
"성서는 오로지 주님을 성심으로 섬기는 실천만을 허용하는도다. 그곳의 거룩함에 걸맞지 않은 일은 그 어떤 것이든 금지된다. 또한 이 안에서 크나큰 부정행위가 일어나 성소가 침해된 이후부터 신도들에게 변화가 일어났고, 신도들은 분노하였도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에서는 더 이상 그 어떠한 의식도 올릴 수 없다."
넷째 날.
딸은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불을 확인한다. 그리고 우물에 가서 물을 뜨려 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하루 아침에 물이 말랐다. 결국 집으로 돌아온 딸과 마부는 술을 마신다. 어제보다 조금 더 마시는 듯 하다. 그리고 마굿간에 가서 마굿간을 치우고 말에게 물을 마시라고 주지만 물도 마시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들에게도 이제 물이 떠 놓은 것 밖에 없지만 조금이라도 먹이려는 마음이었을게다.
이제 마부는 이 집을 떠나기로 마음 먹고 두 사람은 함께 짐을 싼다. 마차를 끌고 딸과 마부는 떠난다. 그리고 뒤에 말까지 끌고 말이다. 하지만 거센 바람에 멀리 가지 못 하고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딸은 무기력하게 창 밖만 바라보고 있다.
다섯 째날.
잠에서 깨어난 마부가 옷을 입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감자를 먹는다. 그리고 밖이 갑자기 어둠에 휩싸인다. 결국 마부는 딸을 시켜서 램프에 불을 켜게 한다. 그리고 딸은 그 지시대로 램프에 불을 켠다.
하지만 곧 램프에 불이 꺼지고 다시 붙이려고 하지만 램프에 불이 붙지 않는다. 두 사람은 결국 일찍 잠에 들기로 하고 잠에 든다.
여섯 째날.
두 사람은 평소처럼 식사를 하기 위해서 감자 하나씩을 접시에 두고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딸은 눈만 껌뻑이고 있을 뿐이고 마부는 감자의 접시를 벗기려고 하지만 물도 불도 없이 익히지도 않은 감자의 껍질을 까려고 하니 절망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마부와 딸의 시간은 꼭 끝이 난 것 같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6일 차에 벨라 타르 감독의 멸망기는 완성된다.
벨라 타르 감독
1955년 7월 21일 헝가리 출신 영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롱테이크 위주의 영화들인데, 그의 대표작으로는 1994년 작품인 [사탄탱고]가 있다. 이 영화는 422분 길이의 영화에 쇼트 길이는 10분 씩 진행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관객이 넘어야 할 영화의 진입 장벽이 높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수전 손택이라는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지식인인데, 수전 손택은 벨라 타르를 모던 시네마의 구원자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수전 손택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살아있을 때, 사탄 탱고를 해 마다 1번 씩 돌려볼 정도였다고 한다.
벨라 타르의 영향을 받은 감독으로는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대표적이다. 토리노의 말 포스터 샷에 보면 구스 반 산트가 영화를 극찬한 부분이 있을 정도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벨라 타르 감독을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보면 확실히 많은 부분을 영향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울의 아들]의 감독인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벨라 타르의 조감독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사울의 아들과 토리노의 말을 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벨라 타르 감독의 확실한 영화적 제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토리노의 말 후기
나는 토리노의 말을 보면서 처음 봤을 때 졸면서 봤다.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랬는지 하여간 그랬다. 그래서 영화를 본 것도 안 본 것도 아닌 찝찝한 기분이 들었고, 다음 날 다시 보기로 마음 먹고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다음 날 볼 때는 다행히 졸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영화의 연출과 이야기의 진행, 그리고 형식에 단조로움에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전에도 이런 느낌을 느낀 영화들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런 영화의 대표격이라고 하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예술 영화가 정말로 지루하기만 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결국 지루하다는 정의가 어떤 자극과 산만함으로 가득찬 것에 반대되는 말이라면 예술 영화는 대부분 지루한 것이 맞는 것 같다. 특히 벨라 타르 감독처럼 롱테이크에 적은 컷들로 이루어진 영화들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은 전시회에서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며 작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 듯 사유하는 것과 같이 스크린 속 프레임을 그저 다른 자극없이 바라보며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영화는 창세기가 7일로 이루어진 세상의 창조로 시작하듯 6일 동안의 멸망기를 다룬다. (영화 시작에 나오는 니체의 에피소드에 카를로 알베르트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 프리드리히 니체는 6번 문 밖으로 나선다. 라는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이 6을 나열하면 666.) 그러는 동안에 세상의 멸망이 외부의 사건으로서 보여지는 영화라기 보다는 그저 묵시론적인 분위기와 음악이 흐르며, 영화 속 마부와 그의 딸이 잠을 자고 일어나서 자신들의 생활, 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는 의·식·주의 활동만이 나올 뿐이다.
의식주는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규칙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불규칙한 오늘이 존재한다. 규칙적인 행위와 하루 속에 불규칙한 행위와 사건들이 끼어든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세상과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 무능력하며 무기력하게 보인다. 말 한 마리 움직이지 못 하는 것을 어쩌지 못 하며, 하루 아침에 우물에 물이 마르고, 불이 사라지고,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어쩌지 못 한다. 늙어 죽는 것도 어쩌지 못 하는 것이다.
벨라 타르에게 신과 악마의 경계는 모호하다. 균형과 불균형, 규칙과 불규칙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그 안에서 니체의 슬픈 대답이 이어진다. 신은 죽었고, 인간은 무능력한데 이 세상에 어떤 기대를 가지고 살 수 있겠냐고.
우리 인류, 세계의 모든 생명들은 먹을 것만 없어져도 파멸할 것이다.
<자유인>의 글을 옮겨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