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을 공부하면서 필요한 공자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과 중국역사에
대하여 미흡하지만 작은 도움이 될까싶어 여기저기서 모아봤습니다!!
2012.3.26 박종호
공자 [K'ungtzu, 孔子]의 생애와 사상: 중국 노 [魯]나라의 사상가 (BC551~479)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씨(이름은 징재)를 맞아 공자를 낳았으나, 부친인
숙량흘(叔梁紇)과 모친인 안징재(顔徵在, 옌량짜이)는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70대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후세에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실제로는 16세가 맞을듯함,그래서 공자는 후일 벼슬을 할때에도
서자이기때문에 귀족들에게 멸시를 당하기도 했음)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의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 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부친 숙량흘은 시골 무사였다.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 뿐이었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가 된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되는 공자의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소년 시절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 신세가 되어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기원전 549년 3세 때 부친이 별세하자 모친을 따라 궐리로 이사하였다. 기원전 536년에 혼인하였으며, 기원전 535년에는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3년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부친 숙량흘의 재산은 수두룩한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 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이처럼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자는 마을의 어느 늙은 선생을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옛부터 내려 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17세 때 말단 관리가 되어 나랏일을 보면서 노나라의 대학에서 《시경》과 《서경》 등을 배웠고, 또 여러 가지 의식을 맡아 보는 관리에게서 예법도 배웠으며, 음악도 배웠다. 공자는 《시경》과 《서경》을 읽고 난 후 그 책을 펴낸 주공 단을 청년 시절부터 흠모하여 종신토록 사숙(私淑)하였다.
기원전 533년 19세에 송(宋)나라의 견관(幵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
36세 때 소공(昭公) 25년 노나라에 '삼환의 난(三桓,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 등 당시 노나라의 권세가)'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 기원전 517년에 제(齊)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여러 모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와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왕의 측근 배신(陪臣)인 양호(楊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면서 중도재(中道宰[3])가 되었다. 52세(BC499)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다.
당시 공자는 순장될 뻔한 아이를 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때까지 이어져 오던 순장의 악습을 왕에게 간하여 끝내 폐하였다. 또 제나라 경공과의 회동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단지 협상만으로 노나라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는가 하면, 당시 권세가였던 삼환씨의 횡포를 꺽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三城)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계손사의 저항으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계손사는 노나라 삼환 계손, 맹손, 숙손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두르는 계손사를 타도하려고 여러 모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성사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계손사의 미움을 받은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수십 명의 수행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켜 줄 어질고 현명한 군주를 찾아 기약 없는 여정에 나섰다.
무려 10여년이 넘게 걸린 이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기간은 성인(聖人)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고달픈 세월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 같은 봉변으로 인해 여행 도중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도덕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 당했다. 당시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후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 노나라에 전해 내려 오던 역사서를 다시금 새로 엮어 《춘추》를
편찬했다.
공자의 만년에 아들인 백어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과 자로마저 잇따라 죽었다. 이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 백어가 사망하자 공자가 어린 손자를 키웠다. 그의 손자인 자사는 훗날 공자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문하에서 배워 조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훌륭히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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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 공자 시대의 역사적 배경 **
공자가 숭배했던 인물은 주공(周公:?~BC 1094)으로 주공은 '봉건적' 의례제도를 확충·완성시킨 인물로 여겨진다. 이 의례제도는 혈연과 결혼으로 맺어진 인척관계, 새로 맺어진 계약 및 오래된 협약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상호의존을 강조하는 정교한 제도였다. 국가가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을 통해 국내 질서뿐 아니라 제후국들과의 연합관계를 유지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정치이상에 통치의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 이상이란 천명에 의해 윤리적·종교적 권한을 갖춘 보편적 왕권을 확립하는 것과 법적 구속이 아닌 예의범절에 의해서 사회적 유대를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는 이같은 정치이상을 실현했기 때문에 500년 이상 평화와 번영 속에서 존속할 수 있었다.
주공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받은 공자는 고대의 성현들로부터 배운 정치이상을 실현시킴으로써 주공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평생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는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정치는 곧 도덕이라는 그의 철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주대의 우주론에서 독특한 개념이었던 '천'(天)은 은대의 '상제'(上帝)와 유사한 개념이다. 은대의 왕들이 자신들을 상제의 후예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들의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대의 왕들에게 있어서 '천'은 훨씬 의인화된 신(神)을 의미했다. 주의 왕들은 '천명'(天命)은 늘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왕가의 후예들이 언제나 왕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민심이 천심'(民心則天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유지하려면 필수적으로 덕을 갖추어야 했다. 주대에 인자한 도덕정치를 강조했던 사실은 수많은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은나라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고 도덕정치라는 뿌리깊은 세계관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활기넘치는 봉건적 의례제도와 주왕가의 도덕적 통치 때문에 주왕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의 왕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771년 중앙아시아로부터 공격해오는 이민족을 피하기 위해 도읍을 옮겨 현재의 뤄양[洛陽]으로 동진하게 되었다. 그뒤로 실권은 봉건영주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주왕가의 후손들은 명목상으로 왕의 지위를 유지했고 부분적으로 상징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에 이르러 봉건적인 의례제도는 근본적으로 붕괴되었고 정치적 위기로 인해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우려가 매우 높아졌다. 상징적 통치의 중심이었던 주의 왕들은 더이상 왕국이 완전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응책은 먼저 인간이 되기 위한 학문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세기 동안 정치안정과 사회질서에 기여해온 사회제도, 즉 가정·학교·향리·제후국·종주국 등을 활성화시키려고 했다. 공자는 금권과 권력이 최고라는 현상태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존엄성, 사회 연대, 정치질서를 위해서는 개인의 인품과 지도자적 자질의 밑바탕이 되는 도덕심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중국의 역사**
국 가 |
연 대 | ||
하(夏) |
약 BC 21세기 - 약 BC 16세기 | ||
상(商) |
약 BC 16세기 - 약 BC 1066년 | ||
주(周) |
서주(西周) |
약 BC 1066년 - 약 BC 771년 | |
동주(東周) |
BC 770년 - BC 256년 | ||
춘추(春秋) |
BC 770년 - BC 476년 | ||
전국(戰國) |
BC 475년 - BC 221년 | ||
진(秦) |
BC 221년 - BC 206년 | ||
한(漢) |
서한(西漢) |
BC 206년 - AD 23년 | |
동한(東漢) |
AD 25년 - 220년 | ||
삼국(三國) |
위(魏) |
220년 - 265년 | |
촉(蜀) |
221년 - 263년 | ||
오(吳) |
222년 - 280년 | ||
진(晋) 16국(十六國) |
서진(西晋) |
265년 - 316년 | |
동진(東晋) |
317년 - 420년 | ||
16국(十六國) |
304년 - 439년 | ||
남북조(南北朝) |
남조(南朝) |
송(宋) |
420년 - 479년 |
제(齊) |
479년 - 502년 | ||
양(梁) |
502년 - 557년 | ||
진(陳) |
557년 - 589년 | ||
북조(北朝) |
북위(北魏) |
386년 - 534년 | |
동위(東魏) |
534년 - 550년 | ||
북제(北齊) |
550년 - 577년 | ||
서위(西魏) |
535년 - 557년 | ||
북주(北周) |
557년 - 581년 | ||
수(隋) |
581년 - 618년 | ||
당(唐) |
618년 - 907년 | ||
오대십국(五代十國) |
후양(后梁) |
907년 - 923년 | |
후당(后唐) |
923년 - 936년 | ||
후진(后晉) |
936년 - 946년 | ||
후한(后漢) |
947년 - 950년 | ||
후주(后周) |
951년 - 960년 | ||
십국(十國) |
902년 - 979년 | ||
송(宋) |
북송(北宋) |
960년 - 1127년 | |
남송(南宋) |
1127년 - 1279년 | ||
요(遼) |
907년 - 1125년 | ||
서하(西夏) |
1032년 - 1227년 | ||
금(金) |
1115년 - 1234년 | ||
원(元) |
1279년 - 1368년 | ||
명(明) |
1368년 - 1644년 | ||
청(淸) |
1644년 - 1911년 | ||
중화민국(中華民國) |
1912년 - 1949년 | ||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
1949년 10월 1일 성립 |
1927년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저우커우뎬[周口店]의 동굴에서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Homo erectus pekinensis]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에 인간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시기가 3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준다. 중국문명의 요람은 황허 강임이 분명하다.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최초의 중국문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유물들이 허난[河南]·산둥·산시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최초의 왕조는 은(殷:또는 商, BC 18~12세기)이라고 할 수 있다. 은은 중국 청동기문화의 기반 위에 선 왕조로, 서쪽으로는 산시[山西], 남쪽으로는 양쯔 강, 북쪽으로는 허베이 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 은대에 들어와 달력이 사용되었고 문자가 도입되었으며 청동기 제조술이 발달했다.
그 기원이 불분명한 주는 BC 1111년에 은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다. 주는 그뒤 여러 차례의 군사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주는 정복에 의해 획득된 새 영토를 통치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지에 동족 또는 이족 공신들을 제후로 봉했다(봉건제). 제후들에게는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게 하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의무를 지웠다. 주의 말기에는 흉작과 천재가 이어져 민심이 불안정해진데다 후계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에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BC 771년 수도를 함락당했다. 이로써 서주(西周)는 멸망하고 주 왕실은 동도(東都) 성주(成周)로 도읍을 옮겨 동주(東周)를 다시 일으켰지만 옛날과 같은 위세는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이때부터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동주는 약 500년간 존속했으며,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으로 농업생산력이 현저히 증대되었다. 또한 상공업도 발달했으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상과 문화가 꽃피었다. 공자(BC 551~479)는 이 시대에 태어나 그후 중국문명의 규범이 된 사회적인 개념을 제정했다.
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진(秦)은 BC 221년 중국을 통일했다(최초의 중국대륙통일).
시황제(始皇帝)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으며(군현제),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도량형,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나아가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들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했다. 장대한 능묘와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고, BC 214년에는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했으며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또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 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대에 설정된 중국 국경이 후대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신성한 국경으로 여겨졌다.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대규모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어 시황제 사후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國運)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등의 연합세력에 패하여 결국 멸망했다(BC 206).
항우를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한 유방(즉 高祖)은 BC 202년 한(漢)을 세웠다. 진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다. 한의 제7대 황제 무제(武帝:BC 141~87)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관학으로 정해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다. 이 체제는 그후 2,000년간 중국 각 왕조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대에는 종이와 지진계의 발명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AD 220년 한이 붕괴하자 혼란과 분열의 시기가 뒤따랐는데, 이 시기를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또는 육조시대라고 일컫는다. 군벌들이 들끓었고 화북지역은 다수의 비한족(非漢族) 침입자들에게 유린당했다.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 남부와 북부에 전파되었다.
수(隋:581~617)에 의해 중국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수는 중요한 행정개혁을 이루었으나 무모한 군사적 원정을 계속하여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단명하게 끝났다. 618년 수를 이어 당이 들어섰다. 당은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전문관료제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돌궐, 투르판, 철륵(鐵勒), 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고 토번(吐蕃)을 정복하는 한편, 서역의 요지에 전진기지들을 설치하는 등 한대 이래 보기드문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 환관의 전횡 등으로 국력이 쇠하고, 크고 작은 병란·민란 들이 일어났다.
당이 붕괴되자 또다른 분열기(907~960)가 시작되어 군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960년 마침내 송이 70년 만에 전국을 통일했다. 송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그러나 국초 이래의 문치주의는 한편으로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내치(內治)와 외교상에서 폐해가 누적되어 힘이 약해진 송은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남부로 수도를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쯔 강 이남에 자리잡은 남송은 국토가 북송때보다 반으로 줄었으나 경제력면에서는 북송시대를 능가했다. 남송은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에 의해 멸망당했다.
원은 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이·일의 4한국(四汗國)을 포괄하는 몽골 제국의 종주국이고 또 중국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로서 세조 쿠빌라이 칸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황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으나, 중국의 문명·제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거대한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면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다. 원은 계속해서 한족을 차별하여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음으로써 한족이 세운 명에게 98년 만에 타도되었다(1368).
명도 원대의 이민족 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조는 중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전제적인 명대에 들어와 반외세 감정이 절정에 달했는데 사실상 중국은 세계 각지의 세력들과 담을 쌓는 쇄국정책의 길을 걸었다. 사적인 해외무역과 해외여행은 엄금되었다.
1644년 만주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족(옛 이름은 여진족) 왕조인 청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청은 만주와 중국의 문명을 함께 섞어가면서 그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는 중국에게 있어서 비운의 연속이었다. 아편전쟁(1839~42)·태평천국운동(1851~64)·청일전쟁(1894~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1898년의 변법자강운동은 청정부에 어떠한 변화의 바람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1900년의 반외세·반그리스도교를 표방한 의화단사건은 열강의 군대가 중국 땅에 진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는 1911년에 붕괴되고 쑨원[孫文]의 지도 아래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인 배신과 지역 군벌주의에 의해 공화국은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을 재통일하려고 노력했다. 1920년대에는 장제스[蔣介石]의 노력하에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어느 정도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곧 공산당 세력과 갈라섰고 이들 공산당은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했다.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세력은 남부 허난 성에서 북부 산시 성에 이르는 9,700km의 대장정(1934~35)에 성공하면서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때 마오쩌둥[毛澤東]은 공산혁명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을 대신하는 협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공산당은 국민당 군대와 연합국 군대와 동맹하여 항일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자 공산당은 세력을 재조직하여 일본군의 무기를 탈취하고 장제스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섰다. 그결과 1946~49년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달아났다(국공내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1958년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중국 지도부 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1966년 마오쩌둥은 과격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혁명의 열기를 부추기고자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결과 혼란과 폭력만이 뒤따라 과격파들은 조락하게 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 장칭[江靑]이 이끄는 4인방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저지른 실수라고 비판되었으며, 4인방은 1981년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온건한 지도노선 아래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급진주의와는 영원히 결별하는 새로운 당헌을 제정했다. 이후 중국은 경제 현대화에 진력하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1989년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이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비극적인 톈안먼[天安門]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당시 총리이던 자오쯔양[趙紫陽]을 퇴진시키고 장쩌민[江澤民]을 등용했다. 장쩌민은 1989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0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3년 국가주석직에 차례로 오르는 등 덩샤오핑의 후원 아래 국가 최고지도자로 성장했다.
대외적으로 중국 당국은 톈안먼 사건 이후 악화된 서방국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1990년 6월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반체제인사 팡리즈[方勵之] 교수 부부의 출국을 허용하는 한편, 그 해 9월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개최해 대외 이미지 재고에 힘썼다. 그리고 1992년에 톈안먼 사건을 '반혁명폭란'에서 단순한 '정치풍파'로 재평가하고 이듬해에는 이 사건을 주도했던 학생지도자를 가석방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중국은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및 개혁·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은 가운데 높은 경제성장 가도를 달렸다.
1997년 2월 덩샤오핑이 사망했으며, 그 해 7월 1일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는 홍콩이 1842년 난징[南京] 조약으로 영국에 할양된 지 155년, 1898년 조차된 지 99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은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초대 행정장관에 퉁치화[董建華]를 임명했다. 1999년 12월 20일에는 마카오가 포르투갈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유럽 국가에게 빼앗긴 땅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 중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1년 WTO 가입과 2008년 하계 올림픽 대회 유치를 이루어냄으로써 강대국으로 급속히 발돋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