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다시 페이토 호수(Peyto Lake)를 찾았다.
몇 번이나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다. 올 때마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같은 호수를 찍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호수는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의 페이토 호수는 유난히 색을 뽐내고 있었다.
“누가 호수에 물감을 풀어놓은 것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푸른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비롭고, 초록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맑았다. 청록색이라고 부르면 그나마 가까울까. 산 아래 깊숙이 누군가 거대한 붓으로 하늘과 바다의 색을 한꺼번에 풀어놓은 듯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사진기로는 이 색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 속의 호수는 아름다웠지만, 눈앞에서 바라보는 그 색에는 사진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도대체 저 색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페이토 호수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물이 맑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 호수는 빙하가 만들어 낸 호수다. 주변의 높은 산과 빙원에서 흘러내린 빙하수가 호수로 들어오면서 아주 미세한 암석 가루를 함께 가져온다. 빙하는 산을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갈아낸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움직이면서 바위와 암석을 마치 사포처럼 갈아내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아주 고운 암석 가루가 물속에 떠 있게 된다.
그것이 이른바 ‘빙하암분’, 즉 rock flour다.
물속에 떠 있는 이 미세한 입자들이 햇빛을 만나면서 특정한 파장의 빛을 산란시킨다. 우리가 바라보는 눈부신 청록색은 바로 그 결과다. 다시 말해 페이토 호수의 색은 호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색이라기보다 빙하와 바위와 햇빛이 함께 만들어 내는 색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참 묘하다.
우리는 저 호수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시작에는 수천 년 동안 산을 깎아 온 얼음의 힘이 있었다.
산은 단단하지만 빙하는 느리다.
그러나 느린 것이 반드시 약한 것은 아니다.
수천 년, 수만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빙하는 단단한 산을 조금씩 깎아 계곡을 만들고, 그 계곡에 물을 담아 오늘의 페이토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잠시 바라보는 그 아름다운 호수 뒤에는 인간의 시간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긴 시간이 숨어 있는 것이다.
페이토 호수는 밴프 국립공원의 로키산맥 깊숙한 곳, 워푸틱 산맥의 품에 놓여 있다. 해발 약 1,860m의 높은 곳에서 주변의 산봉우리와 빙하를 바라보면, 인간이 이곳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산과 얼음이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 만들어 낸 거대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아름다운 호수에 붙은 이름이다.
‘Peyto’라는 이름은 자연에서 나온 이름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다.
빌 페이토(Bill Peyto).
그는 1869년 영국 켄트에서 태어나 1887년 캐나다로 건너왔다. 젊은 시절 캐나다 서부로 와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이후 로키산맥으로 들어가 산악 안내인, 사냥꾼, 말과 짐을 운반하는 아웃피터로 활동했다. 그리고 훗날 밴프 국립공원의 초기 파크 워든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편안하게 자동차를 타고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를 달려 도착하는 이곳을, 그가 살던 시대에는 전혀 다른 세계였을 것이다. 도로도 없고 관광객도 많지 않았던 시절.
산은 길이 아니라 장애물이었고, 계곡은 관광지가 아니라 생존과 탐험의 공간이었다. 빌 페이토는 말을 타고, 산을 걸으며, 때로는 험준한 지형을 헤쳐 나가며 이 로키산맥을 누볐다. 그는 단순한 산악 안내인이 아니었다. 당시의 로키산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결국 한 호수뿐 아니라 페이토 빙하(Peyto Glacier), 페이토 피크(Peyto Peak), 페이토 크리크(Peyto Creek)에도 남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이름이 산과 빙하와 물길을 따라 로키산맥에 오래 남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페이토 호수를 바라보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호수의 색만 보았다.
그러나 이름을 알고 나니 그곳에 한 사람의 삶이 겹쳐 보인다. 한때 이 산을 걸었던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남긴 이름을 오늘 우리는 관광객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사라지고 세월은 흐르지만, 이름은 때로 자연 속에 남는다.
빌 페이토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지금도 이 산과 빙하와 호수 위에 남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따라 이곳을 찾아온다.
그렇게 생각하니 ‘Peyto Lake’라는 세 글자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한 시대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이 호수에는 또 하나의 긴 이야기가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로키산맥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바다였던 시대에 쌓인 퇴적암층이 지각의 거대한 움직임으로 솟아오르고, 오랜 침식과 빙하 작용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날카로운 산과 깊은 계곡으로 변해 왔다. 페이토 호수 주변에서도 오래된 암석층과 빙하가 남긴 지형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페이토 호수 앞에 서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예쁜 호수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수억 년의 지질학적 시간과 수천 년의 빙하의 시간이 겹쳐 있는 장소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불과 백여 년 남짓한 인간의 역사가 포개져 있다.
산이 먼저 있었고,
빙하가 산을 깎았고,
물이 그 자리에 호수를 만들었으며,
마침내 인간이 그곳에 한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Peyto Lake.
그렇게 생각하니 호수가 전과 조금 다르게 보였다. 호수는 여전히 푸르고, 산은 여전히 웅장했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에도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진 속에 호수의 색만 담고 싶지는 않았다.
빙하가 산을 갈아 만든 가루와 햇빛이 만나 만들어 낸 색, 수천 년 동안 산을 깎아 온 얼음, 오래전 이 산을 걸었던 빌 페이토라는 한 사람의 발자국,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아무 말 없이 품고 있는 로키산맥까지 함께 담고 싶었다. 사진 한 장에 그것을 모두 담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마음에는 담아 두고 싶었다.
지난 금요일의 페이토 호수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마치 누군가 호수에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것은 물감이 아니었을 것이다.
산이 오랜 세월 동안 갈아 만든 빛의 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또 한 번 생각했다.
자연은 우리가 찾아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조금씩 더 깊이 바라볼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