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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에세이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염장열
<순천만에서 바라본 첨산> 다음까페<마음의 고향, 후곡>
♣ 용서의 언덕 너머
- 카미노 데 산티아고 / 방민 기행 수필집 / 에세이문학 출판부 간
지난 해 카미노를 완보했다. / 34일간의 일정이었지만 60평생보다 많은 걸 생각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길을 출발부터 끝까지 동행한 아내와 찬구에게 감사한다.
일기 쓰기다. 일기는 삶의 기록이므로 죽는 날까지 함께 갈 것이다.
수필 쓰기다. 우리는 각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지만,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의 동행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수필이다.
함께 출발한 동행과 산티아고까지 카미노를 완보하길 바라듯, 나는 글과 동행하며 인생길을 걸어가고 싶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밭이 한참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론 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 강냉이가 익나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건 / 웃지요.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시인 /
問余何事樓碧山 문여하사루벽산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어인 일로 푸른 산에 사느냐 물으니
웃으며 대답 않고 마음만 절로 한가롭네. / <山中問答> / 이백 /
오늘 일정은 카미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상징적인 다리가 있다는 푸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여왕의 다리’까지 가는 일정이다.
가시 없는 장미가 어찌 있을까. 곰곰 돌아보았더니 장미에 달린 가시를 인정하고 그들의 처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 한들 이런 꽃은 인생 화단에 다시는 심고 싶지 않다.
지은 죄과가 산티아고까지 완보하면 얼마나 용서받을까?
스패츠 / 비오킬(빈대약) / 몰라도 되는 정보 때문에 등짝만 오가며 고생한 셈이다. 정보란 게 늘 모두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닌가 보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이런 경우가 아닐까.
궁금한 사람은 그냥 몸과 맘으로 몽땅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라서 어쩔 수 없는 셈이다. ???
천여 년 이상을 걷기 좋기에 만든 길이니 걷기 좋아하는 사람에겐 천국이지 싶다.
사진으로 모두 담자면 길을 갈 수 없다. 인상적인 것만 남기려 해도 자꾸 발목을 잡는다. 눈에 부지런히 담으며 길을 재촉할 수밖에. 며칠씩 머물다 가면 정말 좋겠다.
페레그리노peregrino에게 대한 오랜 존경과 배려 전통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연탄재처럼 발로 차이지나 않았으면 다행한 갑남을녀에게 보내는 그들의 환대는 잠시 착각할 정도였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이 맛에 길들이면 왜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 알만했다. 이 길에선 그들의 인기가 정말 부럽지 않았다.
누구에게, 어디에 고갤 숙여야 할지 모르나 진정 감사한 일이다.
허나 산티아고는 나쁜 것은 기억하지 않으려 하고 좋은 것만 맘에 담아두고 싶다. 이건 말이나 글로는 한계가 있다. 이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궁금한 사람은 직접 걸어보길 바란다.
대체로 자고 있는 사람을 방해 안 하려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배려의 마음을 갖고 불을 켜는 일부터 했어야 했다는 뒤늦은 반성에 이르게 하였다.(규칙을 넘어 서는 배려)
등짐을 가볍게 하기 이해 무게만 줄여서는 안 된다. 지고 가는 짐은 곧 욕심이니 그걸 줄이거나 내려놓아야 한다. 이걸 빨리 깨우쳐야 멀리 빠르게 오랫동안 걸을 수 있다.
두 다리로 걸으며 공간을 이동하는 동물적 본능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씨앗을 떨어트린 곳에서만 붙박이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나무는 맛볼 수 없는 희열을 느낄 때 걷기 여행은 행복감을 전신으로 실어 나른다. 한곳에서 이것저것 끌어안고 살려고만 한다면 늘어나는 것은 소유욕이요, 커지는 것은 허전한 공허일 뿐이다. 품는 물건이 늘어날수록 그 이상의 욕구만 자란다. 이제 여자에겐 쇼핑 중독을 부르고 끝내는 파산의 구렁텅이로 불행한 결말을 짓게 한다. 남자는 좀 더 크게 일을 벌이면 공간 확장을 꾀하려는 몸짓에 매인다. 여기저기 땅을 사서 모으거나 자동차 크기를 키우고 집의 평수를 늘리는 데 골몰한다. 그 끝은 단언컨대 파국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 오대양 육대주를 발로 거닐어도 좋을 세상이 왔다. 세상이 넓어졌으니 걸어갈 곳은 많고 많다. 걸으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살아오면서 언제 우리가 30여 일을 골똘히 나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이것은 범죄자가 독방에 갇혀야만 가능한 현실이니 보통 사람들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독방에 안 가고도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게 바로 이 길이다.
데카르트가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걸 이렇게 바꾸면 어떨지. ‘나는 걷는다. 고로 나도 존재한다?’ 산티아고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으며 간단없이 붙잡는 것이 너는 왜 걷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이다. 무념하게 걷다가도 어느새 생각 한 자락이 펄럭이며 달려든다. 너는 왜 걷느냐고? 참선수행 중인 도인에게 화두와 함께 떨칠 수 없는 睡魔수마처럼 이 물음이 달라붙는다. 결코 벗어놓고는 나아가지 못할 배낭마냥 등짝에 매달려 졸라댄다. 보채는 아이 돌려 앉고 젖을 물리는 어미가 되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다.
여기 시간과 공간은 변화한다.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이에 따라 인생도 사라져갈 게다. 시간이 변하면 걷고 있는 이 길 역시 그에 맞춰 달라질 터이고. 시공은 언제나 함께 공생하는 親緣친연 사이임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니 바뀌고 달라지고 변동할 것이다. 아니 그 모든 것이 사라질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사라지는 존재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행위의 하나가 걷는 것은 아닐지. 이 순간의 생생함을 잡아채고자, 몸으로 전해오는 생의 실존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카미노 길도 마찬가지이듯, 인생길도 유사하다. 시작점과 종착점이 같은데, 그 과정에서 너무 다른 것처럼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의 의욕을 버리거나 없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카미노를 걸으며 남보다 너무 무겁거나 많은 짐을 지거나, 다른 길을 벗어나 걸을 수 없듯, 인생길도 적당한 짐을 지고 남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러 집착을 내려놓고 천천히 여유롭게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밤은 별이 깨어 있어 늘 신비롭다. 별은 수억 광년 먼 거리에서 사람에게 기적을 만들어 매일 보내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많은 역사가 밤에 이루어진다 했는데, 내 몸에도 그게 보내져 왔나 보다. 하룻밤이 지나자 말끔하게 통증이 사라진 상태다.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신자도 아닌데다 크리스마스도 멀었는데 종교적 의미까지 부여하고 싶게 한다.
앞으로 탈나지 않고 카미노를 완보하는 데는 허점투성이 정신보다 더 확실한 밤의 기적을 믿는 것이 옳겠다 싶다. 이 몸이 세상에 던져진 것도 바로 밤이 보여준 기적이 아니겠는가. 오늘은 별이 보내주신 은총을 가슴에 품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산티아고도 멀지 않으리라.
함께 붙어 있으면 모른다. 그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곁을 떠나서 빈 공간에 놓여있을 때 비로소 스멀스멀 다가온다. 가까이 있을 땐 곁을 오히려 떠나고 싶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멀리 벗어나고 싶기까지 한다.
그가 반드시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살고 있는 나날이 지루할 때, 이것저것 챙기기 싫을 때는 떠나는 것이 해결책이다. 그대로 있다간 폭발하거나 더욱 악화만 된다. 여행이란 바로 이럴 때 떠나야 참맛을 볼 수 있다. 마음이 부르고 몸이 반응하는 여행은 바로 이것이다. 몸은 그냥 마음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배낭을 메는 수고를 아껴선 안 된ㄷ.
그렇게 떠나온 길인데 얼마 안 가서 떠나온 곳이 그립고, 두고 온 그가 보고 싶어진다. 떠나고 싶게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것이 여행의 의미는 아닐까. 그리움을 붙안고 떠나서 그리움이 가득 차서 돌아오는 것.
고여 있는 물처럼 잔잔하기만 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흐르고 싶어 여행길에 오른다. 태생적 역마살에 묶인 몸이 아니라면 얼마 안 가 떠나온 그곳이 다시 생각나고 돌아가고 싶다. 있으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두 마음,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는 쌍곡선이다.
nature calls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헷갈리게 하는 밤, 홀로 깨어서 인생길을 헤아려 본다.
남녀 사이의 영원한 편차, 금성과 화성의 차이라고 누구는 책 제목으로도 썼다.
분리된 한 인간으로 독존하기 위해선 탯줄을 잘라야 한다. 첫 상처는 우리 몸 가운데에 생명 세계의 낙인으로 남았다.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다.
살다가 죽음의 길에 나서는 것도 이와 같으리라. 같이 갈 수 없는 길이거니와 누구한테 알리고 갈 수도 없는 길이 죽음이 아닐까.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유언으로 남기며 떠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무한테나 허용된 일은 아닐 터. 우리의 오복 중에도 考終命고종명이라 하는 것은 이것을 일컫는 거지만, 말을 남기고 간들 무엇이 크게 다를 건가. 홀가분하게 말없이 떠나는 것도 남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배려가 아닐까? 떠나기 전 말할 수 있을 때 충분히 나누는 것이 더욱 좋을 성싶다. 나 또한 그러길 바란다. / 알베르게에서의 아침 출발 장면 /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 따라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이제 철이 조금 들어가는 거 같다. 산다는 게 결국 남 따라서 걷는 거란 걸 깨우치게 하니.
카미노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삶은 계란은 맛나고 요긴한 간식거린데, 주방이 있고 살 수 있는 곳에선 전날 준비하여 다음 날 떠나기 전에 삶아서 들고 다니며 먹어왔다. 스페인 가게에선 삶은 달걀을 파는 것을 보지 못했다.
국어 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건 다름 아닌 주제 파악, 수학에선 분수 계산이라 한다. / 인생살이에 적용해도 좋은 것, 주제와 분수가 그것이다. / 주제란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다. 자아에 관한 인식을 말한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해야 주제 넘은 짓을 안 하게 된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나서다가는 패가망신하기 딱 좋다.
이곳 카미노에서도 역시 필수교과가 있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단단한 목표 의식이 그 하나요, 다음엔 이를 뒷받침할 건강한 신체이다. 또 하나 더 들자면 새로운 것과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마음 자세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이 길의 필수교과 점수를 올리려고 맹렬히 노력하는 중이다.
염상섭의 장편소설 <三代>가 있다. 祖父孫 삼대에 걸친 趙氏家 집안의 몰락을 그렸다. 세대 간의 단절과 대치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대사를 재구성하였다. 조부 세대의 보수성, 개화기의 정신적 파탄, 식민지 시대 청년의 진보성을 조씨네 삼대가 대표한다. / 스페인은 한 가문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삼대가 아닌가 한다. 나라이니 집안보다 시간적 폭이 더 넓을 뿐이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 혹은 현대까지의 삼대로 보아도 될 듯하다.
가장 큰 차이는 삼대가 함께 어울려 있다는 점이다. 고대와 중세와 현대가 아무렇지 않게 섞여 나름의 조화로운 풍경을 연출했다. 서로 배척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며 함께 어깨를 맞대고 웃었다. 어느 세대에 속하건, 어떤 취향에 있던 그릇 안에서 잘 섞이는 비빔밥을 보는 듯했다. 우리는 비빔밥을 즐겨 먹지만 스페인은 비빔밥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유럽지역과 달리 오랫동안 전쟁 없이 살아온 환경 탓이 크겠지만, 그들 표정을 보면 유전적 형질인 듯싶었다. 평온한 낯빛과 진심어린 말로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 생래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서로 싸우거나 큰 소리 치는 것을 여행 내내 본 적이 없다. 평화를 유달리 좋아하는 민족은 아닌지. 아니면 낡았다고 쉽게 부수거나 내다버리지 않고, 엉뚱하다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비웃지도 않으며, 세월의 풍화에 맡겨 자연에 일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삼대는 역사책에만 존재할 뿐이다. 가정의 삼대도 찾아보기 어렵다. 도시나 마을의 풍경도 획일화된 당대만 번적인다. 남은 없고 나만 귀하며 어제는 빨리 없애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피곤한 현재만 넘실거린다. 삼대가 어울려 오순도순 사는 날은 언제쯤 우리에게 올 것인가. 꿈속을 거닐 듯 비척거리며 카미노를 걷는다.
유럽인끼리는 의사소통이 자유로워 보였다. 언어는 다른 것 같은데 통하는 말은 있는가 보았다. 그게 반드시 영어만은 아니었다. 불어와 독일어도 들리고 스페인어와 다른 말도 들렸다. 서로 연결된 대륙이고 통행이 쉽고 자유로워서 그런지 모르겠다. 공용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어도 하여튼 그들은 쉽게 통했다.
귀국하면 외국어 학원 등록부터 서둘러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떤가. 중국 대륙은 북한이 가로막고 있고, 일본은 바다로 막혀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말은 서로 많이 달라서 통하기 어렵다.
이곳에 나의 분노를 내려놓고 싶다. / 모조리 내려놓고 싶다. /
용서하는 마음을 깊숙이 품고 돌아간다면 좋겠다. / 배려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 / 웃는 얼굴로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 / 부드러운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좋겠다. / 잔잔한 평화의 시간이 지속되면 좋겠다. /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다. /
지나온 길이 햇살 사이로 무지개처럼 펼쳐진다. 산티아고에 결국 입성했다. ··· 이 모든 것이 추억의 저장고에서 숙성되어갈 것이다.
카미노의 길에 종착이 있듯 인생도 전연 끝이 있을 것이다. 지상의 생이 끝나면 종교에선 천국의 삶이 있다고 한다. 분명코 알 수는 없지만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은 맞을 것이다. 카미노를 내발로 걸었듯 직접 맞닥트려 걸어 가보는 수밖에 없다. 산티아고를 향해 하루하루 부지런히 걸었듯, 그 세계를 향하여 앞의 인생길을 자박자박 쉼 없이 걸어갈 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겠는가.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하늘 저편에 눈길을 보낸다.
페레글리노끼리 만나면 주고받는 ‘부엔 카미노Buen Camino’ / 스페인식 인사 ‘올라’를 던져본다. /
두 발로 800여 킬로 거리를 이동하였으니 원시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공간 이동 방식을 따른 것이다.
사람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 움직임을 정지 하는 게 곧 죽음이다. 동물에게 움직임은 살아가는 일이며 태생적 숙명이다. / 식물도 움직인다. 공간 이동은 못하지만 수평적 수직적 이동을 하며 가지를 옆으로 벌리고 위로 줄기를 키운다. / 움직이는 게 아니고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동식물 모두 움직여서 생물이라 불린다. /
인간의 가장 원시적 이동 수단인 걸음으로 나는 그동안 움직여서 여기에 온 것이다. 결국 살아있다는 증명이고 살아야한다는 책무를 완수한 셈이다. 카미노 완보는 말하자면 생물로서 내 몫을 한 것과 다르지 않다. 별게 아니라 그저 타고난 바의 역할을 한 것이다. 결코 자랑하거나 크게 내세울 게 못 된다.
무심히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걸어온 길과 갈 길을 헤아리며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누군가 길을 걷는다는 참된 의미가 여기에 있지 싶다.
카미노도 끝이 있듯, 인생에도 분명 끝나는 날이 오겠지요. 지상을 떠나는 순간, 그날을 생각해 봅니다. / 그날은 아마 한 사람만 남아 있겠지요. 내 곁에 남을 최후의 사람. / 부부 사이는 0촌이라 하더군요. / 0촌의 의미는 그런가 봐요. 한 몸이거나 아니거나 말이지요. 살아서는 물론이나 죽어서도 곁에 남을 오직 한 사람, 아내가 소중한 걸 깨우치는 길이 카미노 데 산티아고였습니다. / 끝. / 방민 기행 수필집 <용서의 언덕 너머 / 카미노 데 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