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실체와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개혁 군주’로 평가되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조선은 몇몇 특정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로 인해 암울한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11살의 나이로 즉위한 순조를 대신해서 선왕인 정조보다 어렸던 영조의 후비인 정순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그 친정인 노론의 핵심 가문 안동 김씨의 정권 장악력이 더욱 공고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남인들이 많이 가담하였던 천주교교들을 ‘사악한 학술(邪學)’이라는 미명으로 탄압하여, 이른바 ‘신유박해(1801)’를 시작으로 대규모의 순교자가 이어지게 되었다. 주지하듯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인 정약용이 이에 연루되어, 처형을 겨우 면한 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순조가 15살이 되던 해인 1804년부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거두어지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지만, 안동 김씨가 장악한 정권의 핵심부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권력자들의 횡포가 지속되고 이에 민중들의 삶이 더욱 고단해지면서, 평안도 정주에서 흥기한 농민군이 홍경래의 주도 아래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홍경래의 난’으로 칭해지는 이 사건은 19세기 내내 발생한 ‘농민봉기’의 명분과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세기 초반부터 계속 이어진 민중봉기의 의미를 평가하여 당시를 '농민봉기(민란)의 시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병약한 순조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이 효명세자(익종)가 잠시 대리청정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한때 개혁을 추구했던 세자의 죽음 이후 다시 권력은 세도정권의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실시되면서, 이전부터 조선의 해안에 출현했던 ‘이양선’으로 인해 서양 세[력의 침탈이 시작되는 조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당시 정순왕후의 후원 아래 권력을 장악하였던 이들은 안동 김씨 가문으로, 특히 한양의 경복궁 서쪽 자하동에 거주하면서 위세를 누렸던 이들을 따로 ‘장동 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당대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19세기의 상황을 일컬어 ‘세도정치’라고 한다. 순조의 치세를 다룬 이번 시리즈의 제목을 ‘가문이 당파를 삼키다’로 명명한 것도 당시의 ‘세도정치’의 위세가 그만큼 막강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더욱이 이전까지 기록에 충실했던 실록의 내용이 순조 집권 후반에 이르면 내용이 부실해지고 있는데, 이 역시 당시 권력을 장악한 이들에 의해 남겨진 유산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차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