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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다른 곳에
-김행숙
“딴 사람 —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김수영, 「생활의 극복 ―담뱃갑의 메모」
“권투 선수가 나비를 사랑하듯, 가수가 침묵을 사랑하듯,
악한이 마을 처녀를 사랑하듯, ……
백정이 송아지의 겁먹은 눈을 사랑하듯,
번갯불이 조용한 전원의 집을 사랑하듯, 그녀를 사랑한다고……”
-밀란 쿤데라, 생은 다른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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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적인 장애증상의 한 가지를 가리키는 정신분석 용어로 사용되고, 흔히들 왕자병, 공주병으로 가볍게 번역하는 나르시시즘. 이 악명 높은 용어의 어원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의 아름다운 소년, 나르키소스의 잘 알려지지 않은 괴로움에 대해 우리는 먼저 얘기를 나눠보기로 하자.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져 황홀해하는 나르키소스가 아니라,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했던 바로 그 나르키소스에 대해서 말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펼치면,
아름다운 나르키소스에게 구애를 하고 거절당한 많은 동남동녀, 요정들 중에 한 명이 그를 향해 저주의 기도를 한다. “저희가 그를 사랑했듯이, 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소서. 하시되 이 사랑을 이룰 수 없게 하소서. 이로써 사랑의 아픔을 알게 하소서.” 이 기도는 이상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르키소스는 숲 속의 맑은 샘에 비친 아름다운 영상을 사랑하게 되었다. 드디어 만질 수 있을 것같이 가까이 가면 끝내 달아나버리는 영상이었다. 그는 이 그림자를 물의 요정쯤으로 여겼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걸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다. 거울이라는 발명품이 없었으니, 나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가장 낯선 것이었다. 거울을 대신하는 타인의 눈을 통해서만 나의 얼굴은 비로소 햇빛 속에 드러날 수 있다. 나르키소스의 오해는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 “그는 쫓는 동시에 쫓기고 있었다. 그는 격정으로 타오르는 동시에 태우고 있었다.”
거울을 처음 마주한 어린 아이가 거울 속의 얼굴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서서히 자각하게 되듯이, 나르키소스에게도 마침내 그런 앎이 찾아왔다. “나를 태우던 불길, 그 불을 지른 자가 바로 나였구나. 내게 넉넉한 것이 나를 가난하게 하는구나. 나를 내 몸에서 떨어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신들이시여,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내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소서.” 그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르키소스는 자기애(自己愛)의 쾌락이 아니라 불가능성의 고통을 겪다가, “하나가 죽으면 나머지 하나도 따라 죽어야 하는 운명” 속으로 사그라졌다.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사랑은 내 몸에서 떨어져 있는 바깥의 타자를 간절하게 요청한다는 것을 비극적으로 웅변한다. “딴 사람, 참 좋은 말이다”
나르키소스의 죽음은 블랑쇼의 다음과 같은 말에 절실함을 보탠다. “인간 존재는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인되기를 원한다. 인간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때로 자신을 부인하기도 하는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 타인만이 말을 가능하게 한다. 아니 말이 아니라 차라리 말을 하라는 간청. 말과 함께 거부될 수도 있고, 제대로 들리지 않을 수 있거나 받아들여지지도 못할 수 있는 간청.”(「밝힐 수 없는 공동체」)
저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를 전망대라고 생각해봅시다.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 앉은 까마귀를 다른 전망대라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당신의 전망대가 무너졌다고 탄식하기로 합시다.
한 그루 나무가 뿌리째 뽑히면, 얼마나 많은 눈동자들이 한꺼번에 눈을 감았는지 온 세상이 다 캄캄해졌습니다.
숲이 불타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처럼 활활 타고 있습니다.
불이라면, 불의 군주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따라 서울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불빛에 도취한 연인의 독백이 독재자의 것처럼 느껴져 나의 사랑이 무서워졌습니다.
-「다른 전망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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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을 찾는 일이다”(이문재, 「손은 손을 찾는다」). 사랑에 빠진 손, 사랑을 찾는 손은 어둠을 더듬어 다른 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뭍을 떠난 배가 다른 세계로 나아가듯이. 혹은 머언 바다를 건너 드디어 낯선 세계에 이제 막 도착하듯이.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서정주, 「추천사」)
‘생은 다른 곳에’는 랭보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앙드레 브르통이 그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결론으로 인용했다. 1968년 5월에는 파리의 학생들이 이 말을 그들의 슬로건으로 삼아 소르본 대학교의 담벼락에다 낙서를 해놓곤 했다.
이것은 밀란 쿤데라가 소설 생은 다른 곳에의 서문을 쓸 때 첫 문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내 삶을 바꾸고 “사랑을 재발명해야 한다”고 했던 랭보의 요구와 “세계를 개조해야 한다”고 했던 맑스의 테마는 ‘생은 다른 곳에’라는 동일 슬로건을 공유할 수 있었다. 현대 프랑스의 지성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모든 주제와 관련하여 철학적 요구에 부응하는 역할을 학자, 예술가, 혁명가, 그리고 연인에게서 찾았다. 그는 이 네 가지, 학자, 예술가, 투사, 연인을 철학의 4대 조건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서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연인’이다. 그의 책 사랑 예찬이 가장 좋아한 문장은 아르뤼드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온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였다.
그런 바디우가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하는 광고들.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결혼정보 회사나 연애 블러그에서 애용하는 문구들. 사랑은 어쨌든 지극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연인(나아가 가족) 공동체에 닻을 내리고 편히 쉬기도 하지만, 오래 쉬면 잠이 오게 마련이고, 사랑의 침대는 어느덧 사랑의 무덤으로 변해 있기 십상이다.
사랑은 생물체 같은 것이어서 어떤 식이든 ‘활기(活氣)’가 있어야 한다. 사랑이 살아 있는 것일 때, 그것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기쁘고, 우울하고, 다시 기쁘고, 다시 아프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체온과는 또 다른 종류의 열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불처럼 뜨겁고, 1994년 4월 23일의 바람처럼 따뜻하고, 지하 동굴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서늘하고, 심지어 북극의 얼음 바다처럼 차가워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것은 회사 앞의 버스 정류장을 세상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장소로 돌변시킨다. 그것은 높은 파도처럼 거칠고, 낮은 잔디처럼 잔잔하고, 가슴에 박힌 바위처럼 고집스럽고, 마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부드럽다. 그것은 걷고 달리고 날아오른다. 그것은 넘어지고 다치고 부서진다. 사랑의 운동이 정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것이 부서져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시작을 향해서도, 끝을 향해서도 꿈틀거린다.
언젠가 나는 시에 이렇게 썼다. “사랑은 자꾸자꾸 답을 내놓지, 너를 사랑해/ 그리고 너를 미워해도 이야기는 계속된다”(「공진화co-evolution하는 연인들」). 사랑은 운동이고 사건이다. 사랑은 체험이고 모험이고 실험이다.
바디우는 “사랑의 놀라움들”에 관해 성찰해보자고 권유한다. 그는 자신의 책제목 사랑 예찬이, 플라톤의 인용구처럼 “사랑에서 시작하지 않는 자는 철학이 무엇인지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한 철학자가 제안하는 바라고 밝혔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평소에 사랑에 관해서밖에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해 왔으니”(플라톤, 「향연」) 사랑을 오늘의 심포지엄 주제로 삼는 것을 반긴다고 말했다.
사랑이 “시작되는 그 순간의 황홀감”은 침침한 인생을 한순간 환히 비추는 빛 같은 것이라 할 만하지만, 사랑이 ‘지속’되는 중에 일어날 사건들을 결코 다 비추지 못한다. 눈이 멀 것 같은 그 사랑의 빛은 아직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 앞에는 미지(未知)의 시간이 놓여 있다. 사랑을 “진리의 절차(procédure de vérité)”,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 바디우에게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다. “최초에 선언된 바로 그 사랑도, 역시 ‘다시 선언’되어야” 한다. ‘재발명’되고,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랑으로부터 불확실성과 위험과 시련을 삭제할 수 없다.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사랑은 성장하고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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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마르케스가 말년에 쓴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등장하는 어느 할아버지의 자기 발견이다. 돈을 주고 산 관계 이외에 사랑의 관계를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하고 아흔 살에 이른 한 노인이 자신의 그 낡고 늙은 몸을 뚫고서 이렇게 사랑을 선언한다. 그는 아흔 살에 존재와 삶의 재발명을 선언하고, 경험하고, 처음으로 글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배우고 있는 중이다. ‘나이’가 사랑의 적(敵)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살아 있는 존재라면, 사랑의 가능성은 살아 있다. 우리가 아직 죽지 않은 존재라면, 사랑의 가능성, 배움의 가능성은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안전하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한다.
이제 어느 중국인 아가씨의 사례를 좀 들여다보자. 소개할 아가씨는 샤오루 궈의 소설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23세 중국인 아가씨 Z(여권의 성명란에는 Zhuang Xiao Qiao라고 적혀 있고, 랭귀지 스쿨 강사에게는 미즈 좌-우-앙으로 불리며, 발음을 어려워하는 대부분의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자신을 Z라고 소개하고 또 그렇게 불린다)는 요즘 세상을 제대로 살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는 부모님 성화에 떠밀려 오직 콘사이스 중영 사전(Concise Chinese-English Dictionary) 한 권을 손에 꼭 쥔 채 낯선 런던 땅에 떨어진다. 그녀의 1년간의 영국 체류기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 한 가지는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 있어서, 그녀의 표현으로 하자면 다른 세계의 언어를 훔치는 데 관해서라면, 어학당 강사보다는 외국인 애인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서로에게 외계인에 가까운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고 지속하면서 그녀가 습득하는 언어의 특별함이다. 그것은 단순히 국제무대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글로벌한 도구를 획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매일 적는 단어장이자 일기장의 서툰 영어는 사랑의 사건을 적고 있으므로 그녀만의 고유성과 비밀을 품고 있다. 그녀가 쓰는 영어 단어와 문장은 그녀의 엉킨 사랑을 담고 있으므로 사전과 문법으로 완전히 해독될 수 없다. 그녀는 사전에 없는 언어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아흔여덟 살의 한 중국여인의 죽음과 함께 멸종 언어가 된 ‘누슈’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영어공부로 환원되지 않는 자신의 영어일기의 ‘누슈’적인 속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그녀가 쓴 그날의 일기장을 여기에 그대로 펼쳐 둘 것이다. 그 전에 먼저, 그녀의 일기를 읽게 될 여러분에게 감히 주문하고자 한다. Z의 서툰 영어가 이 소설에서는 핵심이므로, 또한 그녀의 사랑에서도 본질적인 부분이므로, 번역자가 서툰 영어를 서툰 한국어로 옮기는 데 고심했다는 점을 각별히 주목해주길 바란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Z의 서툰 언어가 매우 적절할 뿐 아니라 매력적이라고까지 느꼈는데 그래서, 사랑의 언어는 본래 서툰 언어가 아닐까, 외국어가 사랑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었다.
말을 잃다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의 언어
그것은 갓 죽은 아흔여덟 살의 중국 여인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여성 전용 언어인 누슈(nushu. 약 400년 전 중국 여성이 만든 선, 점, 쉼표, 곡선으로 이루어진 언어로, 남성들은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 간의 은밀한 이야기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었다)의 마지막 사용자다. 400년 된 이 비밀 언어는 그들의 가장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중국 여성들이 사용했음. 신문은 더 이상 그 비밀 암호를 말하는 여자들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 이후 그 언어가 죽었음을 전한다.
나는 나만의 ‘누슈’를 창조하기 원한다. 어쩌면 내가 새로운 영어 어휘를 적기 위해 사용하는 이 공책이 ‘누슈’다. 그러면 나는 나만의 프라이버시를 갖는다. 당신은 내 몸, 나의 매일의 삶을 알지만 당신은 나의 ‘누슈’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5월 어느 날의 일기인데, 이날 그녀는 ‘프라이버시’라는 단어를 그녀 안에서 재탄생시키고 있다. 그 전에, 4월의 어느 날엔가 남자가 그녀에게 소리 높여 주장한 ‘프라이버시(사생활)’ 때문에 그녀가 몹시 상처 입게 된 일이 있었다. 서양 남자가 지키고자 하는 ‘프라이버시’와 여기서 그녀가 새롭게 그녀 안에 품은 ‘프라이버시’의 차이를 그녀의 성경책 콘사이스 중영 사전은 조금도 설명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어휘 ‘프라이버시’는 ‘사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지시어라기보다는, 겉으로는 결코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랑의 내면’을 에두르는 단어다.
남자는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서로의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야 하는 법이라고. 그의 ‘프라이버시’는 사랑의 영역 바깥에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일지라고,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알고 서로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는 침대에서 서로가 누리는 쾌락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모르고, 함께 잠든 침대에서 서로가 어떤 꿈을 꾸는지를 우리는 도저히 알 길이 없고, 같은 창문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서로가 하는 생각을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으므로 당신은 나의, 나는 당신의 ‘프라이버시’를 알 수 없어요. 그녀의 ‘프라이버시’는 사랑의 가장 깊은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한 일이라고 했던 작가 이상(李箱)이라면, 어느 후배 소설가가 ‘밀당’을 일찍이 현대소설에 끌어들인 선구자로 지목했던 바로 그 이상이라면, 이 두 개의 단어 ‘프라이버시’, 남자의 것과 그녀의 것 중에서 어느 쪽 비밀의 화원에다 더 마음을 썼을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와 그녀의 차이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녀의 차이는 애초에 분명하다. 그녀는 오른쪽에서 자전거를 타야 하는 나라에서 살았고, 그는 언제나 왼쪽에서 자전거를 타는 나라의 사람이다. 그녀의 고향에서는 들판에 한 가지 식물, 벼만 키우는데, 그는 10제곱미터 정원에 열여섯 가지 다른 식물을 키우는 남자다. 그녀는 스물 셋이 되도록 자위조차 해 본 적이 없고 사랑으로 영원한 가정을 함께 만들어갈 단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방식으로만 섹스를 생각해온 여자였는데, 그는 섹스 경험이 풍부한 양성애자이며 가족과 아이를 절대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남자다. 그녀는 미래를 위한 현재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는 미래 없이 현재를 소박하게 누리는 것이 진정 인생을 사랑하는 법이라고 여긴다. 그녀는 도시를 좋아하고, 그는 시골을 좋아한다. 그녀는 스물세 살이고 그는 마흔네 살이다. …… 그와 그녀의 대조적인 면모를 살피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이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 그리고 사랑의 시간 속에서 차이는 양적으로 좁혀진다기보다 어떤 질적인 변모를 겪는다.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미묘하게 변하는 것이다. 사랑이 미묘한 것인 만큼 이 변화도 미묘하다. 이러한 차이의 변이 과정에서 그녀는 ‘프라이버시’라는 그녀의 단어를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1년 전, 베이징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직 당신 못 만남. 당신은 미래에.” 그녀는 혼자서 베이징에서 런던으로 가는 중이다. 1년 후, 런던에서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그녀도 혼자다. 두 사람은 결국 결별을 택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열세 시간 뒤, 우리는 베이징에 도착한다.” 아니, 왜 ‘우리’인가?
베이징에 도착한 그녀는 “1년 전과 같은 Z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결코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둘이 함께 사랑을 나누고 만들던 그 무대의 막이 내리고, 이제는 제각각 서로 “다른 행성”에서 더는 겹치는 일 없이 살아가게 되었다 해도, 그들이 했던 그 사랑은 새로운 삶의 분자(分子)로서 각자의 다른 삶 속에 이미 당도해 있는 것이다. 그 사랑 이전과 이후가 결코 같을 수 없다면 말이다.
Z가 그렇듯이, ‘나’는 ‘우리’다. 그 속사정을 좀 들여다보자면, 그 우리 ‘사이’는 복잡하고, 이런 저런 말썽도 적지 않고, 서로를 자주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우리가 아니라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닐 것이다.
중국인 아가씨 Z는 사랑을 시작하고 지속하면서 글쓰기를 끈덕지게 했다. 그녀는 사랑을 함으로써 자신의 언어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녀의 러브 스토리는 “빨간 장미 때문에 피를 흘리는 나이팅게일처럼, 상처 받고, 상처 받고, 상처 받았다”고 하는 이별로 끝나지만, 사랑의 재발명, 삶의 재발명, 언어의 재발명으로 반짝반짝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