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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통치구조와 정치활동
제1절 고대의 정치
Ⅰ. 고대의 세계
1. 서양의 고대
가. 그리스시대
⑴ Mainland : Helladic period
① Early Helladic (EH): 3200/3100–2050/2001 BC
② Middle Helladic (MH): 2000/1900–1550 BC
③ Late Helladic (LH): 1550–1050 BC
⑵ Crete : Minoan civilization
① Early Minoan (EM): 2700–2160 BC
② Middle Minoan (MM): 2160–1600 BC
③ Late Minoan (LM): 1600-1100 BC
⑶ Cyclades : Cycladic civilization
① Early Cycladic (EC): 3300–2000 BC
② Kastri (EH II–EH III): ca. 2500–2100 BC
③ Convergence with MM from ca. 2000 BC
나. 로마시대
BC 1000년 거주
BC 8세기 중엽 Latin족 Tevere강변에 작은 도시 국가 건설
BC 6세기 초 Eturia인 통일국가 완성
BC 509년 공화정 시작
BC 375~275 영토확장 대제국 건설
BC 270 이탈리아바도 통일
BC 264~146 포에니전쟁
BC 123~121 Tiberius와 Gaius Gracchus형제의 개혁
BC 27 Augustus 건설 ~330
BC 59~53 제회 삼두정치
BC 43~33 제2회 삼두정치
BC 31 Actium 해전
96~180 5현제시대
245~312 Diocletianus
272~337 Constantinus
324 비잔티움 천도
395 Theodosius 사후 동서로마 분열
로마제국(Imperium Romanum)
동서분열(AD 395) Theodosius 1세 | 동로마(395~1453)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 153년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구스 때 Ossman Turks Mehmet(메흐메트, 메메드)2세에게 멸망 |
서로마(395~476) 호노리우스(Honorius) | 476년 Romulus Augustus때 German 용병대장 Odoacer(Odovacar, Audawakr 독)에게 멸망 |
2. 동양의 고대
주(周)-춘추전국시대-진한시대-남북조시대-수당
Ⅱ. 고대 국가의 성립
1. 고대국가의 등장
가. 고대국가의 등장 배경
⑴ 군장국가(성읍국가. 부여 사출도, 고구려 나집단)
⑵ 연맹왕국(고조선, 초기 고구려, 부여, 삼한, 가야연맹)
⑶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고구려, 백제, 신라)
나. 고대국가의 특징
⑴ 정복 전쟁을 통한 영토의 확장
⑵ 지방 족장의 관료화
지방의 군장세력을 국왕권력 밑으로 편입
⑶ 율령 반포
⑷ 불교 수용
⑸ 왕위 부자 상속
구분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고대국가형성 | 6대 태조왕 2C | 8대 고이왕 3C | 17대 내물왕 4C |
부자상속 | 9대 고국천왕 | 13대 근초고왕 | 19대 눌지왕 |
불교공인 | 17대 소수림왕 372년 | 15대 침류왕 384년 | 23대 법흥왕 535년 |
율령반포 | 17대 소수림왕 373년 | 8대 고이왕 | 법흥왕 |
역사편찬 | 국초에 유기(留記), 26대 영양왕 11년 660년 이문진(李文眞) 신집(新集) 5권 | 13대 근초고왕 30년 375년 고흥(高興) 서기(書記) | 24대 진흥왕 6년 545년 거칠부)居柒夫) 국사(國史) |
전성기 | 19대광개토왕 20대장수왕 5C | 13대 근초고왕 4C | 24대 진흥왕 6C |
2. 삼국의 성립
가. 고구려
B.C. 37년 5월 주몽(朱蒙, 본명 鄒牟(추모. 활의명궁)
부여 유이민과 압록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및 부분노(扶芬奴), 부위압(扶尉壓), 극재사(克在思)의 도움
연호를 다물(多勿, 옛 영토를 회복한다)
나. 백제
B.C.18년 온조(溫祚)북방 유이민과 한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하북남위례성(河北慰禮城)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다. 신라
신라는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하여 박,석,김의 세부족 연맹을 거쳐 6부족 연맹체로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경주를 중심으로 건국. 신라는 토착 세력이 강하여 유이민 집단을 흡수, 동화하였다.
6촌
방향 | 마을 | 촌장 |
동쪽 | 양산마을 | 알평 |
남족 | 고허마을 | 소벌도리 |
서쪽 | 대수마을 | 구례마 |
동남쪽 | 진지마을 | 지백호 |
동북쪽 | 가리마을 | 지타 |
더 동북쪽 | 고야마을 | 호진 |
라. 가야의 성립
⑴ 가야 연맹의 성립 : 2, 3세기경 김해의 구양국은 김수로를 주축으로 건국(42)하여 본가야로 발전
⑵ 본가야(금관가야) 연맹 : 3세기경 전기가야연맹의 맹주로서 영토 확장, 통치 조직 정비 →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로 세력 약화 → 신라에 병합(532년, 법흥왕)
⑶ 대가야 연맹 : 5세기후반 후기가야연맹의 맹주로서 미오야마국은 이진아시를 시조로 5세기 이후 고령 중심의 연맹 세력권 재편→ 중국 남조에 사신 파견, 신라,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 → 멸망(562, 진흥왕)
⑷ 한계 :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 →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 하지 못함
⑸ 경제적 번영 : 농경문화, 철생산과 중계 역(한 군현, 왜)
⑹ 문화
①유적 : 고령 지산동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 김해 대성동 고분
②유물 : 금동관, 철제 무기, 갑옷, 토기(일본 스에키에 영향)
이름 | 지방 | 기타 |
금관가야(金官伽倻.本伽倻) | 김해 | 김수로(金首露)가 구야국(狗倻國)에서 발전하여 532년 신랑에 망함 |
대가야(大伽倻) | 고령 | 이진아시(伊珍阿豉)가 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에서 발전하여 562년 신라에 망함 |
성산가야(星山伽倻. 碧珍伽倻) | 성주(경산) | |
아라伽倻(阿羅伽倻. 안락국) | 함안 | 531년 백제에게 멸망 |
고령가야(古寧伽倻) | 진주 | |
소가야(小伽倻) | 고성 |
龜旨歌(구지가) : 영신군가(迎神君歌)·구하가(龜何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
Ⅲ. 삼국의 성장 발전과 통치체제
1. 삼국의 정치발전
가. 고구려
⑴ 수도이전
2대 유리왕(瑠璃王) 22년 서기 3년 졸본(卒本. 桓因)에서 통구(通溝. 國內城. 현 集安市)로 천도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위나암성(尉那巖城. 丸都城)을 축조하였다.
⑵ 6대 태조왕(53~146)
① 대외 팽창 : 옥저(沃沮) 정복, 만주 지방으로 세력 확대, 낙랑 압력
② 중앙 집권 체제로의 진전 : 계루부 고씨에 의한 형제왕위계승권 확립
⑶ 9대 고국천왕(179~197) : 왕권의 강화와 통치체제의 중앙집권화 진전
① 5족을 5부(동서남북중)로 개편
②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
③ 연나부(掾那部, 絶奴部) 명림씨(明臨氏)에서 왕비를 맞는 관례
⑤ 진대법(賑貸法) 시행 :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진대법(糶糴法, 조적법) 시행
⑷ 11대 동천왕(227~248)
압록강 입구 서안평을 공격하여 중국과 낙랑을 차단하려하다가 위(魏)나라 역공을 받아 왕 18년 244년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받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19년 245년 왕기(王頎)가 침입하여 왕이 동해안으로 피난하였다.
⑸ 15대 미천왕(300∼331)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며 을불(乙弗), 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로서 서천왕의 손자이며, 고추가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봉상왕 2년 293년 반역 혐의로 죽은후 어릴 때 수실촌의 호민 음모(陰牟)의 집에서 용작하였으며 미천왕 14년 313년 낙랑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대동강유역 차지하였다.
⑹ 16대 고국원왕(331~371)
342년 전연의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왕의 보물, 왕모(10년후 귀환), 왕비(불귀환), 포로 5만명을 사로 잡아 갔고 371년 백제를 침공하여 평양성전투에서 전사했다.
⑺ 17대 소수림왕(371~384)
왕 2년 372년 보편적인 종교로서 전진(前秦)의 순도(順道)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국립대학격인 대학(太學)을 설립하고 373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나. 백제
⑴ 8대 고이왕(234~286)
① 대외 팽창 : 중국의 한 군현과 항쟁.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弓遵) 전사시킴
②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 마련 : 27년(260년) 6좌평 및 16관등 관제정비, 관리의 복색 제정, 29년(262년) 율령 반포
⑵ 13대 근초고왕(346~375)
① 정복군주로서 24년 369년 마한 대부분을 차지하고 목라근자(木羅斤資)가 가야 7국을 통합하는데도 성공하였다.
② 26년 371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故國原王. 斯由) 전사케 하였다.
③ 현재의 경기, 충청 및 전라의 전부와 강원・황해의 일부 차지,
④ 중국 요서지방에 진출하여 요서군을 설치하고 중국 동진(東晉. 317~420)의 무여기지로 이용했으며 산동지방에도 상인들이 진출했고 남쪽 왜와 통교
⑤ 부자상속 왕위계승 확립, 진씨왕비 시대 시작
⑥ 왕 30년 375년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국사 「書記」 편찬 시킴
⑦ 일존 나라의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중인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왕이 일본 제후에게 기사년(己巳年)에 하사란 칼로 되어 있는데 근초고왕 24년 369년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어 왕자에게 왜왕에게 하사하도록 했다.
⑧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아직기(阿直岐)가 4세기 중엽 근초고왕 27년 372년 일본태자에게 한자 가르쳤다
⑶ 침류왕 원년(384년)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새로운 관념체계를 수립하였다. .
다. 신라
⑴ 17대 내물마립간(356~402)
① 대외 팽창 :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 확장
② 중앙 집권 국가로의 발전: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 확립, 마립간 왕호 사용
③ 왜구 격퇴 : 광개토대왕 도움(호우명 그릇)→ 고구려 간섭→ 배제 노력
⑵ 19대 눌지마립간(417~458)
왕위 부자상속이 확립되었으며 왕 17년 433년 백제 20대 비유왕(毘有王)과 나제동맹을 맺었다. 이 무렵 고구려의 아도(阿道) 또는 묵호자(墨胡子)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⑶ 21대 소지마립간(479~500)
수도에 시장(市肆)을 설치하고 우역도 설치했다. 그리고 15년 493년 3월 이벌찬 비지의 딸과 백제 동성왕과 혼인으로 제2차 나제동맹을 맺었다.
⑷ 22대 지증왕(500~514)
신로, 사라, 서라, 서벌로 불리는 것을 신라(新羅)라고 하고 마립간(麻立干)을 중국식 왕(王)으로 바꾸고 우경(牛耕)을 시작하고 동시전(東市廛)을 설치하고 순장(旬葬)을 금하였다. 512년에는 이사부(異斯夫)를 시켜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했다.
⑸ 23대 법흥왕(514~540)
병부를 설치하여 왕이 군권을 장악하고 상대등을 설치하여 재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했다.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535년 불교를 공인하고 532년 금관가야를 정복하고 536년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2. 삼국의 항쟁
가. 고구려의 팽창
19대 광개토왕(391~413)은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요동지역에서 후연, 숙신 등을 복속시키고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399년 임진강가에 이르렀다. 신라 내물마립간의 요청으로 400년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하였고 일생동안 64개 성과 1400개 촌을 공략했다고 한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최초로 사용하였고 사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0대 장수왕(413~491)은 78년간 재위하면서 부왕의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인 평양성으로 옮겼고 중국의 남북조시대(439~589)의 분열된 정세를 이영하여 남북조와 등거리외교를 하고 남하정책을 사용하여 475년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 21대 개로왕을 전사케했다. 21대 문자왕때는 494년 부여를 완전 병합하여 고구려 영토를 확보하였다.
나. 백제의 중흥
475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22대 문주왕(475~477)은 웅진(熊津. 공주)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백제는 왕비족들의 발호로 내부적 혼란이 심했다. 24대 동성왕과 25대 무령왕을 거치면서 부흥의 기운이 일어났다. 24대 동성왕(479~501)은 493년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해T했으며 둘째아들인 25대 무령왕(501~523)은 중국 남조의 영과 통교하면서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국에 22담로(檐魯)를 두어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26대 성왕(523~554)은 왕 16년 538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泗沘, 부여)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다. 중앙관서를 22부(내관 12부, 외관 10부)를 나누었고 수도는 5부, 지방은 5방으로 나누었다. 미륵사 등 대규모 사찰을 건축하고 겸익(謙益)을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고 정신적 토대를 삼았으며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를 통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중국 양나라와는 화친을 강화하였고 한때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때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551년) 553년 신라가 배신하여 그 땅을 탈취하여 탈취당하자 분격한 성왕은 일본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였다.
다. 신라의 도약
24대 진흥왕(540~576)은 정복군주로서 신라의 정성기를 맞이했다. 화랑도를 조직하여 한강유역(551년), 대가야(562년) 및 함경도지역(568년)을 정복했다.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단양적성비(551년), 북한산비(555년), 창녕비(561년), 마운령비(568년) 및 황초령비(568년) 등 순수비(巡狩碑)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거칠부에게 국사(國史. 545년)를 저술케 하였다.
라. 가야의 흥망
가야연맹은 백제의 지원을 받아 신라를 압박했고 신라는 내물마립간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가야를 공략했으며 3세기경 금관가야가 주도하던 전기가야연맹은 400년 광개토왕의 공략으로 해체되었다. 후기가야연맹은 백제와 신라의 세력 다툼 속에서 5세기후반 대가야(伴跛國)가 주도하였다.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가야연맹은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하였다. 다만 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하고 신김씨로서 진골로 편입되었다.
3. 정치제도
가. 삼국 초기의 정치제도
고구려 5부, 백제 5방, 신라 6부의 중앙지배집단을 형성하고 각 부의 귀족들은 독자적으로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통치했다.
삼국은 귀족회의를 운영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각부의 우두머리들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했으며 국왕은 하나의 부를 대표하는 우두머리로서 귀족회의에 참여했다.
삼국의 귀족회의
고구려 | 제가회의(諸加會議) |
백제 | 정사암회의(政事巖會議) |
신라 | 화백회의(和白會議) |
나. 중앙집권 체제 형성
중앙집권국가에서는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부의 우두머리는 점차 독립성을 잃고 국왕 아래의 중앙귀족으로 재편상되었다. 기록마다 다르나 대략 고구려는 14관등. 백제는 16관등, 신라는 17관등으로 이루어 지고 신분제가 관등제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
삼국의 관등
고구려(14) | 백제 | 신라 | ||||
관등(14) | 관등(16) | 복색 | 관등(17) | 골품 | 복색 | |
1 | 1.대대로(大對盧,莫離支) | 1.좌평(佐平) | 자색(紫色) | 1.이벌찬(伊伐飡) | 진골 | 자의紫衣) |
2 | 2.태대형(太大兄) | 2.달솔(達率) | 2.이찬(伊飡, 伊尺湌) | |||
3 | 3.울절(鬱折, 主簿) | 3.은솔(恩率) | 3.잡찬(迊湌) | |||
4 | 4.태대사자(太大使者) | 4.덕솔(德率) | 4.파진찬(波珍飡) | |||
5 | 5.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 5.한솔(간솔, 扞率) | 5.대아찬(大阿飡) | |||
6 | 6.대사자(大使者) | 6.나솔(奈率) | 6.아찬(阿飡) | 6두품 | 비의(緋衣) | |
7 | 7.대형(大兄) | 7.장덕(將德) | 비색(緋色) | 7.일길찬(一吉湌) | ||
8 | 8.수위사자(收位使者) | 8.시덕(施德) | 8.사찬(沙湌) | |||
9 | 9. 상위사자(上位使者) | 9.고덕(固德) | 9.급벌찬(級伐飡) | |||
10 | 10.소사자(小使者) | 10.계덕(季德) | 10.대내마(大奈麻) | 5두품 | 청의靑衣) | |
11 | 11.소형(小兄) | 11.대덕(對德) | 11.나마(奈麻) | |||
12 | 12.제형(諸兄) | 12.문독(文督) | 청색(靑色) | 12.대사(大舍,大知) | 4두품 | 황의黃衣) |
13 | 13. 선인(先人) | 13.무독(武督) | 13.사지(舍知) | |||
14 | 14. 자위(自位) | 14.좌군(佐軍) | 14.길사(吉士) | |||
15 | 15.진무(振武) | 15.대오(大烏) | ||||
16 | 16.극우(剋虞) | 16.소오(小烏) | ||||
17 | 17.조위(造位) |
10관등중 5관등
1.국상
2.상가
3.패자
4.우태
5.조의
백제의 6좌평
1.내신좌평(內臣佐平) 왕명출납
2.내두좌평(內頭佐平) 재정
3.내법좌평(內法佐平) 의례
4.위사좌평(衛士좌평) 숙위, 경비
5.조정좌평(朝廷좌평) 형벌
6.병관좌평(兵官佐平) 국방
다. 지방제도
지방의 통치제도가 완성되어 종래 부족적 전통을 지닌 각부는 행정적 조직으로 개편되었고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은 일치하는 모습이다.
수도 | 지방 | 특별행정구역 | |
고구려 | 5부 | 5부(東西南北內, 욕살)-성(처려근지, 도사) | 3경(평양성, 국내성, 한성) |
백제 | 5방 | 5방(방령)-군(군장) | 22담로(왕족 파견) |
신라 | 6부 | 5주(군주)-군(군태수, 당주)-현(촌.성, 도사) | 2소경(사신) |
Ⅳ. 대외항쟁
1. 십자형외교
6세기말~7세기에 남북세력(돌궐-고구려-백제-왜)과 동서세력(수・당-신라)이 대립하는 십자형(十字形) 외교가 성립했다.
2. 백제의 신라공격
31대 의자왕은 642년 8월 윤충이 1만여군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비롯한 40성을 함락시키고 655년 다시 신라를 공격하여 30여성을 얻었다.
3. 고구려와 수의 전쟁
가. 수(隋)의 중국통일(581년)
수(隋) : 581~618 수도 장안(長安)
왕 | 재위 | 내용 |
1대 文帝(楊堅) | 581~604 |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선위를 받고 진(陳) 멸하여 중국을 통일. 30만명의 천자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입 |
2대 煬帝(梁廣) | 604~617 | 文帝(楊堅)의 2째 아들. 아버지와 형(梁勇)을 죽이고 호화궁정 축조(100만명동원), 유주 양자강 3천리 대운하(200만명 동원). 612년과 613년 고구려 침입. 宇文化及에게 시살(弑殺) |
3대 恭帝(梁侑) | 617~618 | 이연(李淵, 唐 高祖)에게 옹립되어 1년만에 폐위됨 |
나. 십자형 외교 : 고구려-돌궐-백제-왜 : 수-당
다. 여수전쟁
⑴ 수의 1차칩입(고구려의 선제공격) : 영양왕 9년(598년)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3만명의 기병(대장군 姜以式, 부장 乙支文德)으로 요서(북천성) 공격하자 수문제가 30만 천자군을 이끌고 침략했으나 중도에서 퇴각
⑵ 수의 2차 칩입 : 영양왕 23년(612년) 수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입(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수군 : 내호아(來護兒) 수군(水軍) 좌익위대장군, 주법상(周法尙) 부총관)하여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자 30만 5천명의 별동부대로 수도 평양을 치러와서 살수(薩水, 淸川江)에서 乙支文德에게 패배함(2700명 생존)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수의 장수 우중문에게 준 것인데 북방의 강건한 기개가 돋보이는 명작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귀신같은꾀는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셈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쟁에 이긴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바라오
Divine strategies exhaust the heavens,
Exquisite calculations probe the earth.
Battle won, your honor is already high,
Be content now and desist.
영역은 밀러(Michael J. Miller)가 한 것인데, <<Korean Poetry in Classical Chinese>> (Somyong Publishing, 1999)에서 인용했다. 위에 언급한 고구려의 큰 한 사람인 을지문덕의 5언고시는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에서 제목이 <유우중문(遺于仲文)>으로 되어 실려 있다.
⑶ 수의 3차 칩입 : 영양왕 24년(613년) 1월 100만대군 동원 실패
⑷ 수의 4차칩입 : 영양왕 25년(614년) 2월 수륙 양면에 걸친 공격을 감행했다.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 향하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함으로써 철수했다.
비사성(卑沙城) : 동진 서기 410년에 지어진 중국 랴오둥(遼東) 반도 남단의 다롄 만(大連灣) 북안(北岸) 다허상 산(大和尙山)에 있었던 고구려의 성.
4. 고구려와 당의 전쟁
가. 당(唐, 618~907)의 건국과 고구려의 위협
수가 멸망한후 새로 들어선 당은 고구려를 회유하여 굴복시키려 했으나 연개소문이 강경책을 쓰자 고구려 침입하였다.
나.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축조 : 천리장성
고구려가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이 야욕을 보이자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3년)부터 16년 간에 걸쳐 647년(보장왕 6년)에 완성된 북의 부여성부터 요동반도 비사성(卑沙城, 중국명大黑山山城)에 이르는 성을 축조하였다.
다. 연개소문의 정변(보장왕 원년 642년 10월) :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 200여명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고 대막리지가 되어 독재정치를 하고 대당강경책을 시행하였다.
라. 고구려와 당의 전쟁
당태종은 보장왕 4년 645년 10만 대군과 함께 고구려에 침공하여 개모성, 요동성,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安市城, 英城子)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만춘(楊萬春)과 양수봉 및 원군인 북부욕살 고연수, 남부욕살 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3개월간 잘 버티어 격퇴시켰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661년까지 무려 14차례나 공격했으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5. 고구려의 수・당 방어의 의의
고구려는 수・당을 잘 방어하여 백제와 신라까지도 방어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소모가 심했다.
Ⅴ. 삼국통일
1. 나당연합의 결성
가. 국제관계의 변화
642년 백제와 고구려는 여․제 동맹 결성하고 신라가 고립되자 신라는 수에 이어 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642년 8월 백제 윤충 1만의 군으로 신라 대야성 공격하여(금일의 내응으로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과 그 아내 소랑 사망) 당항성, 대야성 등 40여성 함락하고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강 반환요구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압박이 있자 신라는 648년 김춘추 문왕, 거연자, 온군해 등 호위병사 120명을 포함한 200명의 사절단 장안성에 가서 당태종과 나당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국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였다.
2. 백제의 멸망
가. 원인 : 655년 신라공격 30여성 함락
주색탐닉 : 무당 금화(김유신 내통자 壬子)
통치 질서 문란 : 병관좌평 부여성충(扶餘成忠)(상소후 28일 단식하다가 옥사), 중국 월주(越州) 총독 부여윤충(扶餘允忠) 형제를 투옥, 죄평 흥수(興首) 고마미지로 귀양, 福信 파면
지배층의 사치, 향락, 백성들의 일체감 상실
성충(605? ~656).
윤충(允忠)의 형으로 부여(扶餘)씨라는 설이 유력하며 일명 정충(淨忠). 백제 16관등의 최고직인 좌평(佐平)에 까지 올랐다. 656년 좌평의 지위로 주색에 빠진 의자왕에 충언을 올리다 투옥된다. 옥중에서 28일간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와중에 간언을 올렸다. 누신(纍臣. 옥에 같힌 신하) 성충은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의자왕은 이 간언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 결국 나라를 잃은 뒤 후회했다고 한다. 현재 부여에서는 성충과 비슷한 간언을 한 흥수(興首), 계백과 함께 삼충사(三忠祠)에 모셔지고 있다.삼국지, 신무장, 백제, 성충, 정충, 윤충
나. 나당 연합군의 침입
⑴ 나당연합군(18만명)
당나라 : 13만군.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蘇定方, 우장군 金仁問,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자 인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龎孝泰)
신라 : 5만 . 제1군 김법민(金法敏, 문무왕), 제2군 金庾信(선봉 김흠순(金欽殉. 반굴(盤屈)부) 1만, 좌익 김품일(金品日, 관창(官昌) 부) 1만, 우익 천존(天存)1만, 후군 金庾信 2만)
⑵ 신라 김유신의 황산벌 싸움 : 階伯과 아수라의 5천 결사대
⑶ 당군: 기벌포(금강 하류) 침입 : 제1진 의직(義直) 2만 결사대. 제2진 우소(于召), 제3진 자간(自簡), 제4진 무치(武治)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왕성의 목을 조여 갔다.
⑷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과 義慈王과 태자 扶餘孝 항복(660년)
의자왕, 왕자들, 대신과 장군88명, 주민 12,807명 포로로 장안 압송
⑸ 熊津都督府 등 5도독부 설치 : 7주 관할
시비성과 웅진성은 유인원(劉仁願) 1만명, 신라왕자 인태, 사찬 일원, 금찬 길라 등 신라군 7000명과 함께 주둔
3. 고구려의 멸망
가. 배경
지배층의 분열, 국력 약화, 나․당 연합군의 침입 저지(연개소문)→ 지배층의 내분(657년 연개소문 사후)
나. 멸망
보장왕 20년 661년 4월 소정방이 이끄는 27만명 평양성 포위 선도해(先道解) 평양성 사수. 8월 남생이 이끄는 요수방위군 설필하력(契苾何力) 격파
보장왕 21년 662년 방효태(龐孝泰) 수군 패사시킴
보장왕 25년 666년 男生이 대막리지가 되자 男建과 南山이 반란을 일으키고 싸움에 패한 남생은 당나라로 도주 투항
男建이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를 장악하자 연정토(淵淨土, 연개소문의 동생)는 3,543명(763호)를 이끌고 신라에 망명(고안승과연정토를 따라 신라로 찾아든 고구려의 유민들을 합산하면 23,100명이 넘는다)
보장왕 26년 667년 당나라 이적(李勣) 군대가 공격 시작, 신라 金庾信 호응
보장왕 27년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고구려 보장왕 항복함.
연개소문의 가계
증조부 | 연광(淵廣) | ||||||
조부 | 연자유(淵子遊) | ||||||
부 | 연태조(淵太祚) | ||||||
본인 | 연개소문(淵蓋蘇文) | 연정토(淵淨土) | |||||
자 | 연남생(淵男生 634년~679년) | 연남건(淵男建) | 연남산(淵男産) | ||||
손 | 연헌충(淵獻忠) 남건, 남산에 피살 | 연헌성(淵獻誠) | |||||
증손 | 연현은(淵玄隱) | 연현정(淵玄靜), | 연현일(淵玄逸) | ||||
현손 | 연비(淵毖) |
다.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
9개 도독부와 평양에 安東都護府를 두고 살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삼아 평양총독으로 임명했다.
4.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
가. 백제의 부흥운동
⑴ 복신의 진현성 탈환(661년)
⑵ 백제부흥(재건)운동
福信 재건 총사령관 | 12,000명. 주류성(周留城) 서천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서천군 한사면 지현리 산3, 사적 제60호 |
道琛 좌장군 | 10,000명. 임존성(任存城)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봉수산성(鳳首山城).국가지정문화재 사적90호 |
黑齒常之 | 10,000명. 眞峴城, 오늘날 黑石東山城, 密巖山城, 흑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鳳谷洞) 山 26-1.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5호 |
相如 | 3000명 이례성(尒禮城), 충남 논산군 노성 |
遲受信 | 3000명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聖興山城) 충남 부여군 임천면과 장암면에 걸쳐 세워진 산성. 사적 제4호 |
좌평 정무(正武) | 두시원악(豆尸原嶽). 충남 청양군 정산면 두릉윤성(豆陵尹城)추정 |
달솔 여자긴(餘自進) |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웅진(熊津 공주)의 한글 발음인 ‘고마(곰)나루’를 한자로 표현한 것 |
왕자 부여풍(扶餘豐) | 왕. 中大兄. 제명천황(보황녀)의 아들 |
⑶ 반목
내분으로 福信이 道琛을 죽이고 豐은 福信를 죽였다.
⑷ 부여 隆과 黑齒常之의 항복
⑸ 부흥운동 실패;
나. 고구려의 부흥운동
⑴ 漢城(재령)
검모잠(劍牟岑)이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浿水, 대동강) 남쪽으로 근거를 옮겨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에서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당의 장군 고간(高侃)이 대군을 끌고 쳐들어오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보인 끝에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망명해 버렸다.
나. 오골성(烏骨城)
670년에도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와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연합하여 오골성 일대에서 당나라의 말갈군를 격파한 바 있다.
연도 | 인물 | 내용 |
677 | 보장왕 | 조선군왕 임명. 부흥운동. 소환~682년 사망 |
685 | 보원(寶元) | 보장왕 손자. 태자 복남의 아들. 조선군왕.부흥운동 |
686 | 보원(寶元) | 충성군왕. 부흥운동 |
698 | 보덕(報德) | 조선군왕.부흥운동 |
699 | 덕무(德武) | 보장왕의 아들. 안동도독.부흥운동 |
698 | 大祚榮 | 대진(大震). 발해(渤海)~926 |
5. 나당전쟁과 삼국통일
가. 여․제 유민과 연합 ↔ 당은 거란, 말갈과 연합
나.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
백제-웅진 도독부 등 5 도독부, 신라-계림 도독부, 고구려-안동 도호부
다. 나당전쟁
문무왕 11년 671년 웅진 도독부 공격(所夫里州) 실치, 마전, 적성 전투
문문왕 15년 675년 매소성(買肖城) 전투
문무왕 16년 676년 기벌포(伎伐浦,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瓦草里, 기와풀 즉 기벌) 부근) 전투로 안동도호부 요동으로 축출
676년 통일 완성
6. 삼국통일의 의의
가. 의의 : 자주성 회복, 민족 문화의 기틀 마련(삼국의 문화적 전통, 경제력 확충)
나. 한계 : 외세의 협조, 대동강 이남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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