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찰도 왕후장상(王侯將相) 도 없지만
내 고향 금호는 역사 깊은 사찰(寺刹)이 있는 곳도 아니고 왕후장상(王侯將相) 같은 역사적 인물이 난 곳도 아니다 더욱 유명한 문필가나 과학자 등 내 세울 만한 인물이 난 고장도 아니다.
그렇다면 머 자랑할 것 있느냐 하면 할 말 없습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 오늘 내일 끝 날 국가가 아니고 누 만년 살아왔듯이 수 천만 대 후손들과 함께 살아갈 나라 아니던가요? 글로서 풀어보는 금호는 거문고 금(琴) 호수 호(湖)입니다.
글자 그대로 거문고 금(琴)은 임금이 둘 왕 왕(王 王) 아래 사람인(人) 밑에 이제 금(今) 이제 금은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하기에 따라서는 내일 일 수 있으면 또 먼 후일 일수도 있다는 시간의 개념(槪念)이기보다는 확신(確信)이며 믿음이며 사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당위(當爲)의 개념이다. 호수 호(湖) 즉 물 호는 호수 가득 물은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각을 가져 봅니다.
그러니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민주 사회에서 옛날과 같이 칼과 총이나 힘으로 권력을 탈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선택에 의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참 일군이 적어도 2명 이상은 태어난다고 해석을 합니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역사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어떠한 정신과 마음으로 사느냐? 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갖는 위대성을 알고 그에 맞춰 생활하며 실천 할 때 또 자식을 교육하고 가르칠 때 자연(自然)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에너지가 모여 알게 모르게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축적(蓄積) 되어 생각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금호 강 삼 백리 물길 그 가운데 있는 고장 더욱 이름마저 그 강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고장 한강물이 도시중심을 흐르고 있는 지금의 서울이 옛 이름이 한성이니 이만 보아도 예사롭지 않는 고장이 아닙니까? 누구나 다 고향에 대해서는 애틋한 정을 가졌거나 잊지 못할 추억들을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집이 가난하여 꾸려 다니는 일이 많았고 그 기다 가족들이 칠칠치 못하여 업신여김을 당하였다 해도 말입니다.
나의 고향 금호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입니다. 공장이라고는 술도가나 두부를 만드는 곳 그리고 정미소가 전 부인 곳입니다.
옛날 3대 부자는 정미소 주인 술도가 가진 분 과수원이나 농사를 많이 짓는 분입니다.
특히 금호는 과수원이 많아 자연히 시골 경제도 다른 어느 농촌보다는 좋은 편이었습니다.
내가 살던 집 앞으로 많은 물은 아니지만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때로는 여름철 많은 비가 내리면 삼호나 대창 가는 낮은 다리를 집어삼키고 성난 뱀의 형상을 한 누런 황토물이 느릿느릿 입을 크게 벌리고 유유히 온갖 것들을 다 싣고 넓은 낙동강(洛東江)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특히 사라호 태풍 때에는 많은 익사자가 있었으며 결실을 앞둔 온갖 곡식들을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뜨 내러 갔습니다. 더욱 팔월 명절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라 경제적 타격은 물론 그 상실감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강 건너 과수원에는 봄이면 빨강 봉숭아꽃 하얗고 붉은 능금 꽃이 장관을 이루고 가을이면 빨강 노랑 능금이 입맛을 돋우었지만 그림 속일 뿐 산지이지만 과수원 집 아이가 아니고서는 한 알 먹기도 어려운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소달구지에 실려 느릿느릿 공판장을 향해 가는 능금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집 뒤에는 넓은 금호평야가 야트막한 산 아래까지 동쪽으로는 유봉 산까지 서쪽으로는 팔공산 첫 자락인 무학 산까지 풍요롭게 펼쳐있어 서며 남쪽으로는 높지 않은 채약 산이 양남(호남과 약남)을 품에 포근히 안고 사근달 (대승지)못을 젓줄로 또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하양과 영천 사이 넒은 금호평야 봄이면 종달새 노랫소리가 물결치는 파-란 보리 고랑 사이에 집을 짓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인기척에도 자지러지게 소리치는 모습은 짐승 이지만 자식 사랑 이만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몸부림치는 것을 곧장 볼 수 있었습니다.
금호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북쪽 위치한 사일못(풍락지) 은 당시에는 경북도내에서 1.2 등 가는 큰 못이었으며 금호평야는 어지간한 가뭄에는 걱정을 덜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저수지이었습니다.
사일 못은 물을 공급하는 외에 인근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놀이터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생 청년들까지 못은 바다가 되었고 둑에서 지평(地平)을 열었습니다.
어지간한 아이이면 누운 헤엄으로 동서로 왔다 갔다. 했습니다. 헤엄에 대한 기술을 정상적으로 받아본 일 없는 아이들이라도 물이 많아 책 보따리를 가지고 건너야 할 때도 머리에 책을 이고 발헤엄으로 건너가는 재주도 할 줄 알았습니다. 자연 가운데서 스스로 배운 이 지식은 정말 산지식이 아닌가? 임기응변에 능한 사용가치가 매우 큰 배움이라는 것을 그때 터득하였습니다.
어느 여름 날 많은 비가 온 후 저수지에 매리가 넘어 매리 믿을 가보니 파인 웅덩이에 송어며 피라미며 잔챙이가 물 반 고기 반이었습니다. 이런 날이면 매운탕으로 사이 잘 먹지 못했든 배고픔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기쁜 날이 되었습니다.
이런 날은 땅거미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귀갓길에 넓은 금호평야 벼들이 바람에 고개 흔들며 출렁이는 모습이 고개 숙여 인사 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개선장군이나 된 듯 잡은 고기의 무게만큼이나 뿌듯하고 힘찼습니다.
당시 교과서에서 금호평야라 함은 단지 우리 집 뒷들 뿐 만 아니라 인근 읍 면 즉 영천 주안들 하양 자인 대창 진량 들을 모두 합친 그 이름을 금호강을 끼고 있어 금호평야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일 못의 추억뿐 아니라 여름철 금호 강에는 종발 (사발) 치기 (물속에 모래를 파서 종발 안에 된장을 넣고 그물을 쉬우고 모래 높이로 묻어 두면 고기들이 된장 냄새에 들어가면 나올 수없는)며 가뭄이 심한 해에는 짚으로 상여(喪輿) 줄을 만들듯이 굵고 길게 엮어 얕은 강바닥을 끌어 모우면 송어 피라미는 물론 모래무치 쏘가리 꺽다구 각종 물벌레 곤충까지 한 바커스를 잡아 가리지 않고 맑은 물로 씻어 갖은 악념과 함께 서말지 가마솥에 넣고 한 두어 시간 끓이면 이는 매운탕이 아니라 보약인 것입니다. 저녁에 한 한 사발 가득 먹은 이 보약은 아침에 그 배설물(排泄物)에서 희뿌옇게 정력에 좋다는 것을 흔적으로 남기는 것이다.
정월 달 맏이는 저녁 뜨는 달을 보기 위해서 마른 논에 깡통 밑에 구멍을 뚫어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하고 안에 숯을 넣어 불을 붙이고 빙빙 돌리면 깡통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우리들은 그것을 휘휘 돌리며 달을 보려 넓은 금호평야를 가로질러 서쪽 유봉 산으로 달려갔던 일이 어저께 같습니다. 아마 그때는 벌거숭이산이 많아 산불위험도 그리 높지 않았나 봅니다.
6.25동란 이후 모두가 어려웠던 시기 우리 동네에는 앞 마실 뒤 마실(용대 마실이라 함) 합해 60여 가구 새봄을 맞는 기쁨 보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구가 대 여섯 가구를 제외하면 전부였습니다.
굶음을 밥 먹듯 한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앞집 진 씨 성을 가진 아저씨는 춘궁(春窮)기에는 사일(풍락지) 못에 가서 말을 처 시장에 팔아 곡식을 사는데 어디 말(물속에서 자라는 수초의 일종으로 말이라고 하는데 색은 파란색이며 옛날에는 겨울철에 푸른색 채소를 먹을 수 없어서 비타민 C가 부족한데 대신 먹었음,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으면 아주 좋음) 이 무한정 있어야 말이지요. 그래서 더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만 없으면 사람이라도 모질어야 하는데 심성이 어질고 순박하여 많은 세월 흐른 지금까지도 보고 싶은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의 남동생은 어려운 가운데 열심히 공부하고 착하게 살아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소식은 바람 타고 들려오는 소식이었습니다만 분명 그리되었을 것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맑은 공기 시원한 물 자연과 어우러져 마음 끝 뛰어놀 수 있는 고장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고 담력(膽力)을 쌓을 수 있는 좋은 환경 지금도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환경이라 생각됩니다. 공장을 유치하여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과 같이 포도다 배다 과일 농사를 열심히 지으면서 땅의 정직성과 농부의 부지런함을 배울 때 능히 나라를 경영하는 훌륭한 인재가 만들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금호(琴湖)라는 지명이 갖는 위대성을 알고 맞춰 노력할 때 뜻하는 바가 이루어질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민의에 의한 진정한 지도자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위대한 지도자가 2명 이상 배출 할 수 있는 고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금호(琴湖)라는 이름 이 얼마나 멋진 이름 입니까?
성명학이니 사주관상학이니 풍수지리학이니 이러한 학문을 동원하여 풀어 설명할 것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금호란 고향 이름의 위대성을 믿고 노력하면은 능히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어찌 고향 자랑이 이뿐 이겠습니까만 또 후일담으로 남겨두고 오늘은 적어도 앞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들딸을 잘 교육하면 나라를 일으킬 훌륭한 인재가 난다는 것으로 다음을 기약합니다.
첫댓글 권 형 고맙소, 금호문집에 꼭 어울리는 글인것 같군요, 건필하시기 바랍니다.